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이에 맞지 않게' 걸그룹을 참 좋아한다. 특별히 웃을 일도 신나는 일도 없는 지루한 일상에서 걸그룹은 무료한 삶에 웃음을 짓게 하는 몇 안 되는 위안거리다. 그렇다고 나는 특정 걸그룹만 집중적으로 좋아하는 우를 범하지도 않는다. 특정 걸그룹만 좋아하다 보면 다른 아리따운 팀들의 등장과 활동을 놓치게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몇 년 전에는 에이핑크에 빠져 AOA나 걸스데이처럼 다른 매력을 가진 걸그룹의 초반 활동을 놓치는 시행착오(?)를 겪기도 했다.

하지만 걸그룹에 대한 나의 팬심은 지극히 은밀하고(?) 개인적이다. 음악방송이나 직캠 영상, 출연하는 예능, 그들의 인터넷 개인방송 등은 열심히 챙겨보지만 공개방송이나 행사, 사인회 현장 등을 찾아가서 그들을 직접 만나려고 노력하진 않는다. 가장 아끼는 걸그룹 러블리즈가 작년과 올해에 걸쳐 세 번이나 단독 콘서트를 했는데도 한 번도 가지 않았다(대신 2017년 여름 콘서트 실황 DVD는 발매 소식이 나오자마자 예약 구매했다).

이는 어느덧 불혹을 넘긴 적지 않은 나이 때문이기도 하고 9년 전 큰 사고를 당한 이후 예전처럼 활동적인 일을 하기엔 물리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된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 하지만 오프라인 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큰 불만은 없다. 나는 이미 혈기왕성하던 20대 초반 시절 모 가수의 팬클럽 회장으로 활동하며 남부럽지 않게 '팬질'을 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콘서트 한 번 가보려다가 팬클럽 회장까지 된 철없는 재수생

 리아는 데뷔앨범에 매달 콘서트 일정을 공지하며 '라이브형
 가수'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냈다.

리아는 데뷔앨범에 매달 콘서트 일정을 공지하며 '라이브형 가수'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냈다. ⓒ 양형석


때는 지금으로부터 21년 전인 1997년 3월, 당시 나는 수능성적과 대입결과에 만족하지 못하고 재수를 선택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재수생들이 그렇듯 3월에는 긴장의 끈이 풀어지게 마련이고 나 역시 꽤 여유 있게 재수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라디오에서 어느 신인가수의 음악을 듣게 됐다. 신나는 록 사운드에 시원시원한 가창력을 가진 그 가수의 목소리에 매료돼 부족한 용돈을 털어 테이프를 구입했다. 내 최종학력을 바꾼 가수 리아와의 위험한(?) 첫 만남이었다.

< Diary >라는 제목의 앨범을 뜯어보니 앨범을 잘 샀다는 확신이 더욱 강하게 들었다. 학창 시절 가장 좋아하는 밴드였던 N.EX.T의 베이시스트 김영석이 앨범을 프로듀싱했고 리아가 모든 곡의 가사를 직접 썼다. 무엇보다 나를 충격에 빠트린 것은 앨범 속지에 들어 있던 콘서트 일정이었다. 아직 인기가 검증되지도 않은 신인가수가 겁도 없이 매달 단독 콘서트를 하겠다는 계획을 앨범에 넣은 것이다. 재킷 사진으로 쓴 리아의 삭발머리보다 더 큰 파격이었다.

여러 번 앨범을 돌려 들으며 콘서트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더욱 간절해진 나는 PC통신 하이텔에서 리아 팬클럽을 검색했다. 다행히 '유토피아'라는 이름의 리아 팬클럽을 찾았지만 신생 팬클럽인데다 회장(PC통신에서는 '대표시삽'이라고 불렀다)이 고등학생인지라 콘서트 단체 관람 계획이 없었다. 나는 학창시절 학급 간부를 한 경력도 한 번 없었지만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신입회원 주제에 사람들을 모집해 1997년 5월 15명 정도가 참여한 리아 팬클럽의 첫 콘서트 단체 관람이자 첫 정모를 성사시켰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자리에 나가는 일은 여간 쑥스러운 게 아니었지만 모두가 같은 조건이었고 리아를 좋아한다는 공통분모가 있었기에 사람들은 서로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그리고 즐겁게 콘서트를 관람한 후 나는 뒤풀이 자리에서 곧바로 간부로 승진(?)했다. 매달 있을 리아의 콘서트를 주관하는 '콘서트지기'라는 자리였다. 사실 재수생 신분으로는 맡을 수 없는 중책이었지만 당시 나는 처음 쓰는 '감투'에 눈이 멀어 덜컥 콘서트지기를 맡아 버렸다.

