과장을 보태 표현하자면 한국에선 그야말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바로 성소수자 2부작 특집 방송을 마친 <까칠남녀>에 관한 이야기다. 예능 프로그램의 포맷으로 성소수자 게스트를 전면에 등장시켜 관련된 정보를 제공하고 손쉽게 가지기 쉬운 편견과 오해를 바로잡았던 일은 국내에선 유례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지난 1월 1일에 방송된 2부에선 퀴즈 코너를 통해 성소수자들이 일상에서 마주하는 혐오와 차별, 사회적·제도적으로 겪는 문제점을 드러냄과 동시에 손쉽게 집단화되기 쉬운 이들이 각각의 고유한 개성을 지닌 개인임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다.

특히 이날 방송에는 성소수자 공동체가 성취하고자 하는 사회적 과제들이 언급되기도 했다. 나중이 아니라 올해, 지금 당장 이루어져야 할 그 목표들을 하나하나 살펴보고자 한다.

1. 성 중립 화장실 - 더 많은 사람의 건강과 편리함을 위해

 1일 방송된 EBS <까칠남녀> 성소수자 특집 2부 중 한 장면. "우리에게는 모두를 위한 화장실이 필요하다"는 문구와 함께 성중립 화장실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있다.

1일 방송된 EBS <까칠남녀> 성소수자 특집 2부 중 한 장면. "우리에게는 모두를 위한 화장실이 필요하다"는 문구와 함께 성중립 화장실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있다. ⓒ EBS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성소수자인 나조차도 처음 '성 중립 화장실'이라는 개념을 들었을 때, 그것의 필요성을 잘 인식하지 못했다. 그때는 젠더퀴어(성별을 '여성과 남성' 둘로만 분류하는 기존의 이분법적인 구분을 벗어난 성 정체성)의 존재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트랜스젠더의 경우 각자의 성정체성에 맞는 화장실을 쓰면 될 일이지, 특별히 불편한 게 있겠냐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나의 인식이 매우 안일했음을 알아채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특히 트랜스젠더의 경우 자신이 지닌 성정체성과 사람들이 그들의 외적 모습을 보고 판단하는 성별이 일치하지 않을 경우 화장실 사용에 큰 어려움을 겪기 때문이다. 수군거림이나 불편한 시선은 물론 성별을 묻는 돌발적인 질문도 예사다.

<까칠남녀> 성소수자 특집에 게스트로 초청된 박한희 변호사의 말에 따르면, 일본의 경우 트랜스젠더 직장인은 성소수자가 아닌 다른 동료들에 비해 10% 정도 더 많이 배뇨장애를 앓고 있다고 한다. 화장실을 편하게 이용할 수 없으니 대부분은 참는 선택을 하고 이것이 질환으로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아마 한국의 현실도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이날 방송에서는 트랜스젠더들이 화장실에 가지 않기 위해 물을 마시지 않는 현실이 언급되기도 했다.

상황이 누군가의 건강을 해치는 정도의 수준이라면, 이를 막기 위해서라도 성 중립 화장실의 설치는 꼭 필요하지 않을까. 특히나 함께 방송에 출연한 문화평론가 손희정씨는 부모가 성별이 다른 어린 자녀를 데리고 화장실을 가야 할 때도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언급해, 성 중립 화장실이 미칠 긍정적인 영향이 성소수자들에게만 국한되지 않을 것임을 알리기도 했다.

이 같은 장점과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성 중립 화장실에 대한 사회적 논의는 너무도 부족한 상태다. 올해는 논의의 활성화와 함께 제도적 정착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해본다.

2. 차별금지법 - 차별이라는 사회적 적폐를 향해 나아가려면

 EBS <까칠남녀> 방송 중 한 장면. 성소수자들의 다양한 정체성 중 'LGBT'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EBS <까칠남녀> 방송 중 한 장면. 성소수자들의 다양한 정체성 중 'LGBT'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 EBS


언젠가 "1990년대 여성주의 운동이 얻어낸 전리품이 '호주제 폐지'였다면 지금 성취해야 할 것은 아마 '낙태죄 폐지'일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물론 페미니즘 운동이 이루어야 할 목표는 많지만 가장 상징적인 것을 뽑자면 그렇다는 의미일 것이다.

