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학생들에게 학기 초에 종이를 주고 여성 독립운동가와 남성 독립운동가 이름을 아는 대로 써보라고 해요. 그런데 대부분 여성 독립운동가를 쓰는 종이에는'유관순'이라는 이름밖에 못 써요. 남성 독립운동가는 10명쯤 쓰죠."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알리고 업적을 기리는 데 힘써 온 이윤옥(60)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은 20년째 학생들에게 '아는 여성 독립운동가'가 누군지 물어본다. 하지만 학생들이 답하는 이름은 언제나 '유관순' 한 명이다.

이 소장은 주목받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여성 독립운동가를 밝혀왔다. 2011년부터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소개하고 그들의 삶을 시로 표현한 <서간도에 들꽃피다> 책 시리즈를 지금까지 8권째 냈다. 한 권에 20명씩, 총 160 여 명의 여성 독립운동가를 소개해온 것이다.

부산 일신여학교가 주도한 3.1운동 만세 시위지에 찾아간 이윤옥 소장
 부산 일신여학교가 주도한 3.1운동 만세 시위지에 찾아간 이윤옥 소장
ⓒ 이윤옥

관련사진보기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은 1만 4830명 중 여성은 고작 296명(2%)에 불과하다. 가부장제 사회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활약상을 평가절하했고,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그런 점에서 이 소장이 해외까지 가서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흔적들을 기록하고 정리한 것은 값진 자료다.

이 소장은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여성들도 3.1 만세운동에 활발히 동참했는데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며 "90년대 이전에는 남성 위주의 보훈 정책을 펴서 여성 독립운동가를 거의 발굴해내지 못한 것이 원인이다"라고 지적했다. 이어 "독립운동에서 여성들은 단순한 조력자가 아니라 무장투쟁을 비롯한 군자금 모집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며 여성 독립운동가의 업적과 가치를 재조명해야 한다고 밝혔다.

다음은 이 소장과의 일문일답을 정리한 내용이다.

여성에게는 30년 늦은 독립유공자 서훈

윤형숙 열사의 사진
 윤형숙 열사의 사진
ⓒ 윤치홍

관련사진보기


- 99주년 3.1절을 맞아 소개할 만한 여성 독립운동가가 있을까.
"동풍신 열사가 있다. 1919년에 17살의 어린 나이로 함경북도 명천 화대장터에서 만세시위를 이끌었다가 1921년에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유관순 열사와 비슷하다. 하지만 유관순 열사에 대한 논문이 150여 편인데 비해, 동풍신을 다룬 논문은 한 편도 없다. 관심이 너무 없다. 전남 광주 장날에 만세 운동을 하다가 태극기를 든 왼손이 잘리고 오른쪽 눈을 실명당한 '남도의 유관순' 윤형숙 열사도 기억했으면 좋겠다.

67세의 나이로 천안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의 '주동자' 중 한 명으로 참가, 현장에서 아들 김구응 의사와 함께 순국한 최정철 의사도 있다(관련 기사: 아우내장터 만세운동 '숨은 주모자' 김구응 의사). 부산의 김반수 지사도 일신여학교 재학 당시 부산에서의 3.1만세운동을 주도했다. 그밖에 광주 수피아여학교, 목포 정명여학교, 전주의 기전여학교 등에 재학 중인 여학생들이 만세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황마리아 애국지사
 황마리아 애국지사
ⓒ 이윤옥

관련사진보기


- 여성들의 독립운동사는 지금껏 주목받지 못했다. 어떻게 관심을 갖게 되셨나?
"전공이 일본어라서 2000년에 일본 와세다 대학에 객원 연구원으로 가 있었다. 그때 김마리아, 황에스더 같이 2.8 독립선언에 참여한 여성들의 자료를 보게 됐다. 그때부터 여성독립운동가들의 삶에 관심이 생겼는데, 정작 유관순 열사에만 초점을 뒀을 뿐, 여성 독립운동가를 다룬 책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직접 썼다. 2011년부터 <서간도에 들꽃피다>라는 책을 써서 지금까지 시리즈로 8권 출간했다. 매편마다 그들의 삶에 대해 소개하고, 한 명 한 명에 관한 시를 썼다. 한 편당 20명이니까 지금까지 160명을 소개한 거다."

- 여성 독립운동가를 '조력자' 정도로 여기는 분위기도 있다.
"군대 안에서 일하는 사람은 모두 군인 아닌가? 군대에서 밥을 짓고 군복을 만들어 입히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쌀을 사다가 밥을 하는 게 아니라 벼를 빻아서 밥을 짓는 거다. 말도 안 통하는 만주에서 그런 일을 한 사람들은 단순히 조력자라고 볼 수 있을까. 총을 안 들었다고 독립운동을 안 한 게 아니다.

