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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후 귀국하여, 인천공항 수하물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 내 짐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젊은 여성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본인의 캐리어를 컨베이어 벨트에서 땅으로 내려놓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힘을 제대로 쓰지도 않고, 제 것이라고 찜이라도 하듯 슬쩍 캐리어를 건들며 "어, 어" 하는 감탄사만 내뱉고 있는 그녀.

피로에 지쳐 있었기 때문일까. 나는 그녀의 태도가 조금 짜증스러웠다. 그녀가 벽돌을 수집하는 특별한 취미가 없다면, 무엇보다 항공사의 규정을 지켰다면, 그 가방은 기껏해야 20kg 남짓일 것이다. 컨베이어 벨트에서 바닥으로 내려놓는 약 5초의 시간. 별다른 문제가 없다면 여성이라 해도, 젊음으로 그 정도쯤은 거뜬히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못할 수도 있다. 그녀는 충분히 독립적이고, 어디서도 자기 주장을 당당하게 펼칠 수 있으나, 유독 팔의 근력이 부족하여 그 가방을 못 들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녀는 당당하게(그리고 공손하게) 부탁할 줄도 알아야 한다. 그저 발을 동동 구르며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이 연약한 여인을 도와줍소 하는 몸짓을 사방팔방에 연출할 것이 아니라.

돌아보면, 그녀는 나이기도 했다. 요즘 부쩍, 어디에서도 내가 보인다. '미투 열풍' 속에서, 그 덕분에 자신의 일들을 이제와 털어놓는 친구들 속에서도, 내가 보인다. 긍정·부정적 요소들을 따질 것도 없다. 불쑥불쑥 눈앞에 또 다른 내가 튀어나온다. 감히, 9명의 명사들을 이야기하는 <죽은 숙녀들의 사회>를 보면서도 그랬다.

<죽은 숙녀들의 사회> 책표지
 <죽은 숙녀들의 사회> 책표지
ⓒ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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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인 제사 크리스핀은 실행 의지는 애초에 없었고 찰나의 기분이었을지언정, 자살충동을 느낄 만큼의 절망적인 상태에 도달했을 때 여행을 결심한다.

"파괴되어야 할 건 살아 있는 내 육체가 아니라 내가 그 육체로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p13)
"분명한 건 하나, 내게는 살 이유와 계획이 필요하고 그게 내 안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뿐이었다. 새로이 안정적인 삶을 찾아나서든 상황을 담담히 받아들이든, 둘 다 남이 대신 해줄 수는 없는 일이니까." (p11)


그녀가 여행의 벗으로 삼은 건 죽은 사람들이다. 그녀를 지켜줬던 작가들과 화가들, 작곡가들의 발자취를 찾아 나선다. 크게 보아 인문학 에세이라고 불릴 이 책은, 그녀만이 쓸 수 있는 인물 평전이자 여행 에세이며, 책에 관한 이야기이고, 삶을 향한 투쟁기이기도 하다.

첫 타자는 윌리엄 제임스. 도망치듯 거주지를 옮기고 마흔 아홉 살까지 첫 책을 출판하지 못한 채 동생에게 절망적 편지를 보내며 살았지만, 그 모든 세월을 딛고 미국 심리학의 아버지이자 19세기의 가장 뛰어난 철학자 중 한명으로 우뚝 선 사람. 그는 "내가 처음 자유의지로 행한 건 자유의지를 믿는 것이었다."(p48)는 말을 남겼다.

그의 업적도, 말도 퍽 근사하지만, 이 책이 위인들의 성공신화를 늘어놓음으로써 어쭙잖은 희망을 불어넣으려는 걸까 불안해지려는 찰나, 나의 예상은 완벽하게 부서진다. 그녀가 찾아 나선 죽은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이렇다.

위대한 작가 제임스 조이스가 아니라 그의 아내 노라 바너클을 마주한다. "행복한 주정뱅이"(p75)였던 남편을 견디며 묵묵히 살아온 대가로, 지금껏 "문맹, 재미없는 사람, 잡년으로만 그려진"(p56) 그녀.

리처드 버턴처럼 살길 소망했으나 "고작 여자라서"(p77) 리처드 버턴의 아내로 만족해야 했던 이자벨 버턴도 있다.

