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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제법 넓은 밭 한가득 참깨를 심으셨던 (시)어머니는 "털었는데 한 줌도 나오지 않았다"며 황당하다고 했다. "귀신에 홀린 것 같다"고도 했다. 탐스럽게 핀 참깨 꽃을 사진으로 담는 등, 참깨가 자라는 과정을 여러 차례 봤던지라 어머니의 황당함이 이해됐다.

그런데 그와 같은 황당함은 내게도 일어났다. 아버님께서 호박 몇 포기를 텃밭 가장자리에 심어 주셨는데, 호박은 단 하나도 열리지 않고 잎만 무성했기 때문이다.

마침 몇 년 전 종자 관련 책에서 읽은 것들이 떠올라 어머니께 물어보니 먹으려고 사뒀던 참깨를 심었단다. 알고 보니 우리 호박은 아버님이 동네 어떤 집의 호박이 탐스러워 그 씨앗을 얻어다 심은 것이었다.

책에서 읽은 것을 바탕으로 미뤄 짐작했다. 어머니나 내가 수확을 하지 못한 것은 당연하단 생각이 들었다. 같은 씨앗이라도 누가, 어디에서 재배하는가에 따라 다른 만큼 꼭 그렇다고 장담할 수 없으나, 씨앗 때문일 수도 있겟다 싶었다.

예전엔 이처럼 수확한 것 일부를 종자로 써도 얼마든지 됐다. 그래서 어떤 집의 종자가 좋으면 수확한 것을 나눠 심는 일이 예전의 농촌에선 흔했다. 그러나 지금의 사정은 많이 달라졌다. 시중에서 구입해 뿌리는 씨앗이나 모종들은 품종 개량된(신품종) 것들이 대부분인데, 육종 특성 상 심은 첫해만 좋은 수확을 기대할 수 있는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니 예전처럼 씨를 받아 심으면 우리처럼 수확을 못할 수도 있는 것이다.

3천여평에서 100품종이 넘는 토종벼를 전통농업으로 농사짓고 있는 우보농장이 가져온 벼이삭들이다. 각가 다른 품종들이다. 일부 품종만 가져왔다고 한다. 아주 어렸을 때 보고 자란 벼도 있을 것이다. 우리의 수많은 토종벼들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음이 신기하고 고마웠다.
 3천여평에서 100품종이 넘는 토종벼를 전통농업으로 농사짓고 있는 우보농장이 가져온 벼이삭들이다. 각가 다른 품종들이다. 일부 품종만 가져왔다고 한다. 아주 어렸을 때 보고 자란 벼도 있을 것이다. 우리의 수많은 토종벼들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음이 신기하고 고마웠다.
ⓒ 김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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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종씨드림 10주년 기념 및 씨앗 나눔 행사인 씨앗들의 향연.
 토종씨드림 10주년 기념 및 씨앗 나눔 행사인 씨앗들의 향연.
ⓒ 김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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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적인 농가에서 자랐다. 70년~80년대, 우리 집엔 종묘회사들의 홍보책자가 수시로 바뀌며 마루에 놓이곤 했다. 수확이 많다든지, 병충해에 강하다든지, 빨리 자란다든지 등의 설명과 함께 배추와 무를 비롯한 여러 작물들과 농약 등의 사진이 실려 있는 얇은 책자였다.

언제부턴가 그와 같은 책자에 소개된 신품종들을 심는 집들이 하나 둘 늘어갔다. 부모님도 어느 해 김장 배추와 무를 시작으로 고추 등을 신품종으로 심곤 했다. 신품종들은 무엇이든 그동안 심던 것들보다 수확이 많았다. 농민들이 병충해에 강하면서 잘 자라고, 수확이 많도록 육종된 신품종들을 심는 것이 당연했다.

