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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8.03.26 15:57수정 2018.03.30 15:18
엄마가 세상을 떠났다. 초등학교 2학년 때다.
집 담벼락에 늘어선 조화 행렬을 친구들에게 자랑했다. 몇 개나 되는지 세어보라며 으쓱했다. 엄마는 장학사였다. 엄마가 학교에 나타나면 선생님들이 부산을 떨었다. 엄마는 권력이었고, 나는 가장 가까운 측근이었다. 그 짜릿한 기억을 2년도 누리지 못했다. 그뿐이었다.


나는 줄곧 눈치 잘 보는 아이로 컸다. 오죽하면 별명이 '됐어요'였다. "괜찮다"는 말을 하도 입에 달고 살아서다. 남들이 다 좋아하는 음식은 가급적 손대지 않았다. 밥을 안 먹었어도 먹었다고 했다. 좋게 말하면 남에게 민폐 끼치는 것을 싫어했다고 할 수 있지만, 실은 미움 받는 것이 두려웠다. 어떻게 해야 남의 눈 밖에 나지 않을까, 무엇을 해야 마음에 들지, 늘 생각했다. 마음 읽기로서의 눈치 보기를 대학 졸업 때까지 훈련했다. 아니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30년 가까이 산 아내가 당신은 '됐어요' 밖에 모르느냐며 속 모르는 소리를 한다.

눈치 보는 사람은 남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한다.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안달한다. 적어도 나쁜 평가는 받지 않겠다는 강박으로 안절부절못한다. 그런 결과로 썩 좋진 않지만 영 나쁘지도 않은 성과를 낸다. 책임감 있다는 소리를 듣는다.

쉰이 넘어 돌아보니 나는 어릴 적부터 '관종'이었다. 엄마의 장례를 자랑질 소재로 활용했다. 엄마를 통해서라도 나를 드러내고 싶은 사람이었다. 지금도 글을 쓸 때 카페를 찾는다. 잔잔한 음악과 두런거림, 이른바 백색소음이 좋아서만은 아니다. 그곳엔 이목이 있다. 눈길을 받을 수 있다. 열심히 글 쓰는 사람의 모습보다 더 아름다운 자태는 없으리라는 믿음으로 쓴다. 누군가 아는 체라도 할라치면 글이 갑자기 잘 써진다.

갈고닦은 눈치는 글쓰기에 결정적 도움이 됐다. 그동안 나의 독자는 한 사람이었다. 사장이나 회장 또는 대통령. 나는 그들에게 빙의가 잘됐다. 쉽게 아바타가 됐다. 그들이 무엇을 원하고 기대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고, 그들의 소리가 들렸다. 글을 쓰다 보면 "됐고,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라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면 서둘러 결론을 썼다. "아니, 다짜고짜 이게 무슨 소립니까. 좀 찬찬히 얘기해보세요" 그러면 자세히 설명했다. 출판사에서 일할 때도 독자가 돼서, 독자의 눈으로 보려고 노력했다. 독자가 궁금해할 것, 독자가 지루해할 대목을 찾았다.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려는 노력은 두 가지 좋은 결과를 낳는다. 먼저, 마감 시간을 어기지 않는다. 어떻게든 써낸다. 글 쓰는 사람에게 반드시 필요한 덕목이다. 다른 하나는 못 썼다는 소리는 안 듣는다. 혹여 그런 소리를 들을까 봐 자료를 찾고 밤을 새우며 안달복달한다. 그런 조바심이 최악은 면하게 해준다. 그렇다고 잘 썼다는 말도 듣기 어렵다. 조마조마 졸이는 마음으로는 잘 쓰기 어렵다.

글 쓰는 사람은 태생이 '관종(관심종자)'이다. 이들은 글을 들고 독자 앞에 나선다. 보여주기 위해 글을 쓴다. '나는 이것을 알고 있고 이렇게 생각하고 느꼈고 깨달았다'고 얘기한다. 자신을 드러낸다. 이것이 나라고 외치는 것이 글쓰기다. 관심받기를 싫어한다면 왜 글을 쓰는가. 정치인과 언론인의 글은 말할 것도 없고, 문인과 과학자, 철학자, 연예인 할 것 없이 글을 쓰는 이유는 관심을 끌기 위해서다. 그렇지 않다고 말하면 비겁하다. 관심 끌기에 성공하지 못할까 봐 스스로 방어선을 치고 참호 안에 머리를 처박는 격이다. 글을 쓰는 이유는 나의 글로써 무엇인가를 움직이고 변화시키고 이루고 이바지하기 위해서다. 적어도 나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투명 인간으로 살기 싫어서다.

