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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3월, 초등학생 딱지를 떼고 드디어 중학교에 입학했다. 기대도 있고 걱정도 많았다. 걱정이 무엇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기대는 선명하게 기억난다. 그건 교복을 입는다는 사실이었다. 고등학생이 주민등록증을 갖고 싶듯,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빨리 교복을 입고 싶었다. 어른은 아니지만 어린아이도 아니라는 상징 같았다. 설렘을 가득 안고 중학교 1학년 생활을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같은 반 여학생 한 명이 나를 좋아한다고 했다. 당사자를 통해 직접 들은 것은 아니었고, 그 친구와 친한 여학생들이 나에게 소곤대며 귀띔해주었다. 내가 그 친구를 좋아한 건 아니었지만 기분은 좋았다.

우리 반 창문은 등굣길을 향하고 있다. 창가에 서 있으면 언덕길을 올라오는 학생들을 마주 볼 수 있다. 그 오르막길을 걸을 때, 가끔씩 어디선가 내 이름이 들렸다. 나를 좋아했던 아이와 그 친구들이 반갑게 내 이름을 불러 줬다. 쑥스러웠지만 싫지는 않았다.

그 친구의 적극적인 호감 표시가 효과가 있었던 것일까?

그렇게 1학년 생활이 거의 끝나갈 때쯤, 나도 그 친구를 좋아하기 시작했다. "우리 오늘부터 사귀자!"는 말은 없었지만 그렇게 우리는 연애를 시작했다. 정성스럽게 편지도 써서 주고받았다. 그 당시 처음 나온 플립 핸드폰으로 연락도 했다. 쑥스러워서 전화는 못 하고 문자로만 이야기했다.

좋았던 시절도 잠시, 우리는 2학년이 되었고 각각 다른 반을 배정받았다. 그 여자 아이는 점점 나에게 마음을 표현하지 않았고 문자의 답도 주지 않았다. 더 이상 나에게 마음이 없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 헤어지자"는 말도 없었지만 나는 헤어진 것을 알았다. 그렇게 중학생의 어설픈 연애는 끝이 났다.

문제는 내 마음이었다. 나는 아직 마음이 남아있었고, 여전히 그 여자 아이를 좋아했다. 어쩌다가 그 반 앞을 지나갈 일이 있으면 괜히 기분이 좋았다. 나는 부끄러워 쳐다보지도 못하면서 그 친구가 날 발견해주길 바랐다. 체육시간이나 점심을 먹고 운동할 때는, 1학년 때처럼 날 응원해주길 기대했다. 빼빼로 데이에는 편지와 빼빼로를 책상 서랍에 몰래 넣어놓기도 했다. 그러나 그 친구는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다. 아니, 반응이 없는 것이 반응이었다.

답답했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모습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아무런 기대가 없는 상황에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는 마침내 그 친구의 집을 찾아보기로 했다. 어느 일요일, 1학년 때 적어준 주소 쪽지를 들고 대조동 일대를 돌아다녔다. 집을 찾는다고 해도 그 친구를 만날 마음은 없었다. 집을 찾을 용기는 있었지만 만날 용기는 없었다. 그냥 집만 알고 싶었다. 3시간쯤 지났을까? 드디어 그 주소가 적힌 초록색 대문을 발견했다.

그런데 그때, 저쪽에서 그 여자 아이가 이 집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거짓말 같았지만 현실이었다. 나는 너무 놀랐다. 바로 뒤를 돌아서 빠른 걸음으로 도망쳤다. 몸은 얼음처럼 굳었고 마음은 너무 부끄러웠다. 집을 찾기로 결심한 스스로를 자책했다. 그 일이 있은 후, 친구들은 나를 비웃으며 놀렸다. 나는 창피했고, 용기없는 남자가 되었다. 결국 나의 중학생 시절은 그렇게 지나갔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18년이 지난 지금, 나는 이 일을 상대방의 입장에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집을 찾아가는 건 하지 말아야 했던 행동이었다. 집을 찾아갔던 나는, 그 친구가 이 일로 나에게 더 실망할 것만 걱정했다. 생각해보니 여자 아이 입장에서도 굉장히 놀랐을 것 같았다. 무심코 적어준 주소를 가지고 찾아온 나에게 화가 났을 것이고, 무서웠을 거다. 그 친구는 그 뒤로도 내가 또 찾아올까 봐 걱정하며 지냈을지도 모른다. 나에게는 이 여자 아이를 좋아한 게 풋풋한 추억이었지만, 상대방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데이트 폭력과 관련된 뉴스를 종종 듣는다. 그럴 때마다 '어떻게 저렇게 때릴 수가 있지?' '싫다는데 왜 저렇게까지 계속 전화해?'라고 생각했다. 뉴스에 나온 남자들을 향해 혀를 끌끌 찼다. 험악한 현실을 안타까워하면서도 나는 그들과 다르다고 확신했다. 그러다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는 책을 읽게 되었다. 책 중에는 이런 질문이 있다.

"헤어진 남자 친구가 다시 기회를 달라고 학교 앞에서 매일 기다리는 상황은 당신에게 어떻게 다가옵니까?"

순간 중학생 시절의 기억이 소환되었고, 이 추억을 여자 아이 입장에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도 뉴스 속 남자들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 왜 그리도 오래 걸렸을까? 왜 진작 알지 못했을까? 상대가 두려워할 수 있는 행동을 애정이랍시고 저질러 버렸다. 너무 늦었지만 그 여자 아이에게 미안하다.

2018년 3월, 그녀는 나와의 이야기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무서웠거나 황당했던 이야기로 남아 있을 수 있다. 나도 더 이상은 그 추억을 풋풋했다고만 이야기하지 못하겠다. 아름다운 추억 속에도 하지 말았어야 하는 행동은 있었다. 다시 생각해야 하는 추억이 또 있는지 스스로 돌아보게 된다. 부끄러운 하루다.


태그:#여성, #데이트폭력, #우리에겐언어가필요하다, #미투, #페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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