종묘회사들은 최대한의 이익을 내야 한다. 당연히 종자를 최대한 많이, 지속적으로 팔아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필요들을 충족시켜주는 신품종(씨앗)들이 환영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런 사정들로 점점 더 많은 신품종이 심어졌다. 자연스럽게 우리의 토종씨앗들이 농민들에게서 잊혀지고, 사라지게 됐다. 
"깨하고 콩, 생강은 엄마 아버지가 옛날부터 심던 것을 계속 받아 심어왔지. 남들 신품종들 한창 심기 시작할 때(80년대 초), 누가 그러더라고. "신품종은 계속 사서 심어야 한다"고. 그래서 망설이고 있는데, 신품종 깨 심어본 사람들이 다들 그래. 깨가 훨씬 많이 나와서 좋기는 한데 껍질이 두꺼워서 기름을 짜면 적게 나온다고. 고소하지도 않다고. 볶아서 양념으로 먹어도 질겨서 별로라고. 그때 누가 줘서 볶아봤더니 영 맛이 없는 거야. 그래서 옛날에 심던 것을 해마다 종자 받아 심어왔지. 아무리 찾아봐도 우리 깨 같은 종자 없다고 조금만 바꾸자고 가지고 오는 사람들이 있어서 받은 것 볶아보면 그 사람들 말이 맞아. 농사를 놓자니 뭣보다 깨가 걸리네!"(3월 27일 친정엄마와의 통화에서)
그런데 이와 같은 경제적인 논리를 앞세워 오랫동안 우리와 함께 해왔던 토종씨앗들을 놓기에는 뭔가, 막연히 아쉬운 것도 사실이다. 어쩌면 당연한데도 말이다.

신품종들이 우리의 들판에 많이 자라면서 부모님처럼 신품종에 대한 아쉬움과 한계를 느끼는 사람들이 차츰차츰 늘었을 것이다. 옛날처럼 농사지은 것을 받아 심는 것이 농부의 당연한 권리이자 자세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우리 토종씨앗들의 가치를 느끼는 사람들도,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보존해야할 필요성을 느끼는 사람들도 차츰차츰 늘었을 것이다.

64종의 토종 콩들로 된 토종씨드림 10주년 포스터. '우리 곁에 이렇게 많은 콩들이 있었나?', 포스터부터 끌리는 행사였다.
 64종의 토종 콩들로 된 토종씨드림 10주년 포스터. '우리 곁에 이렇게 많은 콩들이 있었나?', 포스터부터 끌리는 행사였다.
ⓒ 김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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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사무실에 10명이 모였습니다. 토종씨앗의 중요성을 먼저 자각한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과 함께 지역실태 조사를 하면서 '토종씨앗'에 전념하는 단체의 필요성을 깨닫고 모인 단체 대표와 개인이 모여서 '토종씨드림'을 결성했고, 이어 '토종씨드림' 카페를 개설하여 씨앗 보전의 중요성과 방법에 대한 온라인 소통을 시작했습니다.

2008년 이후 매년 토종씨앗 수집이 전개되었고, 2017년에는 그동안 수집하고 나눔 해온 것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 현지 보전되고 있는 토종씨앗 데이터베이스 구축을 위한 작업에 돌입하고 누구나 수집을 할 수 있는 수집 안내서와 채종 안내서를 발간하면서 토종씨앗에 대한 확산된 인식을 한 단계 높이게 되었습니다.-(토종씨드림 창립 10주년 기념행사 책자 '씨앗들의 향연'에서)


'토종씨드림'도 그중 하나. 이처럼 토종씨앗 보존의 필요성을 공감한 10명이 모여 뜻을 모았고, 올해로 10주년이 되었다. 지난달 2월 24일 금천구청(서울시) 대강당에서 10주년 기념행사가 열렸다. 토종씨앗에 대한 정보는 물론 토종씨앗 나눔을 겸한 행사였다.

90년대 가정을 꾸렸다. 그동안 부모님이 농사지은 것들을 먹고 살았다. 부모님이 농사를 짓고 있는데도, 농촌문제가 매스컴 등을 통해 이야기되면 깊이 공감하면서도 피부에까진 와 닿지 않았다. 종자나 토종씨앗에 관심이 있을 리 만무했다.

