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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이 2019년이니 3·1운동 100주년이 된다. 각계에서는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일본 제국주의의 잔혹한 무단통치에 저항하며 조선의 독립을 외쳤던 3·1운동은 을사늑약에 의한 한일합방이 조선인 스스로 원해서 한 것이라는 일본의 주장을 완벽하게 뒤엎는 일대 쾌거였다.

이로써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가 세계 만방에 알려졌으며 일제는 비록 허울뿐일지라도 문화통치로의 전환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때려서 복종시킬 수 있는 민족이 아니라는 각성을 준 것.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일어난 이 식민지 민중의 저항운동은 중국을 자극해 5·4운동의 직접적 기폭제가 되었으며 인도의 비폭력·무저항운동, 베트남, 필리핀, 이집트의 민족운동에까지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한마디로 세계사적인 사건이었던 셈. 촛불혁명의 원조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이렇게 엄청난 대사건은 과연 어떻게 일어난 것일까?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장터에서 태극기 나눠 주고 누군가 "만세!" 한 번 부르면 모든 민중들이 기다리고나 있던 것처럼 지시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만세를 따라 불렀을까? 일제는 이 만세운동을 식민지 경영에 대한 중대한 도전으로 판단, 엄청난 무력을 동원해 진압하려 했다.

"당시 조선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는 "추호의 가차도 없이 엄중 처단한다" 하며 시위대를 향해 발포 명령을 내렸고 4월 들어서는 경고없이 실탄 사격을 하도록 지침을 시달했다. 이로 인해 전국에서 살육과 고문, 방화 등 야만적인 탄압이 이뤄졌다. 조선에 주둔한 정규군 2개 사단 2만 3,000여 명에 더해 4월에는 일본에서 헌병과 보병부대까지 증파됐다.

3월 10일에는 평남 맹산읍 시위 군중 50여 명을 죽이고, 4월 15일에는 수원 제암리에서 마을 주민 30여 명을 교회에 가둔 채 불을 질러 타 죽게 했다. 화성군 송산면에서는 마을 전체를 불태우고 주민들을 학살했다. 천안 아우내(竝川, 병천)에서는 유관순(柳寬順)이 장터에서 태극기를 나눠 주다 체포돼 악랄한 고문 끝에 옥사했다.

5월 말까지 한국인은 7,500명이 피살되고, 4만 6,000명이 체포됐으며, 1만 6,000여 명이 부상당했다. 또 교회 47곳과 학교 2곳, 민가 715호가 불탔다. 당초 비폭력, 무저항을 표방한 만세 시위는 3월 말 이후 점차 폭력화 양상을 띠면서, 전차 공격, 헌병 주재소 습격, 관공서 방화 등이 일어났다." - 이근호 저 <한국사를 움직인 100대 사건> 발췌.


한 마디로 일제는 만세를 부르면 전부 죽이겠다는 생각이었던 것. 이미 그 전부터 자신들의 명령에 불복종하는 조선인에 대해 무자비한 탄압으로 일관했으니 이른바 무단통치다. 이런 감시와 억압을 뚫고 태극기를 만들고 나눠주며 시위를 주도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목숨을 건 용기와 그에 맞는 조직이 필요한 일이다.

별다른 준비없이 누군가 장터에서 만세 한 번 부른다 해서 성사될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교통과 통신이 발달된 지금도 전국 동시다발 집회 한 번 하려고 하면 얼마나 많은 준비와 노력이 필요한지를 보면 잘 알 수 있는 일이다. 도대체 그 일을 누가 했을까.

개인적으로 그 주체가 바로 동학(천도교)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3·1운동과 같은 전국적, 거족적 시위는 장기적 목표를 세우고 꾸준히 준비해야만 가능한 일. 동학의 3대 교주 손병희 선생은, 10년 안에 빼앗긴 나라를 반드시 되찾겠다는 굳은 의지를 갖고 삼각산 기슭에 봉황각을 지었다. 그리고 바로 이곳에서 1912년 4월 15일부터 지방교역자 21명을 선발, 지명하여 수련을 시키기 시작했는데 1914년 4월까지 3년에 걸쳐 483명을 수련시켰다.

