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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라는 단어는 그 자체로 파괴적이다. 승자에게도 패자에게도 씻을 수 없는 기억과 상처를 남긴다. 그 와중에 무고한 사람들이 죽고 파괴적인 소용돌이에 휩싸여 원래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다.
 
전쟁에서 필수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포로는 죄를 지은 죄인은 아니지만 죄인처럼 갇힌 상태에서 철저한 관리를 받아야 한다. 포로는 1949년 제네바 제3협약 「포로의 대우에 관한 협약」이 더욱 자세한 보호규정을 두고 있어 국제법에 의하여 일정한 대우를 받아야 할 권리가 있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과 중공군 포로들을 집단으로 수용했던 거제도 포로수용소에는 약 13만 2,000여 명의 포로가 수용되어 있었다고 한다. 현재 이곳은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매개체로 한국전쟁의 한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으며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인도적인 취급 특히, 폭행 · 모욕 · 공중의 호기심으로부터의 보호가 요구된다고 하지만 집단 수용이기 때문에 한계는 있었다. 수용국은 포로를 급양하여야 할 의무가 있으며 식량 · 피복 · 침구에 대해서는 원칙적으로 수용국 군대와 대등한 대우를 받게 되는데 당시 포로들은 열악한 한국군의 대우보다 더 나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포로가 수용되는 곳에는 또 하나의 사회가 만들어진다. 자유의지를 가지고 생활하는 일반인과 달리 감시를 받기는 하지만 이들에게도 또 하나의 갇힌 사회에서의 다양한 이슈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거제도에 포로수용소가 자리하게 된 것은 전쟁이 길어짐에 따라 포로 숫자가 늘어나면서 체계적으로 포로를 관리할 필요가 있었는데 부산 거제리(현재 부산시 연제구 거제동)에 있던 것을 거제도로 옮긴 것이다. 제주도가 거론되기는 했으나 거리상 문제가 있어 대규모 수용시설이 수용 가능한 거제도가 그 대상지가 된 것이다.
 



한반도에서 일어난 한국전쟁은 이른바 제3세대 전쟁으로 분류될 수 있다. 지금은 제4세대 전쟁이라는 국가 없는 전쟁의 시대에 직면했다. 정부와 국민, 군대와 시민, 정규군과 비정규군 간의 경계가 모호해짐과 동시에 종교나 문화, 증오 등의 초국가적인 행위자가 등장한다. 비대칭 전쟁은 군사적으로 압도적 우위에 있는 적을 상대하는 것으로 일명 '정당하지 못한 수단으로 싸우는 것(Fighting unfair)'라고 볼 수 있다. 


전쟁이 언제 끝나게 될지 모르는 상태에서 갇혀 지내는 것은 포로들 간의 이념 대립을 부추겼다. 처음에는 공산주의를 지향하며 싸우다가 포로로 잡혔던 이들은 한국군의 교화정책에 의해 반공과 공산으로 나뉘게 된다. 반공을 지향하는 사람의 수가 공산을 지향하는 사람보다 적었기에 주로 당하는 쪽은 반공 쪽이었다. 


지금은 군대에서 이런 1/4톤 지프차를 보기 힘들겠지만 필자가 군생활할 때는 이 1/4톤 지프차는 장교를 비롯하여 영관이나 장군급까지 자주 이용하는 차량이었다. 생각보다 가볍고 호루를 씌우고 벗기기가 쉬워서 비교적 관리가 편한 차량이었다. 전자적인 것이 거의 없기에 고장도 덜했지만 차량의 승차감은 정말 좋지 않았다. 


반공과 공산의 대립을 부추긴 것은 어떻게 보면 UN의 포로 관리 때문이기도 했다. UN 측에서는  포로 개개인의 자유의사에 따라 한국, 북한, 중국, 또는 타이완을 선택할 수 있는 이른바 자유 송환 원칙을 주장했지만 공산군 측은 모든 북한 공산군과 중공군 포로는 무조건 각기의 고국에 송환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결국 미군과 포로들 간에 저항으로 번져갔고 반공포로와 공산포로 간의 유혈충돌로 이어졌다.
 