그리고 오광심, 지복영, 신정숙(여성 광복군 1호) 이런 분들은 직접 군대에 자원하신 분들이다. 이렇게 직접 앞장서서 싸우신 분도 계셨다. 임시정부가 기반을 닦는데 필요한 돈도 그렇고 군자금 모집하는 여성들도 상당히 많았다. 하와이 수수밭에서 채찍 맞아가며 번 돈을 임시정부로 보낸 여성들 중엔 황마리아, 전수산 등 네 분 정도가 서훈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이윤옥 소장은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기록하기 위해 하와이까지 가는 걸 마다하지 않았다. 왼쪽은 전하와이에서 만난 전수산 지사의 외손자인 티모시 최 선생. 가운데가 이윤옥 소장. 오른쪽은 하와이이민연구소 이덕희 소장.
 이윤옥 소장은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기록하기 위해 하와이까지 가는 걸 마다하지 않았다. 왼쪽은 전하와이에서 만난 전수산 지사의 외손자인 티모시 최 선생. 가운데가 이윤옥 소장. 오른쪽은 하와이이민연구소 이덕희 소장.
ⓒ 이윤옥

관련사진보기


- 왜 여성독립운동가들은 주목받지 못했을까?
"1961년부터 국가의 보훈 사업이 시작되는데, 그때 일단 유명한 사람들부터 추린 거다. 그런데 90년대가 되기 전까지는 거의 주목을 못 받았다. '유관순'· '김마리아'·'남자현' 정도만 독립운동가로 인정돼 서훈을 받았다. 30년 동안 남성 위주로 보훈 정책이 이뤄졌다는 이야기다.

예를 들면 오희옥 지사의 아버지인 광복군 장군 오광선 지사는 1962년에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았지만, 그의 언니인 오희영 지사와 어머니 정현숙 지사 그리고 오희옥 지사는 90년대에 서훈을 받았다. 결국 국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아 서훈을 받은 1만5000여 명 (1만 4830명) 중 여성은 296명에 불과하다. 국가가 30년 동안 여성 독립운동가 발굴을 열심히 안 한 것이다."

"들꽃 같은 여성 독립운동가들, 이젠 알려졌으면"

- 여성 독립운동가를 알리는 데 어려움은 없나.
"출판사를 직접 만들고, 자비를 써서 책을 내고 있다. 인기가 없을 것 같아서인지 책을 내주는 곳이 없다. 지금까지 8권을 냈는데 한 권당 500만 원씩 든 것 같다. 독립운동가의 흔적을 찾거나 후손을 만나러 만주나 하와이까지 찾아가기도 한다. 시간과 돈을 많이 쓰며 10년 이상 매달리고 있어서 힘들 때도 많지만,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알려지지 않았으니 내가 해야한다'는 마음을 갖고 계속 하고 있다. 우리 세대가 안 해놓으면 나중에는 자료가 더 없다."

<서간도에 들꽃피다> 1~8권
 <서간도에 들꽃피다> 1~8권
ⓒ 이윤옥

관련사진보기


- 오히려 일본에서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해 관심이 많다고 들었다.
"일본의 양심 있는 시민들이 '식민지 지배를 반성하자'며 내 책을 읽고 공부를 했다. 이들이 후원을 해서 운영하는 일본 고려박물관에서 강의를 했는데 170명이 모였다. 여성 독립운동가가 나라를 위해 목숨 바쳐 싸웠다는 것에 일본인들이 많은 충격을 받더라. 이곳에서 여성 독립운동가의 삶에 대해 쓴 나의 시에 그림을 넣은 '시화'를 두 달간 전시하기도 했다. 심지어 10명 정도의 일본인은 한국까지 찾아와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내 강의를 듣고, 서대문형무소를 방문한 일도 있었다."

- 우리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교육에선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홀대받고 있다. 이를테면 초등 6학년 1학기 '나라를 되찾기 위한 노력' 단원에 등장하는 30여 명의 독립운동가 중 여성은 유관순이 유일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20년째 학기 초에 강의실에서 백지를 나눠주고 여성 독립운동가와 남성 독립운동가를 아는 대로 쓰라고 한다. 그런데 20년 동안 여성은 유관순 한 명만 나오고 남성은 적어도 10명은 쓴다. 이게 현실이다. 지금껏 가르치지 않아서 그렇다. 우리가 많이 알려야 한다. 여성독립 운동가를 알릴 수 있도록 어린 아이들 눈높이에 맞는 강연을 많이 개설하고, 자료를 많이 만들어야 한다."

- 앞으로의 계획은?
"내년 삼일절 100주년을 맞아서 <서간도에 들꽃 피다> 책 2권을 더 내서 그때까지 총 200명의 여성 독립운동가를 세상에 소개하는 것이 목표다. 또 이들의 삶을 담은 시화를 박물관 등에 전시해서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주목받게 하고 싶다. 이건 내 일만이 아니라, 겨례가 함께 해야하는 일이다. 책 이름이 <서간도에 들꽃피다>인 이유는 이분들의 삶이 만주에서 핀 들꽃같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들꽃처럼 드러나진 않았지만 끈질기게 독립운동을 하셨다. 이제라도 이분들의 삶을 밝혀줬으면 한다."


태그:#3.1절, #여성독립운동가, #이윤옥
댓글6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