독자를 읽고 독자 비위를 맞출 줄 아는 사람이 다름 아닌 작가다. 인기 드라마 작가는 시청자 심리를 읽으려고 노력한다. 시청자 반응을 보며 드라마 결말을 바꾸기도 한다. 연설을 잘하는 사람은 청중 연구에 철저하다. 청중 반응에 따라 준비된 연설 내용을 즉석에서 수정하기도 한다. 문인은 말할 것도 없다. 최인훈의 소설 <광장>,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모두 증쇄 때마다 개작을 거듭했다.

"독자가 누구인지 알면 어떻게 써야 하는지 알 수 있다"


직장 글쓰기 역시 그러하다. 상사에게 관심이 있고 상사를 연구하는 사람이 글을 잘 쓸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내 글의 독자인 상사의 취향과 성향을 정확히 알 수 없다. 상사와 가깝지 않으니 상사가 가진 정보를 공유할 수도 없다. 보고서에 관한 상사의 피드백과 코칭도 친절하게 받지 못한다. 평소 상사에게 자신의 기획이나 아이디어를 표현할 기회가 없으니 상사가 보고서 내용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아무리 글재주가 있고 아이디어가 많아도 좋은 글을 쓸 수 없다.

글쓰기 강의에 가면 자기표현과 의사소통 가운데 어디에 방점을 찍어 써야 하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그러면 나는 프랑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가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말한 '사물의 언어'와 '도구의 언어'를 소개한다. 사물의 언어는 시의 언어다. 시인이 시적 충동에 따라 자기만족을 위해 쓰는 글이다. 목적성이 없는, '사물' 그 자체의 언어인 것이다. 도구의 언어는 산문의 언어다. 언어를 '도구'로 삼아 목적을 갖고 쓴 글이다. 자기만족이 아니라 독자에게 영향을 끼치기 위해 쓰는 것이다.

글은 이 두 가지 모두를 충족해야 하지 않을까. 자기 드러내기와 남과 소통하기. 소설가 김훈은 자기 내면을 드러내기 위해서 쓴다고 했고, 조지 오웰은 정치적 목적을 갖고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 쓴다고 했다. 두 단계로 분리해서 쓰는 게 답이 아닐까 싶다. 1단계에선 자기 생각을 가감 없이 관종이 되어서 쓴다. 다시 말해 자기 생각을 드러낸다. 2단계로 독자의 눈치를 보며 독자에 빙의돼서 독자의 눈으로 고친다.  

독자가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이유는 두 가지다. 무엇보다, 글은 독자가 읽어야 완성되기 때문이다. 독자가 없는 글은 무의미하다. 글은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風磬)과 같다. 바람이 불어야 소리가 난다. 바람은 독자다. 바람 없는 풍경은 고철덩이에 불과하다. 독자는 내 글을 읽는 단순한 대상이 아니라 내 글의 주인이다. 독자가 이해하고, 동의하고, 공감하고, 설득당하고, 감동하는 글이 좋은 글이다. 이것이 글쓰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길이다.

독자가 이정표 역할을 해준다는 게 두 번째 이유다. 영국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는 "독자가 누구인지 알면 어떻게 써야 하는지 알 수 있다"고 했다. 독자가 없으면 그것은 진공 상태에 떠 있는 것과 같다. 중력 부담은 없지만 그런 상태에서는 글쓰기가 막막하다. 벽에 대고 말하는 것과 같다. 독자가 정답을 갖고 있다. 독자를 연구하면 된다. 독자의 마음을 읽으면 막연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

대부분 이것을 소홀히 한다. 독자를 명료하게 떠올리며 글을 쓰지 않는다. 독자가 원하는 것을 읽으려 하지 않는다. 상대를 꼭 집어놓고 쓰지 않으면 글이 공허해진다. 누구에게도 의미 없는, 아무도 자기 얘기라고 생각하지 않는 글이 된다. 일반론으로 흐르거나 추상적인 글이 나온다. 그런 글은 쓰기도 어렵다. 마치 벽에 대고 말하는 것과 같다.

군 시절 신참 때는 관물대를 쳐다보고 앉아 있으라 한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무념무상의 상태다. 얼굴을 벽에 대고 잡념을 떨쳐내는 면벽수도다. 그런 상태에서 글이 잘 써지겠는가. 표정 없는 상대와 얘기하는 것과, 맞장구 잘 쳐주는 사람을 앞에 두고 말하는 것 중에 어느 쪽이 쉬운가.

