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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진 천주교인권위원회 사무국장은 '감빵'과 인연이 깊습니다. 학창시절에는 학생운동으로 수감생활을 했고, 사회로 나와서는 인권활동가로서 구금시설 인권 향상을 위해 일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그가 tvN 드라마 <슬기로운 감빵생활>을 보고 느낀 점을 담은 '감빵' 이야기입니다. [편집자말]
공안 사건 또는 공안 관련 사건으로 '감빵'에 들어 온 분들은 대부분 매우 원칙적인 감빵생활을 하는 것이 보통이다(감방이 맞는 표현이나, 드라마에서 쓰이는 표기 방식대로 감빵이라고 씁니다). 특혜나 배려를 거부하고 주로 방에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면서 시간을 보낸다. 많은 공안수들이 모범적인 감빵생활로 교도관들이나 동료 수용자들에게 감동을 준 이야기들이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 

운동권 빵잽이들의 필독서 중 1988년 백산서당에서 발간된 <또 하나의 투쟁>이라는 책이 있었다. 부제가 "검거에서 석방까지, 투쟁의 원칙과 방도"였는데, 말지 기자였던 김경환씨가 조한백이라는 필명으로 쓴 책으로 알려져 있다.

<또 하나의 투쟁>은 양심수들이 체포되는 순간부터 경찰조사, 검찰조사, 기소, 재판, 구치소, 교도소 등을 거치는 동안 어떤 자세와 방식으로 맞서 대응하고 싸울 것인지 방향을 제시 해주는 옥중투쟁 지침서다.

'민혁당' 사건 김경환을 만나다

민혁당 사건으로 3년 8개월만에 특별사면으로 출소한 김경환씨가 마중나온 아내 이경희 씨와 포옹하고 있다. 2003년 4월 29일.
 민혁당 사건으로 3년 8개월만에 특별사면으로 출소한 김경환씨가 마중나온 아내 이경희 씨와 포옹하고 있다. 2003년 4월 29일.
ⓒ 이승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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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총련(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대의원으로서 학생운동을 하다가 수배되었을 때 이 책을 모 선배에게 받아 미리 읽어 두었다. '감옥에서 처우나 인권을 위해 싸울 때는 모든 수용자들의 권리를 위해 싸워야 한다'는 구절을 늘 마음에 담고 있었다.

지금은 한겨레두레협동조합에서 상임이사로 일하는 김경환씨와 나는 아주 끈끈한 인연이 있다. 2000년 서울구치소에는 우리 사회를 크게 뒤흔들었던 소위 '민혁당(민족민주혁명당)' 사건 관련자들이 수감되어 있었다. 그 유명한 '강철서신' 김영환씨만 전향서(반성문)를 쓰고 빠져나가고, 김경환씨를 비롯한 민혁당 관련자들은 중형을 선고받았다.

<또 하나의 투쟁>을 쓴 김경환씨는 서울구치소 10동 상층 2방, 나는 10동 하층 2방에 수용되어 있었다. 화장실 창문 쪽으로 수시로 '통방'을 했다. 러닝셔츠를 찢은 다음 긴 줄을 만들어 책을 주고받거나, 내가 계란찜이나 장조림을 만들어 올려주곤 했었다. 김경환씨는 훗날 안동교도소로 이감되어 산문집 <비상을 꿈꾸는 새는 대지를 내려다본다>을 출간하기도 했다.   

나는 영등포구치소(현재는 서울 구로구 천왕동으로 이사하여 남부구치소로 이름이 바뀌었다)와 서울구치소 그리고 의정부교도소에서 감빵생활을 했는데, 그때까지도 거실 안 화장실은 재래식 화장실이었다. 거실 안에 수도도 없어서 하루에 두 번 거실마다 긴 호수로 물을 공급했다.

그 잠깐의 시간에 빨래와 설거지를 다 해야 했는데, 독거실에서 있을 때는 그나마 충분했지만 혼거실에서는 물을 쓰기 위해 치열한 사투가 벌어지고는 했다. 고무장갑에 물을 담아 물풍선처럼 만들어 변기 구멍을 막아야 악취가 조금 덜 올라왔다. 2000년까지는 그 재래식 변기가 싱크대고 빨래터고 욕실이었다. 지금처럼 각 방에 수도가 있고 수세식 변기에 싱크대까지 설치되어 있는 것은 구금시설 처우개선과 인권옹호를 위해 많은 이들이 노력한 덕분이다.

