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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 없잖아. 그런데도 외로워하지."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미사토가 카지에게 하는 말이다. 뜨끔하다. 누구나 저런 태도를 가지고 있지 않을까. 그러나, 헤르만 헤세의 '아우구스투스(Augustus)'가 아닌 다음에야, 아무런 노력 없이 모두에게 사랑받는 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결혼 직후 남편을 잃은 여인은 이웃집 노인에게 곧 태어날 아이의 대부(godfather)가 되어달라고 부탁한다. 노인은 대부가 되는 것은 물론, 여인의 소원을 하나 들어주겠노라고 말한다. 여인은 아이가 모두에게 사랑받는 존재가 되기를 바란다.

아름다운 용모의 아이는 어머니의 소원대로 모두의 사랑을 독차지한다. 그리고 무례하고 오만한 사람으로 자란다. 사람들의 무한한 호의가 역겹게 느껴지는 그는 어느 날, 사람들을 초대한 자리에서 자살하여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주려는 계획을 세우기에 이른다.

아우구스투스의 어머니가 돈이나 명예가 아닌 '사람들의 사랑'을 선물하려고 한 점은 생각해볼 만하다. 심리학자 매슬로가 설명하는 인간 욕구 피라미드에서 사랑은 대단히 중요한 위치에 있다. 사람은 생리적 욕구와 안전이 확보되면 사랑을 갈구하게 된다. 대인관계야말로 모두의 고민거리일 수밖에 없다.

잡담력

대인관계의 기본은 황금률이다. 대우받고 싶은 대로 대우하라는 것이다. 선행을 주고받는 선순환 고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좋은 시작이 중요하다.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라. 칸트의 정언명령을 지키려면 상대와의 관계에서 어떤 이득을 챙길 것인가라는 생각에서 떠나야 한다. 사람을 사람으로 대우하는 것, 그것은 상대를 나와 같은 사람으로 바라보는 관점이 전제된다. 그렇다. 관심을 가져야 한다.

많은 사람이 넓고 얕은 인간관계보다 좁지만 깊은 인간관계를 원한다. 하지만 이런 식의 이분법은 위험하다. 소수의 친구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을 수단화시킬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칸트의 말이 명언으로 회자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잡담이 능력이다> 표지
 <잡담이 능력이다> 표지
ⓒ 위즈덤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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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흉금을 털어놓는 친구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좋은 관계를 폭넓게 유지하는 것이 좋다. 그 방법으로 '잡담'을 제시하는 것이 사이토 다카시의 <잡담이 능력이다>(원제 '잡담력')라는 책이다.

잡담은 알맹이가 없다는 데 의의가 있다. 용건을 전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잡담의 목적이다. 잡담은 인사와 플러스알파로 이루어진다. 즉 인사는 잡담이 아니다. 인사가 잡담으로 이어지느냐 마느냐는 결국 플러스알파에 달려 있다. 인사와 함께 몇 마디 나누는 것인데, 이것을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잡담에 결론은 필요 없다. 따라서 무리하게 정리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이야기에 매듭을 지으려 하는 경향이 있는 남자들이 잡담에 능하지 못한 이유다. 여자들은 그렇게 하려는 경향이 적기 때문에 잡담에 능한 편이다. 마무리하지 않고 이야기를 계속 끌어가는 것, 그러기 위해 화제를 과감히 바꾸는 것이 잡담의 포인트다.

잡담의 마무리 역시 과감하여야 한다. "그럼 이만", "이쯤에서 실례하겠습니다"라는 말로 충분하다. 격식이 필요 없기 때문에 오히려 깔끔하게 마무리할 수 있다. 잡담은 분위기가 포인트인 만큼, 끝낼 때도 분위기만 좋으면 된다. 좋게 헤어지면 깔끔한 마무리다.
잡담이란 대화를 이용하여 그곳의 분위기를 조성해내는 기술이다. 따라서 잡담에 능한 사람이란, 화술이 뛰어나다기보다는 '시간을 잘 때우는 사람'이나, '이야기가 듣고 싶어지는 사람'이다. 요컨대 대화라기보다 '사람 사귐'에 가깝다. (39쪽)
잡담 능력은 기술이라서 훈련할 수 있다. 잡담은 대화라기보다 사람 사귐에 가까우므로, 모든 대인관계의 규칙인 황금률을 따르면 된다. 잡담의 기본은 경청이다. 칭찬과 긍정을 기본으로 하여, 상대방의 말을 진심으로 귀 기울여 듣는다. 상대방의 말에서 적절한 화제를 골라 더 자세하게 설명해 달라고 질문하라. 단답형 질문은 피하고, 상대가 관심 가질 만한 주제를 골라서 질문하는 것, 상대에게 발언권을 양보하는 것이 요점이다.