이런 내가 우리 토종씨앗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나아가 토종씨드림 카페까지 가입하게된 것은 <논, 밥 한 그릇의 시원>, <내손으로 받는 우리 종자>, <종자, 세계를 지배하다>와 같은 종자 관련 책들을 읽으면서였다.

농촌문제에 공감하면서도 피부에 와 닿지 못했던 것은 농사와는 거리가 먼 삶이었기 때문인데 이들 책들을 통해 우리 토종씨앗의 중요성을 느끼면 느낄수록 뭔가 부끄러워졌다.

인터넷카페 가입 당시엔 지금처럼 텃밭조차 꾸리지 않았었다. 그럼에도 망설임 없이 가입한 것은 우리 토종씨앗에 대해 좀 더 많은 것들을 알고 싶어서였다. 원하는 만큼 활동하지 못했고, 그만큼 더 알아지는 것도 없었지만 누군가에게 모임을 소개하곤 할 정도로 필요성을 느꼈다.

행사 며칠 전에 게시판을 통해 공개된 10주년 행사 기념포스터부터 끌렸던 행사였다. 그동안 전혀 짐작조차 못했던 수많은 토종 콩들이 실린 포스터를 받아 올 수 있는 것만으로도 참여가 의미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좋아한 포스터이다. 포스터를 가져다 눈 자주 가는 곳에 붙여놓고 볼 수 있음에 설레었다.

그런데 행사장에 도착해 더욱 놀라고 말았다. 수십 종의 벼들이 이삭 형태로 행사장 입구에 전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콩과 벼뿐이 아니었다. 행사장을 빙 둘러 포스터를 통해 본 수많은 콩 실물들과, 다양한 옥수수들과, 수수나 배추, 무 등 전혀 짐작조차 못했던 엄청난 종류의 토종씨앗들이 전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구경을 하고 또 하면서 자꾸만 아쉬워졌다. 남편과, 텃밭을 일구는 주변 사람들이 떠올랐다. 

우리 토종쌀 몇가지로 지은 밥을 맛볼 수 있었던 점심.
 우리 토종쌀 몇가지로 지은 밥을 맛볼 수 있었던 점심.
ⓒ 김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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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들이 심어 가꾼 우리 토종 작물로 만든 반찬들.
 회원들이 심어 가꾼 우리 토종 작물로 만든 반찬들.
ⓒ 김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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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좋았던 것은 토종벼들을 비롯하여, 구억배추 김치 등 회원들이 직접 농사지은 토종 작물들로 마련된 점심이었다. 토종쌀로 지은 밥의 찰기는 떨어졌다. 그런데 '이 정도로 가격이 지나치게 높지 않다면 한 번씩 구입해 먹어보고 싶은, 깊은 담백함이 느껴지는 그런 밥' 이었다. 

지난겨울, 한 지인이 맛보라며 구억배추로 담근 김치를 보내줘 아껴 먹고 있다. '씹는 맛 느낄 수 있도록 적당하게 질기며, 약간 알싸하고 개운한 맛'이 특징인 구억배추 김치는 씨앗을 구해 심어 담거나, 어렵게 구해서라도 다시 먹어보고 싶을 정도로 매력 높은 맛이란 생각이다. 여러모로 뜻 깊은, 다시 먹고 싶은 밥상이다.

"우리나라에서 농부들은 죄인보다 못하단 생각이 들곤 해요. 농사 지어 뭐 남는 게 있어야죠. 걸핏하면 갈아엎어야 하고. 그럼에도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천형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그렇거든요. 농민들 없으면 먹고 살기 힘든데 사회적으로도 소외 받기 일쑤고. 전, 여기에 모인 이분들이야말로 충성하는 분들이란, 그 어떤 정치인들보다도 사람들을 살리는 사람들이란 생각이에요. 그럼에도 국가도 못하는, 아니, 안하고 있는 우리 토종씨앗들을 지켜내고 확산시키는 일을 이분들이 하니까요! "(어떤 회원)


그날 한 회원은 이처럼 말했다. 동감이다. 농촌과 농사에, 토종씨앗에 보다 많은 사회적 관심이 머물고 모아지는데 이 기사가 작은 계기라도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보람 있겠다. 농부의 딸로 태어났음에도 농촌을 등진 죄스러움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을 것 같다.