6월 30여 명이 참석한 두 번째 정모를 성공적으로 끝낸 뒤, 고등학생이었던 팬클럽 회장은 학업에 부담을 느껴 내심 회장직을 나에게 물려주고 싶어 했다. 누가 봐도 나는 팬클럽 내에서 가장 열심히 활동하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1학년 회장이 학업 때문에 수능이 200일도 남지 않은 재수생에게 회장직을 넘기려 하다니. 지금 생각하면 어불성설이다. 그러나 나는 그 위험한 '떡밥'을 물고 말았다.

사실 팬클럽 활동은 대학에 간 후에 다시 시작해도 된다. 실제로 첫 정모에 참석했던 한 재수생(지금은 내 절친한 친구다)은 당시 공부에 전념하기 위해 한시적으로 활동을 중단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엔 내가 회장을 맡지 않으면 하이텔 안에서 리아 팬클럽이 사라져 버릴 것 같다는 왠지 모를 위기감(?)이 있었다. 그렇게 나는 초대 회장의 제안을 받고 나름대로 투표과정(물론 요식행위였다)까지 거쳐 1997년 7월 하이텔 리아 팬클럽의 제2대 회장으로 취임(?)했다.

그 시절 나에겐 팬클럽 활동이 공부보다 훨씬 중요했다

 그 시절의 나는 공부 말고 다른 쪽으로 매우 적극적이고 활동적인 재수생이었다. 왼쪽은 그 시절의 나, 오른쪽은 가수 리아의 모습이다.

그 시절의 나는 공부 말고 다른 쪽으로 매우 적극적이고 활동적인 재수생이었다. 왼쪽은 그 시절의 나, 오른쪽은 가수 리아의 모습이다. ⓒ 양형석


내가 회장을 맡을 당시 팬클럽의 회원수는 약 400명이었다. 공연을 할 때마다 수 천 명의 팬들을 집결시키는 H.O.T.나 젝스키스 같은 인기가수들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규모였지만 인원이 적은 만큼 단합이 잘되고 친목도 돈독했다. 물론 처음 회장이 됐을 때만 해도 팬클럽 활동보다는 공부에 더 큰 비중을 두면서 수능 전까지는 그냥 명맥만 유지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회장이 된 후 첫 콘서트를 앞두고 리아가 성대결절에 걸리면서 콘서트가 취소되는 변수가 발생하고 말았다.

문제는 성대결절 때문에 제대로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상황에서도 리아는 이미 잡혀 있는 스케줄을 소화해야 했다는 점이다. 이는 리아 팬클럽 회장으로서 결코 가만히 두고 볼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사람들을 최대한 모아 리아가 서는 무대마다 열심히 응원을 다녔다. 당연히 공부는 뒷전이 될 수밖에 없었지만 당시엔 내 공부 따위보다는 '우리 가수'가 힘을 내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리고 나우누리 등 타 통신사의 리아 팬클럽과 교류하면서 자연스럽게 규모를 키워 나갔다.

성대결절이 많이 회복된 리아는 1997년 10월 대학로 소극장 무대를 떠나 경희대 야외무대에서 꽤 큰 규모의 콘서트를 개최했고 소속사에서는 팬클럽 회원들에게 50% 할인이라는 파격적인 대우를 해줬다. 나는 수능을 한 달 남긴 시점에 열린 리아의 대형(?) 콘서트 성공 개최를 위해 팬클럽 회원들에게 단체 메일을 돌려가며 열심히 구인광고(?)를 했다. 그 결과 평소의 2~3배에 달하는 70명의 인원이 모이는 쾌거를 달성하며 4대 PC통신 리아 팬클럽 중 최다인원을 모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1997년 11월에 열린 1998년도 수능시험은 1년 전에 비해 난이도가 매우 낮아졌고 나는 공부를 거의 하지 못했음에도 전년대비 30점이 올랐다(물론 열심히 공부한 친구들은 대부분 50~60점 이상 높게 나왔다). 그리고 나는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학교에 간신히 예비합격이 됐다. 물론 기대치가 한층 높았던 고3시절에 비하면 만족스런 학교는 아니었지만 재수생 생활을 어떻게 보냈는지 알고 있었기에 삼수생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했다.