손병희 자신도 1912년부터 7년 동안 이곳에 살면서 천도교의 발전책과 구국운동을 구상했는데 3·1운동 역시 마찬가지. 바로 이곳을 거쳐간 간부들이 전국 방방곡곡으로 들어가 주도적 구실을 했기에 3·1운동이 있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당시 전국 인구 2천만 명 중 10%에 달하는 200만의 교도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으리라. 봉황각은 이렇듯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기념비적 저항운동, 3·1운동의 산실이다.

그 봉황각이 아직 삼각산 기슭에 의연한 그 모습 그대로 굳건히 서 있다. 북한산 국립공원 우이분소 바로 옆에 있으니 산행길에 한 번쯤 둘러 본다면 여러모로 의미 있지 않을까. 올 해 서대문 형무소에서 있었던 3·1운동 기념식도 내년 100주년에는 봉황각에서 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천도교(동학)에서는 이미 봉황각이 3·1운동의 발상지임을 밝히고 있다.
▲ 봉황각 입구 천도교(동학)에서는 이미 봉황각이 3·1운동의 발상지임을 밝히고 있다.
ⓒ 이양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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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을 봉황각으로 오해하시는 분들도 있다. 이 건물은 옛 천도교 중앙총부 건물로 원래 종로 경운동에 있던 것. 1969년 수운회관을 짓게 되자 이곳으로 옮겨 온 것이다. 지금은 봉황각 별관으로 쓰고 있다고.
▲ 옛 천도교 중앙총부 건물 이곳을 봉황각으로 오해하시는 분들도 있다. 이 건물은 옛 천도교 중앙총부 건물로 원래 종로 경운동에 있던 것. 1969년 수운회관을 짓게 되자 이곳으로 옮겨 온 것이다. 지금은 봉황각 별관으로 쓰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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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에 지어 졌다하니 근대 건축물이다. 시대를 밝히듯 빨간 벽돌이 인상적이다.
▲ 옛 천도교 중앙총부 건물 1921년에 지어 졌다하니 근대 건축물이다. 시대를 밝히듯 빨간 벽돌이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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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삼각산 백운대를 뒤로 하고 서 있는 봉황각. 당시에는 아마도 첩첩산중이었을 것이다. 독립의지를 교육하는 곳이었으니 감시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산중에 짓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 봉황각 멀리 삼각산 백운대를 뒤로 하고 서 있는 봉황각. 당시에는 아마도 첩첩산중이었을 것이다. 독립의지를 교육하는 곳이었으니 감시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산중에 짓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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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평 28평, 2층 목조 기와집.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호. 의창수도원(義彰修道院)이라고도 한다. 현재 걸려 있는 현판은 오세창(吳世昌)이 썼는데 단 한 번에, ‘봉(鳳)’자는 당나라 명필 안진경(顔眞卿)의 서체로 썼는데 두 획으로 썼다고 한다, ‘황(凰)’자 또한 당나라 명필 회소(懷素)의 서체를, ‘각(閣)’자는 송나라 명필 미불(米?)의 서체를 본뜬 것이다.
▲ 봉황각 건평 28평, 2층 목조 기와집.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호. 의창수도원(義彰修道院)이라고도 한다. 현재 걸려 있는 현판은 오세창(吳世昌)이 썼는데 단 한 번에, ‘봉(鳳)’자는 당나라 명필 안진경(顔眞卿)의 서체로 썼는데 두 획으로 썼다고 한다, ‘황(凰)’자 또한 당나라 명필 회소(懷素)의 서체를, ‘각(閣)’자는 송나라 명필 미불(米?)의 서체를 본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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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3·1운동, #봉황각, #손병희, #동학, #천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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