나는 나름 슬기롭게 감빵생활을 했기 때문에 교도관들과 큰 마찰 없이 지냈다. 물론 못된 교도관들과는 싸우기도 했지만 대부분 논리적으로 따지며 보안과장이나 소장 면담을 통해 문제를 해결했다. 어르신들 반성문이나 항소이유서도 대신 많이 써드렸고 소년수들에게 한글이나 영어를 가르쳐 주기고 하면서 나름 신뢰를 쌓았기에 조금 자유롭게 감빵생활을 했다. 그래서 다른 수용자들이 먹기 힘든 외부 음식들이나 취사장 특식도 종종 맛볼 수 있었고 귀한 간식거리가 생기면 소지(사동도우미)들과 나누어 먹기도 했다.

특히 조직폭력배들은 학생운동으로 들어온 우리 같은 수용자들에게 묘한 동질감을 느끼며 친하게 지내고 싶어 했다. 대장(두목 또는 의장)이 있는 조직체계 안에서 의리를 지키는 것을 비슷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나 싶다. 의정부 교도소에 있을 때는 같은 사동에 있던 파주 S파 두목 조아무개씨와 호형호제하면서 지냈다. 그는 출소 후 살인사건 피의자로 서울 중앙지검 강력부에서 수사를 받던 중 가혹행위와 구타로 인해 사망하여 담당검사와 수사관들이 구속되기도 했다.

감빵에서 설탕은 금이다

드라마에서 비빔면 해 먹는 장면을 보고 바로 장을 봐서 해 먹음.
▲ 비빔면(뿔면) 드라마에서 비빔면 해 먹는 장면을 보고 바로 장을 봐서 해 먹음.
ⓒ 김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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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슬기로운 감빵생활>(아래 <슬감>)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감빵이 아니라면 맛볼 수 없는 별미인 비빔면(뿔면)을 극 중에서 '문래동 카이스트'로 분한 박호산 배우가 만들어 동료들과 나누어 먹는 장면이 반가웠다. 겨울 난방이라고는 오로지 연탄난로밖에 없었던 동절기에는 배식 때 국을 퍼주는 용도로 쓰는 대형 스테인리스 국자에 소지들과 매일 라면을 끓여 먹었지만, 난로가 없는 시기에는 단연 비빔면이 가장 인기였다.

우선 영치금으로 다음과 같은 재료들을 구비해야 한다. 컵라면의 면과 수프, 마늘장아찌, 무말랭이, 훈제닭다리, 소시지, 김, 참기름 등 기본 양념재료를 준비하는 것이 기본이다. 그런데 비빔면의 핵심인 단맛을 위한 설탕은 감빵에서 구하기가 매우 어렵다.

지금은 커피믹스 구매가 가능하니 설탕을 분리해낼 수도 있겠지만, 설탕은 술을 담글 때 꼭 필요한 재료이기 때문에 금주가 원칙인 소내에서는 관리가 엄격하다. 가끔 취사장에서 종이컵 하나 정도의 설탕을 얻어오기도 했지만 평상시에는 다른 방법으로 설탕 대용품을 사용한다.

비빔면 조리 시에는 컵라면 면을 뜨거운 물에 살짝 데친 후 찬물에 헹구고 사이다에 1~2분 정도 담근 다음 물기를 꽉 짜면 면에 단맛이 알알이 밴다. 비빔면 조리에서 이 과정이 상당히 중요하다. 타이밍을 놓치면 면이 불어 쫄깃한 맛이 없어지기 때문에 비빔면 대신 '뿔면'이라고 불렀다.

컵라면 수프를 아예 넣지 않으면 마늘장아찌와 무말랭이 맛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적정량의 라면 스프를 양념장에 섞는 것에서 내공의 차이가 생긴다. 이렇게 만들어진 뿔면이야말로 한 번도 못 먹어 본 사람은 많지만 한 번만 먹어본 사람은 없는 별미 중 별미다. 나는 요즘도 가끔 뿔면을 집에서 해 먹는다. 드라마에서 비빔면 먹는 장면을 보고 근처 편의점에 가서 재료들을 사와 바로 만들어 먹었다. 여전히 맛있었다.

감빵에서 종종 술도 담가 먹었다. 제조 방법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비법이기 때문에 여기서 공개하면 안 될 것 같다. 의정부 교도소에서는 내가 담근 술의 명성이 자자했다. 경로방 어르신들께 페트병 하나에 담가드리면 폐방 이후 저녁 식사 때 반주로 한 잔씩 드시고는 꼭 노래를 부르는 분이 계셔서 술 담근 걸 들킬까 불안해하고는 했다.

오늘은 술 담그는 법은 말고 술에 꼭 필요한 설탕 대용품을 만드는 방법만 공개한다. 감빵에는 항상 싸구려 사탕을 판다. 그 사탕 봉지를 수건으로 돌돌 싸맨 후 화장실 시멘트 바닥에 살살 빻으면 된다.