대학생이 된 나는 좀 더 '본격적으로' 팬클럽 생활에 몰두했다. 매달 '이달의 회원'과 '이달의 신입회원'을 선정해 선물을 줬고 개인적으로는 팬클럽에서 만난 여성회원과 연애도 했봤다(물론 빛보다 빠른 속도로 헤어졌지만). 1998년 2월에는 나우누리 리아 팬클럽과 합동 MT를 가기도 했고 3월에는 4대 팬클럽의 통합 창단식도 개최했다. 나는 그런 행사가 있을 때마다 하이텔 회장이라는 이유로 언제나 전면에 나서야 했고 학교 생활은 적응도 하기 전에 소홀해 질 수밖에 없었다.

소중한 추억과 많은 지인들을 남긴 리아 팬클럽 활동

 비록 리아 팬클럽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21년 전 저 사진에 등장한 사람들 중 상당수는 여전히 연락을 하며 지낸다.

비록 리아 팬클럽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21년 전 저 사진에 등장한 사람들 중 상당수는 여전히 연락을 하며 지낸다. ⓒ 양형석


처음엔 마냥 리아 콘서트에 가고 싶어서 가입했지만 언젠가부터는 리아보다 이 모임 자체가 나에게 더욱 소중한 존재가 됐다. 그래서 1998년 가을 리아가 3집 타이틀곡 '눈물'로 첫 음악방송 1위를 차지했을 때도, 1999년 봄 매니저 폭행 스캔들로 <연예가중계>가 아닌 < 9시 뉴스>에 등장했을 때도 큰 감동이나 충격을 받지 않았다. 심지어 1999년 12월 리아가 4집 발매 기념으로 정동에서 콘서트를 했을 때는 몇몇 회원들과 함께 콘서트 진행 요원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나는 새천년을 보름 앞두고 군에 입대했는데 딱히 후임 회장을 뽑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어차피 후임 회장을 뽑아 봤자 나만큼 열심히 할 사람도 없을 뿐더러 굳이 회장이 없어도 알아서 잘 활동할 만큼 모임이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새천년과 함께 불어 닥칠 인터넷 열풍을 미처 계산하지 못했다. 2002년 햇수로 4년의 군생활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PC통신을 하는 사람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리아 역시 2000년 4.5집 이후 활동을 중단한 상태였다.

나는 전역 후 (열심히 다니지도 않았던) 학교를 자퇴하고 가업을 잇기 위해 곧바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만약 리아 팬클럽에 가입하지 않고 여느 재수생처럼 한 눈 팔지 않고 공부에만 매진했다면, 혹은 어렵게 98학번이 됐을 때라도 학교 생활에 충실했다면 지금 내 인생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재미 있는 가정이지만 큰 의미를 두진 않는다. 나는 그 시절의 팬클럽 활동을 통해 20년 넘게 연락하고 있는 소중한 지인들이 많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 시절 내가 그렇게 좋아하던 리아는 현재 서울 연신내의 실용음악학원 원장님으로 변신했다. 예전처럼 활발하게 활동하진 않지만 지난 1월에는 아침드라마 <역류>의 OST에도 참여하며 가수 활동도 계속 이어가고 있다. 나 역시 이제 리아보다 러블리즈와 여자친구, 레드벨벳을 훨씬 더 좋아하는 '심촌팬 아재'가 됐다. 하지만 그 시절 누구보다 뜨거운 열정으로 한 가수를 좋아하며 '팬질'을 했던 기억이 있기에 내 지난 시간들은 내 인생 최고의 추억으로 남아있다.

덧붙이는 글 '덕질 때문에 OO까지 해봤다' 응모글입니다.
리아 팬클럽 유토피아 덕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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