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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사는 임진왜란 당시 대구 의병군이 부인사에, 대구 관군이 동화사에 본부를 차린 곳이다. 사명대사도 영남 승군 본부를 동화사에 차렸다. 동화사에는 사명대사의 초상과 영남의승군본부를 말해주는 현판(영남치영아문)이 지금도 남아 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특히 산남의진군의 우재룡이 동화사를 본부로 팔공산 일대에서 유격전을 펼친 사실을 아는 이는 더욱 없다. 또 1919년 3월 28일 동화사의 청년 승려들이 경내 심검당에 모여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결의한 사실도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심검당 앞 안내판도 그 사실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 팔공산 전경 동화사는 임진왜란 당시 대구 의병군이 부인사에, 대구 관군이 동화사에 본부를 차린 곳이다. 사명대사도 영남 승군 본부를 동화사에 차렸다. 동화사에는 사명대사의 초상과 영남의승군본부를 말해주는 현판(영남치영아문)이 지금도 남아 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특히 산남의진군의 우재룡이 동화사를 본부로 팔공산 일대에서 유격전을 펼친 사실을 아는 이는 더욱 없다. 또 1919년 3월 28일 동화사의 청년 승려들이 경내 심검당에 모여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결의한 사실도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심검당 앞 안내판도 그 사실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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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공산과 동화사는 대구를 대표하는 역사유적 중 한 곳이다. 팔공산은 100곳이 넘는 등산로 입구를 가지고 있고, 특히 동화사는 '문화재의 보고'라 할 만큼 무수한 문화유산들을 품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동화사의 정체성은 별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

동화사에는 임진왜란 승병, 구한말 의병, 일제 강점기 독립만세운동의 민족정기가 서려 있다. 110년 전 3월 23일 장인환, 전명운 두 의사는 미국까지 찾아가 일본의 앞잡이로서 대한제국 외교 고문을 맡았던 스티븐스를 사살했다. 그 기념일을 맞아 대구 독립운동의 성지 중 한 곳인 동화사를 찾아본다.  

동화사는 그냥 절이 아니다

큰 절들은 흔히 심검당(尋劍堂)이라는 현판을 단 집을 대웅전 옆에 거느리고 있다. 심검(尋劍)은 지혜를 찾는(尋) 칼(劍)이다. 대웅전(大雄殿)이 석가모니(大雄)를 모시는 집(殿)이니 승려들이 그 바로 옆에 심검당을 지어놓고서 밤낮으로 지혜를 간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동화사 대웅전 옆에도 심검당이 있다. 동화사의 심검당도 승려들이 지혜를 찾기 위해 머무는 수도 공간이라는 점에서는 여느 절의 그것과 마찬가지이지만, 이곳에는 사뭇 다른 정체성도 깃들어 있다. 동화사 심검당은 독립운동 유적이다. 1919년 3월 28일 동화사 지방학림(學林)의 학생들은 이곳에 모여 만세운동 동참을 결의한다.

1919년 3월 28일 동화사의 청년 승려들이 독립만세운동을 결의한 장소인 심검당 앞을 지나 승려 한 분이 대웅전 쪽으로 가고 있다.
 1919년 3월 28일 동화사의 청년 승려들이 독립만세운동을 결의한 장소인 심검당 앞을 지나 승려 한 분이 대웅전 쪽으로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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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검당의 현판
 심검당의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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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1일 우리 겨레는 3·1운동을 일으켰다. 불교계에서는 중앙학림 학림은 승려 양성 기관으로 요즘은 보통 승가대학이라 부른다. 서울에 있는 학림을 중앙학림이라 불렀는데 뒷날 동국대학교로 발전했고, 그 외 지역별로 존재했던 학림은 지방학림이라 불렀다.

만해 한용운 등 고승들의 항일운동에 자극받은 청년 승려들

중앙학림의 강사였던 만해 한용운, 그리고 백용성 두 스님이 민족대표 33인으로 활약했다. 두 스님의 3·1운동 참여에 자극을 받은 중앙학림 학생들은 독립선언서를 전국 각지에 배포하고, 연고가 닿는 사찰을 찾아다니며 만세 시위를 촉구했다.