그냥 봉지째 빻으면 사탕이 조각나면서 생기는 날카로운 단면이 봉지를 뚫어 가루가 새어 나오게 되거나 가루 입자가 거칠어진다. 아주 살살, 마치 사탕을 얇게 갈아낸다는 생각으로 정성을 들어야 사탕 한 봉지가 소주잔 2개 정도 양의 사탕가루로 변모한다. 2시간 이상은 연속으로 빻아야 하는데, 보통 사동에서 가장 어린 친구가 온종일 작업해 사탕가루를 만든다. 대신 그 친구는 술 담그는데 드는 각종 비용을 면제받게 된다.

이밖에도 '계란프라이', 삶은 달걀, 닭죽, 장조림 등을 만들어 먹는 방법도 있는데 이는 '불'과 조리도구가 있어야 한다. 감빵에서 불을 만드는 비법은 SBS 예능 프로그램인 <정글의 법칙>에서 김병만씨가 돋보기로 빛을 모아 불을 내거나 나무끼리 마찰시켜 불을 일으키는 것처럼 아주 기발하다. 지금도 혹시 감빵에서 불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을 수 있으니 더 공개하기는 망설여진다. 이 밖에도 각종 조리 도구를 만드는 방법들이 있지만 오늘은 함구하기로 한다.

그 시절, 시계 속 J

징역시계
▲ 징역시계 징역시계
ⓒ 김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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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5화에서 불시에 검방이 실시되는 장면이 나온다. 극 중 장발장(강승윤)이 손에 차고 있다가 검방 때 걸린 문제의 시계는 내게도 소중한 추억 중 하나다. 교도소에서 고이 들고나와 간직하고 있던 그 시계를 찾았다.

당시 연예인이나 가족 또는 연인의 사진을 시계에 넣어 차고 다니는 사람들이 꽤 있었는데, 그런 일로 징벌을 받은 사례는 내 기억에는 없다. <슬감>에 나오는 나과장(박형수)처럼 쩨쩨한 보안과장을 본 적은 없다. 물론 종종 이상하리만큼 사명감이 넘쳐 수시로 순시를 하며 지적하는 것을 낙으로 삼는 간부들은 있었지만 징벌을 남용하지는 않았다.

나의 두 번째 감빵생활은 온 세상이 밀레니엄을 앞두고 혼란과 설렘을 오가던 1999년 겨울 12월 말이었다. 그때는 '썸씽'이라는 말은 있었지만 '썸을 탄다'는 말은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연애까지는 아니었고 썸을 타던 J가 있었다.

J는 내가 구치소로 넘겨진 후 편지도 자주 보내고 면회도 세 번 왔었다. 그런데 봄이 지나 내가 1심에서 실형 선고를 받자 연락이 끊겼다. 세 번의 편지에 답장을 받지 못하고 나서 더는 편지를 쓰지 않았다. J가 조카를 안고 졸업식에서 찍은 사진을 보내줬었는데, 그 사진을 옆방 동생이 시계에 넣어 주었다.

싸구려 시계 줄이 너덜너덜해지면 새 시계를 사서 줄만 뺀 다음 바꾸어 차고 다녔다. 그런 시계를 하나쯤 차고 다니는 게 잘나가는 수용자의 상징이기도 했기 때문에 일단 차고는 다녔지만, J는 내가 봄을 세 번 맞은 뒤 출소할 때까지 나를 찾지 않았다.

언제 끝날지도 모를 긴 징역살이를 기다려 줄 만큼의 사이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출소 후에 다시 만나 잠깐 연애도 했었지만 지금은 친구로 종종 안부를 물으며 잘 지내고 있으니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이럴 때는 장점이다.

tvN <슬기로운 감빵생활> 공식 포스터.
 tvN <슬기로운 감빵생활> 공식 포스터.
ⓒ CJ 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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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감>이 이제 한 회(18일이 마지막 방송)만을 남겨두고 있다. 아직 아껴둔 이야기들은 많으니 이 연재를 언제 끝낼지는 마지막 회를 보고 난 후 생각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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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덕진 천주교인권위원회 사무국장. 인권활동 16년 차. 대학 시절 학생운동을 하다가 국가보안법 위반, 집시법 위반 등으로 두 차례 구속돼 실형 2년 6개월을 선고받고 '감빵생활'을 하던 중, 열악한 구금시설 인권상황에 분노하며 인권활동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출소 직후 유일하게 감옥인권활동을 하던 천주교인권위원회에서 인권활동을 시작했다. 국가인권위원회 자유권 전문위원으로 전국 30여 개 구금시설에 대한 방문조사와 실태조사를 진행하는 등 구금시설 인권 향상을 위해 노력해왔다. '감빵' 수용자들의 인권 보장이 사회 전체 인권 발전에 기여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태그:#명랑한감빵생활, #슬기로운감빵생활, #슬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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