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집에서 뒹굴거리다 우연히 네이버의 배너 광고를 보고 찾아간 곳, 김선우 시인(아래 김 시인)과 손아람 작가(아래 손 작가)의 작은 콘서트. 두 시간 여의 시간은 뜻밖의 선물이었다. 손 작가는 (비록 그의 작품을 읽어본 적은 없지만)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의 대표작 <디마이너스>에 관한 이야기를 친구에게서 들은 기억이 있다. 그러나 김 시인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나는 시를 읽지 않는다. 그러니 특정 시인의 이름이 나에게 요령부득일 수밖에. 

지난달 24일 '일X노동X문학'이라는 테마를 걸고 진행된 토크 콘서트는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진중하고 무거운 소재를 다루었다. 노동, 혁명, 자살 등 잇따라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키워드가 등장했다. 김 시인과 손 작가는 되도록 분위기가 너무 무거워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노력을 하는 듯 했으나, 그들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너무 분명하고 강렬해서 그 노력은 쉽사리 결실을 맺지 못했다.

그러나 무거운 분위기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김 작가의 울음기 가득한 목소리에 담긴 어떤 사랑과 희망 같은 것에, 그리고 손 작가의 가벼우면서도 신랄한 위트에 청중들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어쩌면 한순간 가슴을 진동시키고 순식간에 잊히는 숱한 콘서트 중 하나에 지나지 않은 것이 될 수도 있었지만, 굳이 지난 이야기를 이처럼 시간을 내어 쓰게 된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하나의 시이다. 김 시인의 시.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여기에 그 전문을 한 자 한 자, 적어본다.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2011년을 기억함)

그 풍경을 나는 이렇게 읽었다
신을 만들 시간이 없었으므로 우리는 서로를 의지했다
가녀린 떨림들이 서로의 요람이 되었다
구해야 할 것은 모두 안에 있었다
뜨거운 심장을 구근으로 묻은 철골 크레인
세상 모든 종교의 구도행은 아마도
맨 끝 회랑에 이르러 우리가 서로의 신이 되는 길

흔들리는 계절들의 성장을 나는 이렇게 읽었다
사랑합니다 그 길밖에
마른 옥수숫대 끝에 날개를 펴고 앉은 가벼운 한 주검을
그대의 손길이 쓰다듬고 간 후에 알았다
세상 모든 돈을 끌어모으면
여기 이 잠자리 한마리 만들어낼 수 있나요?
옥수수밭을 지나온 바람이 크레인 위에서 함께 속삭였다
돈으로 여기 이 방울토마토꽃 한 송이 피울 수 있나요?
오래 흔들린 풀들의 향기가 지평선을 끌어당기며 그윽해졌다

햇빛의 목소리를 엮어 짠 그물을 하늘로 펼쳐 던지는 그대여
밤이 더러워지는 것을 바라본 지 너무나 오래되었으나
가장 낮은 곳으로부터 번져온 수많은 눈물방울이
그대와 함께 크레인 끝에 앉아서 말라갔다
내 목소리는 그대의 손금 끝에 멈추었다
햇살의 천둥번개가 치는 그 오후의 음악을 나는 이렇게 기록했다
우리는 다만 마음을 다해 당신이 되고자 합니다
받아줄 바닥이 없는 참혹으로부터 튕겨져 떠오르며
별들의 집이 여전히 거기에 있고

온몸에 얼음이 박힌 채 살아온 한 여자의 일생에 대해
빈 그릇에 담기는 어혈의 투명한 슬픔에 대해
세상을 유지하는 노동하는 몸과 탐욕한 자본의 폭력에 대해
마음의 오목하게 들어간 망명지에 대해 골몰하는 시간이다
사랑을 잃지 않겠습니다 그 길밖에
인생이란 것의 품위를 지켜갈 다른 방도가 없음을 압니다
가냘프지만 함께 우는 손들
자신의 이익과 상관없는 일을 위해 눈물 흘리는
그 손들이 서로의 체온을 엮어 짠 그물을 검은 하늘로 던져올릴 때
하나씩의 그물코,
기약 없는 사랑에 의지해 띄워졌던 종이배들이
지상이라는 포구로 돌아온다 생생히 울리는 뱃고동
그 순간에 나는 고대의 악기처럼 고개를 끄덕인다
태어난 모든 것은 실은 죽어가는 것이지만
우리는 말한다
살아가고 있다!
이 눈부신 착란의 찬란,
이토록 혁명적인 낙관에 대하여
사랑합니다 그 길밖에