기호 지도

상대가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그에 대해 더 알고 싶은 것이 당연하다.
 상대가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그에 대해 더 알고 싶은 것이 당연하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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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잡담력 훈련의 도구로 '편애 지도'를 소개한다. 상대의 관심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잡담의 기본이므로, 상대의 기호를 미리 알고 있다면 대화가 쉬워진다. 잡담 상대가 될 만한 주변 사람의 관심사를 미리 파악해 지도 형태로 메모한 것이 '편애 지도'다. 일본식 한자가 귀에 잘 안 들어오니, '기호 지도'라고 부르고 싶다. 이것이 내가 이 책을 읽고 실천하기를 추천하는 아이템이다.
일상생활에서 만난 상대의 흥미나 관심사를 파악해두고 나만의 '편애 지도'에 기입해두는 것이다. 예를 들어 A씨라면 골프, 미식가 B씨라면 맛집, 최근에 아빠가 된 C씨라면 육아, 이런 식으로 메모해놓는다. (109쪽)
인물 당 관심사는 하나로 제한하자. 쉽게 활용하려면 많은 것을 기억하려는 욕심은 좋지 않다. 대화를 시작하자마자 상대방이 좋아할 만한 화제를 꺼내자. 상대방의 관심사가 나와 겹친다면 금상첨화다. 대화의 분위기를 띄울 수 있는 최강의 접점을 발견한 것이다.

기호 지도는 늘 최신 상태로 유지되어야 한다. 새로운 지인이 생길 수도 있고, 관심사가 변할 수도 있다. 잘못 알고 있었거나, 새로운 주제로 관심이 옮겨 갔을 수도 있다. 기호 지도를 언제나 업데이트하는 습관을 들이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인간관계의 기본이고,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다. 자기 주변 사람들에 대해 기호 지도를 만들자. 최소한의 관심, 그것이 시작이다.

행복은 사랑하는 힘

헤르만 헤세의 아우구스투스는 과연 복수에 성공했을까? 사람들이 그를 보러 몰려오기 직전, 그는 독이 든 와인을 마시고 죽으려 한다. 궁극의 복수를 꿈꾸며 독을 마시려는 순간, 한 노인이 방으로 들어온다. 자신의 대부이자, 모두에게 사랑받는 마법을 건 당사자, 빈스방거다. 그는 아우구스투스의 잔을 빼앗아 단숨에 독주를 들이킨다.

"내 마법으로 네가 비참해졌으니, 그 독은 내가 마시는 것이 맞다."

이어, 빈스방거는 아우구스투스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묻는다. 무조건 사랑받는 힘이 아니라, 무조건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원한다고, 아우구스투스는 대답한다. 빈스방거는 그의 소원을 들어준다.

아우구스투스는 사람들의 외면과 가난에 익숙해진다. 그래도 그는 자신보다 더 불행한 사람들을 돕는다. 키가 작아 빵집 문을 열지 못하는 아이에게 문을 열어주고, 맹인에게 길을 안내한다. 가진 것이 없어도, 그는 줄 수 있는 것을 준다. 친절한 눈빛, 다정한 인사, 동정과 이해의 몸짓을 그는 나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사람들의 표정만 보고도 무엇이 그들을 기쁘게 할지 알 수 있게 된다.

그렇다. 상대방의 관심사가 무엇인지 알아채는 능력은 결국 사랑하는 힘이다. 모두가 맹목적으로 자신을 사랑했을 때 아우구스투스는 비참했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주고 싶을 정도로 그들을 미워했다. 그러나 사랑받는 힘 대신 사랑하는 힘을 가지게 된 아우구스투스는 행복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어느 겨울날, 자신의 집으로 돌아와 빈스방거를 다시 만난다. 자신이 나쁜 아이였다고 자책하면서 어머니에게 다시 착해지겠다는 약속을 전해달라는 아우구스투스에게 빈스방거는 말한다. "어머니는 너를 정말 사랑하신단다." 그리고 빈스방거의 품에 안겨 잠이 든 아우구스투스는 천사들의 춤을 보면서 행복했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숨을 거둔다.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이 행복이다.


잡담이 능력이다 - 30초 만에 어색함이 사라지는

사이토 다카시 지음, 장은주 옮김, 위즈덤하우스(2014)


태그:#52권 자기 혁명, #사이토 다카시, #<잡담이 능력이다>, #대인 관계, #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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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이 강물처럼 흐르는 소통사회를 희망하는 시민입니다. 책 읽는 브런치 운영중입니다. 감사합니다. https://brunch.co.kr/@junat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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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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