대견사
대구시 달성군 유가면 비슬산 대마루능선의 대견사는 신라 흥덕왕(826∼836) 때 창건된 고찰로 전해진다. 절 지을 곳을 물색하고 있던 당나라 문종(826∼840)이 하루는 낯을 씻으려던 중 대야의 물에 매우 아름다운 경관이 뜬 것을 보았다. 문종은 그곳을 찾기 시작했다. 사신은 중국 전역을 배회했지만 찾지 못했고, 마침내 신라의 비슬산까지 왔다. 전설은 그런 과정을 거쳐 대견사가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따라서 대(大)국의 황제가 절경을 보고(見) 나서 지은 절(寺)을 의미하는 대견사(大見寺)라는 이름에는 사대주의적 가치관이 깃들어 있다. 그런가 하면, 대(大)국의 황제가 세수를 하려고 할 때 대야의 물에 절경이 나타나서(見) 절(寺)의 창건이 이루어졌으므로 본래 이름이 대현사(大見寺)였다는 견해도 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조선왕조실록》은 大見寺를 번역하면서 태종 조에는 '대견사', 세종 조에는 '대현사'로 음을 달고 있다.

대견사 터에는 신라 때 축조된 듯한 길이 30m, 높이 6m의 축대가 남아 있다. 무너져 있던 것을 1988년에 복원한 통일신라 시기의 3층석탑(대구 유형문화재 42호, 높이 3.67m)도 있다. 그 외 10여 명이 앉을 수 있는 동굴대좌(洞窟臺座)도 있다. 이 동굴은 참선 또는 염불도량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절은 임진왜란 때 폐사된 것으로 알려진다. 그 후 1611년(광해군 3) 중창되고, 1900년 들어 재차 중건되어 왕실의 사찰로 운영되기도 하지만 1917년 일제에 의해 다시 폐사되는 비운을 맞는다. 그로부터 100년 가까이 지난 2014년 대견사 터에는 새로 적멸보궁, 요사채, 산신각 등이 신축된다. 

대견사에 있던 통일신라 장륙관음석상(丈六觀音石像)이 1416년(태종 16) 2월 29일과 1423년(세종 5) 11월 29일 땀을 흘렸다는 기록이 《태종실록》과 《세종실록》에 실려 있어 흥미를 끈다. 태종 조의 기록은 '경상도 현풍현 대견사의 관음이 땀을 흘렸다.'이고, 세종 조의 기록은 '경상도 현풍현 비슬산 대현사의 석상(石像) 장륙관음에서 땀이 흘렀다.'이다.
당시 동화사 주지는 김남파(金南坡)였다. 김남파는 1917년 '비슬산의 산세와 대견사가 일본의 기운을 꺾는다'면서 조선총독부에 비슬산 대견사의  폐사를 청원하는 등 친일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하지만 동화사 학림의 학생들은 주지의 친일 행각과 정반대로 항일에 앞장섰다.

학생들은 현직 주지가 아니라 임진왜란 당시 동화사에 머물면서 영남 승병들을 지휘했던 사명대사의 웅혼한 기상을 따랐다. 지금도 동화사 봉서루 뒷벽에는 영남(嶺南) 지역 치영 관아(官牙, 관청)의 문(門)을 가리키는 '嶺南緇營牙門(영남치영아문)'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치영(緇營)은 승려의 옷을 치의(緇衣)라 부른 데서 연유한 명칭으로 승군(僧軍) 본부이다.

친일파 주지 배척, 사명대사의 참여정신 계승

달성군 공산면 진인동 출신의 중앙학림 학생 윤학조(尹學祚, 25세)가 3월 23일 대구로 내려와 동화사 학림 학생들의 만세운동에 불을 지폈다. 윤학조는 후배인 권청학·김문옥 등 동화사 학림 학생들을 만나 서울에서 전개되고 있는 불교계의 만세운동을 알리는 한편 대구에서도 궐기할 것을 독려했다.

3월 28일 허선일(許善一, 23세), 권청학(權淸學, 21세), 김종만(金鍾萬, 21세), 이기윤(李起胤, 21세), 김문옥(金文玉, 20세), 김윤섭(金潤燮, 20세), 이보식(李普湜, 20세), 이성근(李成根, 19세), 박창호(朴昌鎬, 19세) 등 동화사 학림 학생들은 심검당에 모여 만세운동 동참을 결의했다.