토종씨드림의 이유와 목적인 토종 씨앗의 가치와 지켜야 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하려면 유전자, F1, 육종, 고정종, 교배종, 자가수정, 유전자원, 종자전쟁, 품종보호권 등과 같은 전문적인 용어들을 언급하며 설명해야만 한다. 설명도 이해도 쉽지 않다. 

그래도 누군가 묻는다면, ①육종은 토종씨앗에서 출발하기(출발해야) 때문이다. ②종종 '장미 한 송이, 딸기 한포기도 외국에 로열티를 지불 한다'와 같은 기사들이 보도되곤 한다. 우리가 그처럼 외국에 로열티를 지불하는 이유는 종자에 붙어있는 고유 권리 때문이다. 그처럼 우리 토종씨앗들은 우리의, 우리 농민들의 어떤 권리이자 살 길이다.

권리는 지키지 못하면 사라지거나, 도둑맞거나, 빼앗기기도 한다. 우리가 중요성을 인식 못한 사이 외국에서 가져가 자기 것으로 둔갑시켜버려 우리가 값을 치르고 사야만 하는 일부 나무들이나 작물들처럼 말이다. 이처럼 말해주고 싶다. 

토종 옥수수 씨앗들.
 토종 옥수수 씨앗들.
ⓒ 김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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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날 흔하게 심어지기도 했던 우리 토종 작물, 그 씨앗들 중 일부다.
 지난날 흔하게 심어지기도 했던 우리 토종 작물, 그 씨앗들 중 일부다.
ⓒ 김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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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에 참여하길 참 잘했다고 생각한 이유 또 하나는 서울과 같은 도시에서도 농사를 지어볼 수 있도록 정보 등을 공유하는 '서울도시농업시민협의회(각 지역별, 성격에 따라 여러 단체로 구성)' 같은 단체를 알게 됐다는 것이다.

[만들기 쉬운 작물 영양제: 난각칼슘]: ①먼저 말린 계란껍질을 잘게 부순 후 페트병 등 용기에 넣고 계란껍질 양의 약 5배의 현미식초를 붓습니다(계란껍질 100g에 현미식초 500c정도) ②7일 정도 지난 후 계란껍질을 걸러낸 후 냉장보관하면서 사용합니다. ③난각칼슘 식초의 500배 이상의 물에 희석하며 분무기를 이용해 작물의 잎에 골고루 분사해주면 작물이 쑥쑥 잘 자라는 천연영양제가 됩니다.

[병충해 관리: 마요네즈 희석액]: 진딧물 등 도시에 흔히 나타나는 병충해 방제는 누구나 쉽게 구할 수 있는 마요네즈로 가능합니다. 마요네즈와 물을 1:50의 비율로 혼합해(1리터 페트병에 티스푼 하나 정도 분량) 분무기로 분사해주면 됩니다. 단, 너무 많은 양을 자주 뿌리면 작물의 성장에 장애를 줄 수 있으므로 진딧물을 관찰하며 5일 정도의 간격으로 뿌려주는 것이 좋습니다.-'서울도시농업시민협의회' 소식지에서.


덧붙이는 글 | 신품종 종자 관련, 국립종자원과 농촌진흥정, 모 종묘회사에 전화를 통해 확인했으나 종자 관련 전문가가 아니라 관련 일부 내용은 본인의 생각과 추측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토종씨드림은 '다음 카페' 에서, '서울도시농업시민협의회' 정보는 페이스북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태그:#토종씨드림, #토종씨앗(종자), #종자은행, #친환경살충제, #서울도시농업시민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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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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