온갖 정교한 논리를 가졌으나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옛 파르티잔들의 도시가 무겁게 가라앉아가는 동안
수만개의 그물코를 가진 하나의 그물이 경쾌하게 띄워올려졌다
공중천막처럼 펼쳐진 하나의 그물이
무한 하늘 한녘에서 하나의 그물코가 되는 그 순간
별들이 움직였다
창문이 조금 더 열리고
두근거리는 심장이 뾰족한 흰 싹을 공기 중으로 내밀었다
그 순간의 가녀린 입술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나는 들었다 처음과 같이
지금 마주본 우리가 서로의 신입니다
나의 혁명은 지금 여기서 이렇게

(창비 시선집,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김선우 중에서)

이 시를 읽어나가는 김 시인의 목소리에 반한 것일까.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시인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린다. 전태일 평전을 읽으며 처음으로 독서의 와중에 눈물을 흘렸다는 20대의 김 시인이 책을 읽는 모습을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이토록 인간에 대한 사랑과 연민으로 가득 찬 사람이어야 문학을 할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녀는 문학이 꽃피는 자리가 어디인지에 대하여 열변을 토했다. 문학의 역할, 문학의 기능, 문학의 자리. 인간의 고통이 자라나는 곳에, 그러니까 악의 꽃이 피어나는 자리에, 그 부당함에 대해, 의문을 던지고 그 부당함을 세상에 여실없이 드러내는 것, 그것이 문학이 자리하는 곳이고 역할하고 기능하는 법이라는 이야기였다.

사랑합니다 그 길밖에. 부조리를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한 인간에 대해 동정하고 연민하기를 멈추지 않기 위해서는, 사랑하는 것을 멈추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 길밖에는 없다. 김 시인은 그녀의 삶 어느 순간에 그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던 것이다. 혹은 그녀와 생각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함께 같은 이야기를 하며 사랑을 나누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외부에 신을 상정하고 살지만 당장 우리 곁에 있는 누군가가 우리의 신이 되어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한다. 여기서 신이란 무엇인가. 단순하다. 사랑이다. 우리가 사랑할 수 있고 우리를 사랑해줄 수 있는 누군가이다. 만약 어딘가에 우리 모두를 초월하는 어떤 신적인 존재가 있다고 한다고 해도, 그 신이라는 것이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면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사랑이 없다면, 인생이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살아가는 것. 이렇게 정의해볼 수도 있겠다 싶다. 사랑의 범위를 넓혀가는 것. 단, 그 정도를 늦추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서.

'공중천막처럼 펼쳐진 하나의 그물이 무한 하늘 한녘에서 하나의 그물코가 되는 순간'을 언젠가 내 눈으로 볼 수 있다면. 김선우 시인과 손아람 작가는 그런 순간을 본 경험이 있었던 것일까. 그 가슴 절절한 순간을 직접 느껴본 것일까. 나도 그럴 기회를 가질 수 있다면 이 둘처럼 사랑이 가득 담긴 따뜻한 작품을 써낼 수 있을까. 지금 내 사랑의 실천은 얼마나 미약한 것인지.

김선우 시인은 혁명이라는 무겁고 심각한 단어마저도 따듯하고 낭만적인 단어로 바꾸어 놓았다. 그분을 닮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단 한 번도 가져보지 않았던 생각이다.


태그:#김선우 시인, #손아람 작가 , #무한한 나의 혁명에게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어디에도 마음을 붙이지 못 해, 다른 이들의 치열함을 흘긋거리는 중입니다. 언젠가 나의 한 줄을 찾을 수 있길 바랍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