처음에는 동화사로 들어가는 길목의 공산면 백안동 백안장터에서 궐기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논의 끝에 터가 더 크고 사람들도 더 많은 대구 덕산정시장(남문밖시장, 현 염매시장)에서 만세운동을 펼치기로 바꿨다.

동화사 포교당인 반월당 보현사에서 태극기 제작

덕산정시장 장날인 30일을 하루 앞둔 29일 이들은 반월당 언덕에 있는 동화사 포교당(현재 보현사)에 모였다. 이들은 포교당에서 이튿날 만세운동에 쓸 태극기를 만들었다.

1919년 3월 28일 동화사의 청년 승려들이 독립만세운동을 결의한 동화사 심검당과 그 뒤로 대웅전이 보이는 풍경
 1919년 3월 28일 동화사의 청년 승려들이 독립만세운동을 결의한 동화사 심검당과 그 뒤로 대웅전이 보이는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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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 오후 2시쯤 덕산정시장에는 독립을 외치는 만세 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학림 학생들은 물론 장날을 맞아 시장을 찾은 일반 민중들과 장사를 하는 상인들도 목청껏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짖었다. 태극기는 긴 장대 끝에 달려서도 펄럭이고, 사람들의 손에서도 힘차게 나부꼈다.

일본 경찰이 긴급 출동한 것은 자명한 일이다. 일경은 총칼을 휘둘러 군중을 해산시키는 한편으로 주동자 10여 명을 체포했다. 체포된 윤학조, 허선일, 권청학, 김종만, 이기윤, 김문옥, 김윤섭, 이보식, 이성근, 박창호 등 10명은 모두 10개월의 실형을 언도받고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했다.

영천시 자양면 충효리 일대의 '영천호'를 안고도는 도로변에 세워져 있는 '산남의진' 기념비. 구한말 대구 진위대의 군인이었던 우재룡은 일제에 의해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자 자진하여 산남의진을 찾아가 의병이 된다.
 영천시 자양면 충효리 일대의 '영천호'를 안고도는 도로변에 세워져 있는 '산남의진' 기념비. 구한말 대구 진위대의 군인이었던 우재룡은 일제에 의해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자 자진하여 산남의진을 찾아가 의병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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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사에는 1919년 만세운동만이 아니라 1908년 구한말 의병투쟁의 역사도 서려 있다. 동화사에 본부를 둔 채 약 7개월에 걸쳐 일본군과 유격전을 펼친 의사는 우재룡(禹在龍)으로, 본래 대구 진위대에 5년 동안 재직한 대한제국의 군인이었다. 그는 1907년 일제에 의해 군대가 해산 당하자 스스로 경북 청송 산남의진(山南義陳)을 찾아간다.

대한제국 군인 우재룡, 국가 멸망 위기 맞아 의병 참가

산남의진의 의병장은 정용기(鄭鏞基)였다. 우재룡이 대구 진위대에서 근무하던 당시 정용기는 대구감옥에 수감되어 있었는데, 전국의 애국지사들이 정용기를 감옥에서 빼내기 위해 석방 활동을 하는 것을 보고 우재룡은 감동한 바 있어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했었다. 그 무렵 우재룡의 나이는 24세였다.

1907년 7월 12일 산남의진의 훈련 담장 장교인 연습장(練習將)을 맡고 있던 우재룡은 처음으로 출병했다. 산남의진에 들어온 때가 7월이었으므로 바로 전투에 투입되었던 것이다. 산남의진군은 7월 17일 청하 전투에서는 승리를 거두지만 9월 1일 포항 죽장 입암 전투에서는 정용기 의병장이 전사하는 등 대패한다.

산남의진군이 일본군과 맞서 싸웠으나 의병장 정용기 등이 전사하는 대패를 당하는 죽장 입암서원 주변의 풍경
 산남의진군이 일본군과 맞서 싸웠으나 의병장 정용기 등이 전사하는 대패를 당하는 죽장 입암서원 주변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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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에도 산남의진군은 경북 일원에서 유격 전술로 일본군을 공격하여 많은 전과를 거둔다. 이때 우재룡은 선봉장(先鋒將)의 직책을 맡아 활약한다. 하지만 아들 정용기를 대신하여 의병장을 맡았던 정환직(鄭煥直)이 1907년 12월 7일 영암에서 또 순국하면서 산남의진은 재차 시련에 빠지게 된다. 이후 우재룡은 영천 서부 지역 책임을 맡게 되고, 동화사를 근거지로 팔공산 일대에서 유격전을 펼친다.