각종 탈 것들이 들어오면서 또 한 번의 변신을 시도하는 거제 포로수용소를 돌아보면서 드는 생각은 전쟁이 만드는 참상은 일개 개인이 어떻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도 지키기 힘들고 지키고자 해도 의지대로 될지도 의문이다. 전쟁은 기록되지만 기록되지 않은 개인들의 참담한 삶은 과거 속으로 지나갔을 뿐이다. 


친공이 다수였던 수용소 내에서는 자연스럽게 그들이 주도권을 잡고 반공 포로들에게 살인을 서슴지 않았다. 포로수용소 내에서는 일대 살육전이 벌어지면서 수용소는 말 그대로 무법천지가 되어 버렸다. 수용소 내의 공산사회를 만들어서 재판을 열어 반공포로들을 처형했다. 

지금 시대는 무엇보다 무기가 중요한 시대에 직면해 있다. 현대전을 말하면서 J.F.C. 풀러는 이런 말을 남겼다. 

"전쟁 도구인 무기는 제대로 된 것만 갖춘다면 승패의 90%를 좌우한다. 전략과 지휘, 리더십, 용기, 규율, 보급, 조직을 비롯한 전쟁의 모든 유형무형의 장치들은 무기의 우월성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유형무형의 장치들은 기껏해야 전쟁의 1퍼센트 만을 차지할 뿐이다." 


거제도는 섬이지만 육지와 가까운 지리적 이점으로 인해 정권에서 멀어진 사람들이 유배를 가는 곳이기도 했지만 이처럼 작지 않은 면적을 가지고 있기에 대규모 수용소도 자리할 수가 있었다. 전쟁은 사람을 죽이고 포로를 만들었다. 갇혀 지내는 포로들은 서로를 대립하며 자신의 사상을 갈등으로 표현했다. 평범한 생활조차 되지 않았던 그 공간에서 서로를 공격하고 또 하나의 전쟁을 만들어내던 곳이 거제도 포로수용소였다. 
 
복잡하게 변화하는 전쟁 양상에 대처하는 마법은 없다고 하지만 전쟁 그 자체는 씻을 수 없는 비극과 상처를 남긴다는 점에서 어떤 이점이 있는지 궁금해진다.
 

포로수용소 유적공원 관광 모노레일 준공식이 2월 9일 유적공원에서 열릴 예정이다. 한 줄의 레일을 이용하여 달리는 모노레일은 1901년에 독일의 부페르탈 시에 만든 것이 처음으로 공사비도 지하철보다 적게 들어가기에 주로 관광지에 많이 설치가 되는 편이다. 레일에 차체가 매달려 달리게 된 방식인 현수식과 차체가 레일 위를 구르는 방식인 부좌식이 있는데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의 관광 모노레일은 부좌식으로 만들어졌다. 


한 량의 모노레일에는 6명이 들어갈 수 있도록 만들어졌는데 관광 모노레일 개통으로 인해 짚트랙과 비슷한 놀이시설인 아바타 포에 탈 것이 늘어나면서 종합 관광지로서의 모습으로 변모할 것으로 기대가 된다.
 


한국에서 전쟁의 참상을 가장 리얼하게 접할 수 있는 곳 중에 하나인 거제도 포로수용소는 포로들의 생활과 이념 대립이 먹먹하게 기억 속에 남았다. 무기가 첨단이 되고 대량학살 무기가 진화할수록 향후 전쟁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전쟁이 될 가능성이 높다. 1951년 2월부터 고현, 수월지구를 중심으로 설치된 거제도 포로수용소는 최대 17만 3천 명의 포로 룰 수용하였으며 현재 잔존건물의 일부가 남아 있어 당시 흔적을 간접 경험해볼 수 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 하절기 : 3월 ~ 10월 09:00 ~ 18:00
- 동절기 : 11월 ~ 2월 09:00 ~ 17:00

휴관일 

- 추석· 설날 당일
- 1월, 2월, 3월, 6월, 9월, 10월, 11월, 12월 매월 네 번째 월요일

태그:#거제도포로수용소, #포로수용소, #거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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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든지 쓰는 남자입니다. 영화를 좋아하고 음식을 좋아하며, 역사이야기를 써내려갑니다. 다양한 관점과 균형적인 세상을 만들기 위해 조금은 열심이 사는 사람입니다. 소설 사형수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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