나는 독자에게 의지해서 쓴다. 독자 머리에 들어가 독자와 대화하며 쓴다.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독자를 정하는 것이다. 구체적인 한 사람이면 된다. 내가 아는 사람으로 주변에서 찾는다. 다음으로 하는 일은 내가 그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나를 내려놓고 내가 그 안으로 들어간다. 끝으로, 확장한다. 내 아들을 마음에 두고 쓴 글의 대상을 모든 젊은이로 확장한다. 그래야 한 사람을 염두에 두고 쓴 글이 그 사람만을 위한 글에 머물지 않는다.

관종의 길을 걸었다, 그래서 쓸 수 있었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30대 직장인을 생각한다. 나와 함께 회사생활 했던 최선희씨를 구체적 독자로 상정했다. 그녀가, 아니 30대 직장인 모두가 글을 쓰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됐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쓴다.

독자를 위한 글은 어떻게 쓰는가. ▲독자가 이해하기 쉽고 정확하게 알게끔 쓴다. ▲내가 아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알고 싶은 것, 내가 하고 싶은 얘기보다 독자가 듣고 싶은 얘기에 집중한다. ▲독자의 반응을 생각하며 쓴다. 내 글에 댓글을 단다면 뭐라 달까. 회사 보고서라면 상사는 첫마디로 뭐라 할까. ▲독자의 반론을 의식하며 쓴다. ▲독자가 내 글에서 무엇인가는 얻어갈 수 있게 쓴다. 독자가 내 글을 읽고 한마디로 무슨 이야기라고 말하도록 할 것인가. 다른 사람에게 내 글 읽기를 권할 때 무슨 이유를 댈 수 있게 해줄 것인가. ▲독자에게 재미와 감동을 줄 수 있다면 바닥까지도 내려가서 쓴다. ▲독자에게 보여주고 독자의 평가와 의견을 반영한다.

독자는 세 가지를 원한다. 재미와 효용과 감동이다. 재미와 효용은 기본이고, 감동은 그 결과이자 덤으로 주어지는 선물이다. 최상의 글은 이 세 가지를 충족해준다. 재미가 필요조건이다. 재미는 누가(Who), 언제(When), 어디서(Where), 무엇을(What)에서 나온다. 대신, 지식이나 설명이 아니라 이야기로 접근해야 한다.

효용은 충분조건이다. 어떻게(How)와 왜(Why)를 통해 얻어갈 거리를 줘야 한다. '어떻게'를 통해 노하우를, '왜'를 통해 깨우침과 지적 포만감을 안겨줘야 한다. 재미가 없으면 읽지 않고, 재미있게 읽었는데 얻어가는 게 없으면 화를 낸다. 재미있게 읽었는데 기대 이상의 소득이 있으면 수지맞았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횡재했다고 느꼈을 때 독자는 감동한다. 

글을 길에 비유해보자. 글의 재미는 먼 길 가는 사람을 지루하지 않게 한다. 그러면 독자는 끝까지 읽을 것이다. 자신이 모르던 사실까지 알려준 글은 길을 모르는 사람에게 길을 가르쳐준 것과 같다. 독자는 감사할 것이다. 다른 관점을 제시해준 글은 좀 더 빨리 갈 수 있는 다른 길을 알려준 것이라 할 수 있다. 독자는 탄복할 것이다. 이런 것이 글의 효용이다. 감동을 주는 글은 지름길일 뿐만 아니라, 교통 정체도 없고 주변 풍광도 좋은 길을 안내해준 격이다. 독자에게 새로운 길이 열린 순간이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이다. 바삐 출근하는 엄마에게 총을 사달라고 졸랐다. 엄마에게 야단맞고 터벅터벅 걸었다. 나는 뒤에서 엄마가 쳐다보고 있다고 확신했다. 어깨를 최대한 내려트리고 힘없이 걸었다. 내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불쌍한 뒷모습이었다. 그때 엄마의 소리가 들렸다. "원국아~" 내 예상대로였다. 엄마는 돈을 손에 쥐어주며 퇴근하고 와서 사주겠다고 했다.
  
관종의 길을 걸었다. 눈치 보며 빙의돼 살았다. 그래서 쓸 수 있었다. 내가 없이 산 세월이 헛되지만은 않았다.
덧붙이는 글 필자 강원국은 청와대 연설비서관을 역임했으며 2014년 <대통령의 글쓰기> <회장님의 글쓰기>를 출간한 이후 글쓰기 관련 강연과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강원국의 글쓰기'는 3월 26일부터 매주 월·수·금 <오마이뉴스>에 연재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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