산남의진군의 활동은 의병장 최세윤(崔世允)과 선봉장 우재룡이 일본군에 체포되는 1908년 7월 마감된다. '내란죄'로 '종신형' 처분을 받아 복역하던 우재룡은 '합방 특사'로 풀려나지만 이내 대한광복회 활동을 시작한다.

옥에서 풀려난 우재룡, 대한광복회 창설 주도 후 무장투쟁

이 글은 우재룡의 동화사 관련 내용이므로 대한광복회에 대해서는 아래에 간략히 소개한 후 '독립운동 유적 달성공원' 편에 상세히 살펴볼 계획이다. 달성공원은 대한광복회 창설지이자 'ㄱ당' 창설지이고, 허위 선생과 이상정 독립지사의 기념비가 있는 곳이다. 또 우리나라 최초의 시비인 이상화의 '나의 침실로' 시비도 있다. 그만하면 대구를 대표하는 독립운동 관련 답사지로 손꼽아도 충분할 것이다.  

1910년대 국내 무장 독립투쟁을 이끈 대한광복회는 박상진, 채기중, 우재룡 등의 주도하에 1915년 음력 7월 15일 대구 달성공원에서 창립되었다. 그러나 현재 달성공원에는 이 역사적 사실을 기려 세워진 조형물은 물론 해설해주는 안내판도 하나 없다.
 1910년대 국내 무장 독립투쟁을 이끈 대한광복회는 박상진, 채기중, 우재룡 등의 주도하에 1915년 음력 7월 15일 대구 달성공원에서 창립되었다. 그러나 현재 달성공원에는 이 역사적 사실을 기려 세워진 조형물은 물론 해설해주는 안내판도 하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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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광복회
1910년대 국내 무장 투쟁을 선도한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는 1915년 음력 7월 15일 대구 달성공원에서 결성된다. 이날 기존의 영주 풍기 광복단(光復團)과 대구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은 발전적 통합을 이루었다. 총사령 박상진(朴尙鎭), 지휘장 우재룡과 권영만(權寧萬), 재무부장 최준(崔浚), 사무총괄 이복우(李福雨)로 총지휘부를 구성한 대한광복회는 각 도별로 지부까지 조직했다.

대한광복회는 만주 지역 독립 투쟁을 책임질 부사령으로 이석대(李奭大)를 임명했고, 이석대가 순국한 뒤에는 김좌진(金佐鎭)을 파견했다. 각 도의 지부장은 경기도 김선호(金善浩), 황해도 이관구(李觀求), 강원도 김동호(金東浩), 평안도 조현균(趙賢均), 함경도 최봉주(崔鳳周), 경상도 채기중(蔡基中), 충청도 김한종(金漢鍾), 전라도 이병찬(李秉燦)이 맡았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따르면 '경상도·충청도·황해도 지부가 가장 규모가 컸으며 활동도 활발했다.'

대한광복회는 군자금도 마련하고 일제가 징수한 세금을 탈취하기도 할 겸 우편마차(요즘 표현으로 하면 현금 수송차)를 공격하여 빼앗기도 하고, 일본인 소유의 영월 중석광과 운산 금광 수송마차를 습격하기도 했다. 위조 지폐도 만들었고, 친일 부호들을 상대로 강제 모금을 하기도 했으며, 그들을 처단하기도 했다.

1919년 1월 총사령 박상진을 비롯해 김한종, 채기중, 임세규 등 간부들이 체포되어 순국하면서 대한광복회는 활동력을 잃고 말았다. 당시 국외 피신에 성공하여 살아남았던 우재룡은 광복회 후속 활동을 위해 군자금 모금에 나서던 중 마침내 체포되어 1922년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6여 년 동안 감옥에 갇혀 지냈다.



태그:#우재룡, #대한광복회, #동화사, #독립운동, #산남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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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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