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화가 18일 강릉 스피드스케이팅경기장에서 진행된 평창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500m 경기에서 은메달을 거머쥐었다. 경기가 끝난 뒤 눈물을 흘리는 이상화를 금메달을 딴 나오 고다이라(일본)가 위로하고 있다.

이상화가 18일 강릉 스피드스케이팅경기장에서 진행된 평창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500m 경기에서 은메달을 거머쥐었다. 경기가 끝난 뒤 눈물을 흘리는 이상화를 금메달을 딴 나오 고다이라(일본)가 위로하고 있다. ⓒ 소중한


이상화와 고다이라 나오(일본). 단일 경기로는 2018 평창 동계 올림픽 최고의 빅매치로 꼽히던 이 라이벌전의 승자는 1500m 6위, 1000m 은메달에 이어 드디어 금메달을 목에 건 고다이라의 승리로 끝났다. 고다이라는 이상화가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에서 세웠던 올림픽 기록(37초28)을 훌쩍 뛰어넘는 새로운 올림픽 기록(36초94)을 세웠다. 서른을 넘은 나이에 전성기를 연 '대기만성 스케이터' 고다이라는 올림픽의 가장 높은 단상에 설 자격이 있다.

이상화 역시 최선을 다해 값진 은메달을 따냈다. 이상화에게는 소치올림픽이 끝난 후부터 '올림픽 3연패'라는 무거운 짐이 따라 다녔다. 역대 동계 올림픽 역사에서 스피드 스케이팅 여자 500m 3연패를 달성한 선수는 단 한 명(보니 블레어, 1988년-1992년-1994년)뿐이었고, 4년 주기 올림픽에서의 3연패는 아무도 없었다. 따라서 우리 국민들은 한국의 자랑스러운 이상화가 전대미문의 대기록을 세워주길 기대했다.

이상화가 은메달로 평창에서의 레이스를 끝내고 울음을 터트렸을 때 사람들은 아쉬움보다는 그녀에 대한 미안함을 감출 수 없었다. 그동안 우리가 이상화에게 지게 했던 짐이 얼마나 컸는지 새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상화는 간이 시상식이 끝나고 인터뷰 현장에서 끝내 '은퇴'라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어쩌면 그의 질주를 좀 더 볼 수 있지 않을까'하는 막연한 기대가 생기는 이유다.

올림픽 2연패, 세계 신기록 4회 경신에 빛나는 이상화

이상화 '3연패 향한 마지막 담금질' 이상화가 2018 평창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500m 경기를 하루 앞둔 17일 오후 강릉 스피드스케이트경기장에서 최종 훈련을 하고 있다. 이상화는 500m 경기에서 올림픽 3연패를 노린다.

이상화가 2018 평창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500m 경기를 하루 앞둔 지난 17일 오후 강릉 스피드스케이트경기장에서 최종 훈련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이상화는 이미 중학 시절부터 국내 여자 일인자에 올랐던 천재 선수다. 고1 때 출전했던 2005년 종목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500m에서 3위를 차지했는데 한국 여자 선수가 이 대회에서 입상한 것은 이상화가 역대 최초였다(남자는 제갈성열). 이상화는 만 16세의 나이로 출전한 2006년 토리노 동계 올림픽에서도 500m 5위에 오르며 세계 무대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상화를 세계 빙상계에 널리 알린 대회는 역시 2010년 밴쿠버 동계 올림픽이었다. 당시 이상화는 2차 시기 합계 76초099의 기록으로 독일의 예니 볼프, 중국의 왕베이싱을 꺾고 올림픽 여왕에 등극하는 기염을 토했다. 당시 그녀의 나이 만 20세에 불과했기에 세계 빙상계는 한동안 여자 단거리에 이상화의 '독주 시대'가 열릴 것이라 예상했다(참고로 당시 고다이라는 12위의 평범한 성적에 머물렀다).

올림픽 이후 중국의 위징이라는 새로운 라이벌이 등장하며 다소 주춤하는 듯했던 이상화는 2012년 종목별세계선수권대회 우승과 2012-2013 월드컵 시리즈 8연속 우승이라는 괴력을 선보이며 여자 단거리를 평정했다. 특히 같은 기간 세계 신기록을 네 차례나 경신하는 무시무시한 기록 단축 속도를 과시했다(이상화가 2013년 11월에 세운 36초36은 여전히 깨지지 않은 여자 500m의 세계 기록이다).