비슷한 질문. 그렇다면 성소수자 운동이 현재 얻어내야 할 가장 상징적인 전리품이 있다면 무엇일까. 아마 '차별금지법'이 아닐까. 2007년 12월 처음 발의돼 성소수자 혐오 집단의 방해로 번번이 무산된 차별금지법 제정은 벌써 10년이 넘도록 지연되고 있다. 마주한 현실도 그리 만만치는 않다. 여느 때보다 보수 개신교계의 반발은 드세고 여전히 정부와 정치권은 그들의 눈치를 살피고 있기 때문이다.

<까칠남녀> 성소수자 특집 2부 방송에는 '차별금지법이 무엇이고 왜 중요하냐'는 질문이 등장했다. 벌써 10년을 넘게 이야기해온 나에게는 익숙한 질문과 답변이었지만 여전히 이 법안의 존재조차 모르는 사람들도 있기에 무척 반가웠다. 박한희 변호사의 말처럼 성적 지향, 성정체성을 포함해 모든 사람들이 각각의 이유로 사회적 차별을 겪곤 한다. 차별금지법이 그런 현실을 일거에 해소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차별이 있음을 확인하고 우리 모두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고민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차별이라는 사회적 적폐가 사라진 세상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만드는 나침반과 같은 존재인 셈이다. 너무 오래 끌어온 그 당연한 방향 설정이 이제는 이루어질 수 있기를 희망한다.

3. 동성 결혼 - 배우자인데 수술동의서 서명도 못한다니...

 EBS <까칠남녀> 방송 중 한 장면. 진행자 박미선이 "성소수자들을 다르게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 자체가 차별"이라고 말하고 있다.

EBS <까칠남녀> 방송 중 한 장면. 진행자 박미선이 "성소수자들을 다르게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 자체가 차별"이라고 말하고 있다. ⓒ EBS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묻곤 한다. '동성 결혼이 인정되면 좋은 일이긴 하겠지만 그게 그렇게까지 절실한 일이냐'고. '한국에 성소수자 차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동성애자 커플의 동거를 막는 것도 아닌데, 그냥 그렇게 살아도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까칠남녀>에 출연한 김보미 전 서울대 총학생회장의 설명을 들어보자. 동성 커플은 아무리 오래 살고 가까운 사이라도 서로의 법적 보호자가 될 수 없다. 그래서 위중한 수술을 받아야 하는 순간에도 서로의 수술동의서에 서명을 해줄 수도 없고, 갑작스러운 사별의 상황에서 제대로 상속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아마 이성애자 부부라면 겪지 않을 문제일 것이다.

강명진 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장의 말처럼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사회적 제도에 특정 집단만이 진입할 수 없도록 제약을 걸어두는 것은 한국이 불평등한 사회임을 의미한다. 특히나 동성 결혼을 둘러싼 문제는 성적 지향에 따라 제도적 권리를 동등하지 않게 인정하는 일이 어떻게 더 큰 차별로 뻗어져 나아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동성 커플이 부당한 이유로 다르게 취급되지 않는, 이 때문에 난관에 부딪혔을 때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고통을 겪지 않는 사회가 이제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차별과 혐오가 사라진 2018년을 기원하며

우여곡절도 난관도 많았던 방송이었다. 하지만 제작진들의 용기와 인내로 <까칠남녀> 성소수자 특집은 안전하게 시청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2부 방송의 마지막에 사유리가 했던 말처럼 "7년 전에는 성소수자들이 토크쇼에 등장해 자신의 존재를 이야기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지만, 드디어 <까칠남녀>의 제작진들은 지금 이곳에서 그 일을 해냈다. 나에게도 이는 매우 감동적인 일이었다.

이제는 더 많은 발전을 기대해도 좋을까. 박미선의 클로징 멘트처럼 올해는 성적 지향과 성정체성에 상관 없이, 그 누구도 불편하지 않고 차별받지 않는 사회를 이룩할 수 있길 바란다.

그리고 이를 위해 2018년이 시작되는 첫날 방송된 <까칠남녀>가 다시금 알려준 주요 과제들이 이제는 성취될 수 있기를 기원해 본다.

 EBS <까칠남녀> 방송 중 한 장면. 방송분은 '우리는 어디에나 있다'라는 말로 성소수자의 존재를 알렸다.

EBS <까칠남녀> 방송 중 한 장면. 방송분은 '우리는 어디에나 있다'라는 말로 성소수자의 존재를 알렸다. ⓒ EBS



성소수자 평등 성중립화장실 차별금지법 동성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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