저자는 전통적인 아내상을 수행하는 어머니와 친구들을 보며 '아내의 삶'을 경멸했음을 말하는 동시에, 그런 그녀조차 "새로운 남자를 만날 때마다 그가 데려다줄 멋진 신세계를 함께 여행하는 정교한 환상"(p83)에 빠지곤 함을 고백하기도 한다.

유고슬라비아 여행기에서 그곳의 역사와 문화를 알린 리베카 웨스트를 말할 때, 저자는 가차없다. 저자는 웨스트의 글에 대해 자기 확신을 덜어냈어야 했다고 말하고, 특정집단을 악으로 규정하는 태도에 반발한다. 어린 시절엔 웨스트를 역할모델로 삼았지만, 이젠 "가끔은 욕조에 처넣어 익사시키고 싶을 때도 있"(p117)다고 할 정도로 혹평한다.

그러면서도 저자는 놓치지 않았다. 웨스트가 여자에게 허락되지 않은 야망을 가졌다는 이유로 비판받았음을. 단지, 어머니로서의 약점으로 인해 비난받았음을. 아버지의 부재는 문제되지 않아도, "어머니는 딱 두발자국만 앞서 걸어도 자식을 버린 이기적인 년"(p127)이 되고 만다는 것을.

저자는 웨스트의 글이 완벽하진 않을지언정, 분명 가치 있음을 말한다. 전쟁을 말하는 웨스트의 글엔 여자가 등장한다. 울부짖으며 이름도 없는 "전쟁 후유증의 훌륭한 의인화"(p134)로서의 여자가 아닌, "이름이 있고, 생각과 인생과 욕망이 있"는 여자들. 웨스트의 글로 저자 크리스핀은 깨달음을 얻고, 크리스핀의 글을 읽는 나 역시 함께 흥분을 느낀다.

"삶을 버티는 것이야말로 영웅적 행위다." (p135)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계속 걷는 거다." (p139)


그 외에도, 지금까지 영향력을 발휘하는 문예지를 창간한 마거릿 앤더슨, 영국인이었으나 아일랜드의 독립을 위해 분투한 모드 곤, 전쟁 때문에 삶의 제약에 갇혔으나 오히려 더욱 창대해진 작곡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인간의 관계에 천착하며 걸작들을 써 낸 서머싯 몸, 훌륭한 문학작품들을 탄생시켰으나 타인에게 의존적이었다고 평가되는 진 리스, 나치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인 사진가이자 작가 클로드 카엉, 총 9명의 죽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물론, 그들을 마냥 추앙하지도, 일방적으로 깎아내리지도 않는다. 그들의 성공과 실패가 아닌, 뜨거웠던 삶의 이면을 들여다본다. 기록되는 자였던, 기록하는 자였던 간에 그들의 삶을 존중하며, 연민한다. 때로 그들을 향한 분노를 여과 없이 드러내다가 그녀가 스스로를 마주할 때, 나 역시 나를 만나야 했다.

오독일까. 나는 언뜻 상반되게 들리는 두 가지를 읽어냈다. 독립과 연대. 사회의 적폐를 도려내기 위해 용기 낸 이들을 열렬히 응원하면서도, 동시에 익숙한 기존 질서에 안온하게 기대고 싶은 나를 발견하며 소스라치게 놀라는 요즘이다.

나는 수시로 나를 미워한다. 그러나 시대를 살아가는 방법은, 그 형태는 각기 다를 것이다. 우리는 홀로 일어서되, 서로를 마음 속 깊이 응원하는 것으로 연대해야 할 것이다.

"내게 중요한 건, 고통이 아니라 그 고통에 대처하는 방법이다. 고통은 우리를 흔들고, 깨뜨려 활짝 열리게 하고 서로와 접촉하도록 만든다."(p264)


캐리어를 내리지 못해 전전긍긍하던 그녀는, 친절한 남자분의 도움을 받아 유유히 공항을 빠져나갔다. 비슷한 일이 또 있다면, 내가 나서서 그녀를 도와야겠다. 그녀보다 작은 나여도, 나에게는 그녀를 도울 힘이 있으니. 무엇보다 우리의 힘이 합쳐지면, 더 큰 힘을 낼 것이 분명하므로.


죽은 숙녀들의 사회 - 유럽에서 만난 예술가들

제사 크리스핀 지음, 박다솜 옮김, 창비(2018)


태그:#죽은 숙녀들의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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