2010년 밴쿠버 올림픽이 이상화에게 '도전의 대회'였다면 2014년 소치 올림픽은 '사수의 대회'였다. 워낙 기록이 상대를 압도하고 있어서 이상화의 방심 여부가 유일한 불안요소로 꼽혔을 정도. 하지만 이상화에게 방심이란 있을 수 없었다. 이상화는 2차 레이스에서 올림픽 신기록을 세우며 올림픽 2연패의 꿈을 이뤘다. 1차 시기에서는 미국의 브리트니 보를 아웃코스에서 추월하는 위엄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상화의 소치 올림픽 1,2차 시기 합산 기록은 74초70이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두 번째로 성적이 좋았던 이보라(20위)의 기록은 77초75였다. 1/100초를 다투는 500m 종목에서 국내 2인자의 기록이 이상화와 3초 이상 차이가 난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이상화를 제외하면 한국 여자 단거리에서 적수가 없다는 뜻이다. 스피드 스케이트 선수로서 모든 것을 다 이룬 이상화가 쉽게 '은퇴'란 말을 꺼낼 수 없던 이유다.

금만큼 빛났던 아름다운 은메달, 이제 원하는 길 선택하길

이상화는 2016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을 따내면서 여전히 건재한 기량을 과시했다. 하지만 고질적인 무릎 부상은 이상화의 기량을 점점 떨어트렸고 그사이 라이벌 목록에 들어 있지도 않았던 일본의 고다이라가 무섭게 정상까지 치고 올라왔다. 하지만 이상화는 몇 번이고 포기하고 싶은 순간에도 끝내 좌절하지 않았다. 평창 올림픽은 국민들과의 약속이었고 이상화가 자기 자신과 한 약속이었기 때문이다.

이상화는 착실한 재활과 준비 끝에 2017-2018 시즌 월드컵 시리즈에서 5번의 2위를 차지했다(1위는 모두 고다이라였다). 특히 작년 12월 미국 솔트레이크시티에서 열린 4차 대회에서는 36초71이라는 좋은 기록을 올리며 평창올림픽을 위한 순조로운 준비를 알렸다. 이상화는 대회가 임박하면서 쏟아지는 미디어의 관심 속에서도 의연하게 대처하며 대회를 준비했다.

당초 500m와 1000m에 출전할 예정이었던 이상화는 주 종목인 500m에 집중하기 위해 1000m 출전을 포기했다. 하지만 고다이라보다 빨랐던 100m 기록(10초20)에도 불구하고 최종 기록 37초33으로 앞서 올림픽 기록을 세운 고다이라에게 금메달을 내주고 말았다. 네 번째 올림픽 출전 만에 따낸 이상화의 첫 번째 은메달이었다. 동메달의 주인공 카롤리나 에르바노바(체코, 37초34)와는 정확히 1/100초 차이였다.

이상화와 고다이라는 경기장에서는 엄청난 라이벌이지만 빙판 밖에서는 절친한 사이로 알려져 있다. 이날도 일장기를 두른 고다이라와 태극기를 두른 이상화가 경기가 끝난 후 서로를 안아주며 축하와 존경을 나누고 환하게 웃는 장면이 중계 카메라에 잡히기도 했다. 양국 언론에서는 두 선수의 라이벌 관계를 집중적으로 끄집어내며 경쟁 관계를 부각했지만 정작 두 선수는 10년 지기 친한 친구였다.

 이상화 선수가 18일 오후 강원도 강릉스피드스케이팅 경기장에서 열린 평창동계올림픽 여자 스피드스케이팅 500미터에서 37초33을 기록하며 은메달을 획득한 뒤 태극기를 들고 일본 고다이라 선수와 트렉을 돌고 있다.

이상화 선수가 18일 오후 강원도 강릉스피드스케이팅 경기장에서 열린 평창동계올림픽 여자 스피드스케이팅 500미터에서 37초33을 기록하며 은메달을 획득한 뒤 태극기를 들고 일본 고다이라 선수와 트렉을 돌고 있다. ⓒ 이희훈


이상화는 2022년 베이징 올림픽 도전 여부를 묻는 질문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속내를 감추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20년 넘게 지속해 온 선수생활 지속 여부를 막 경기가 끝난 시점에 쉽게 결정 내리긴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상화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이제는 우리가 전적으로 그녀를 응원해줘야 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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