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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8.04.11 09:54수정 2018.04.11 09:54
'서번트증후군'이란 게 있다. 왼쪽 뇌의 손상을 보완하기 위해 오른쪽 뇌가 비범하게 발달하여 나타난다. 주로 음악, 미술, 암기, 수학 분야에서, 그리고 여자보다 남자에게서 4배 이상 더 많이 나타난다. 좌뇌의 논리적 사고와 추상화 능력에 문제가 생김으로써 우뇌의 감각적 사고와 구체화 역량이 극대화되어 발현된다. 그런데 왜 글쓰기 서번트증후군은 나타나지 않을까. 혹시 위대한 작가들은 그런 천재바보들이 아니었을까.

마음을 움직이는 글을 쓰라고 한다. 그런데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뇌에 있다. 뇌가 움직이면 마음이 움직인 것이다. 뇌를 움직이려면 어떠해야 하는가. 오감을 자극해야 한다. 뇌는 두개골 안에 갇혀 있는 1.4킬로그램의 단백질 덩어리다. 오감을 통해 밖과 교신한다. 시각과 청각이 대표적이다. 안톤 체호프가 그랬다.

"달이 빛난다고 하지 말고 깨진 유리 조각에 반짝이는 한 줄기 빛을 보여줘라."

단순히 '예쁘다'고만 하면 잘 그려지지 않는다. 코가 어떻게 생겼고, 눈이 어떻게 생겼고, 입이 어떻게 생겼다고 구체적으로 말해야 한다. 그러면 독자는 머릿속으로 떠올린다. 그러고 나서 '아, 예쁘겠구나' 생각한다. 그러면 움직인 것이다. 자기소개서를 쓸 때에도 마찬가지다. '나는 성실합니다', '나는 창의적입니다' 이렇게 쓰면 안 된다. 성실함과 창의성을 보여줄 수 있는 사례, 근거를 담담하게 써야 한다. 자신을 설명하지 말고 묘사해야 한다.

'아프리카 난민을 도웁시다' 하면 사람들은 움직이지 않는다. 아프리카 어느 나라, 나이가 몇 살이고 이름이 무엇인 소녀가 굶어 죽어가고 있다고 해야 움직인다. 꽃을 꽃이라 하지 말고 꽃의 이름을 써주고, 총도 권총, 그중에서도 구체적인 총의 모델을 얘기해야 머릿속으로 그릴 수 있다. '나무' 보다는 '마을 어귀에 서 있던 버드나무'가 낫고, 그보다는 '어렸을 적 마을 어귀에서 어른들이 개를 매달아 잡던 버드나무'가 더 낫다. 무라카미 하루키도 자동차의 이름을 모델명까지 작품에 다 쓴다.

추상적으로 쓰면 움직이지 않는다. 구체적으로 써야 한다. 거대담론에 움직이지 않는다. 주변 얘기에 움직인다. 이론 말고 실제, 의도 말고 실행, 원칙 말고 실천 내용을 쓰자. 거창한 것, 관념적인 것보다, 구체적이고 생생한 것, 주변에서 일어나는 것을 쓰자. 교육 문제에 관한 글을 쓰려면 '내 아들딸'을 떠올리고 거기서 답을 찾아보자. 이런 내용이 모호하지 않고 손에 잡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신영복 선생님의 목수 이야기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선생님이 감옥에서 만난 목수는 집을 그릴 때 주춧돌부터 그렸다. 지붕부터 그려온 자신이 부끄러웠다. 생명력 없는 개념의 세계에서 벗어나라는 주문이다. 삶을 관념적으로 파악하거나 개념적으로 재단하지 말라는 뜻이다. 몸을 써서 삶의 구체성에 부딪치는 글을 쓰라는 의미이다.

한눈에 보이게 그릴 수 있으면 글도 잘 쓸 수 있다

눈에 보이듯이, 그림같이 쓰려면 먼저 머릿속에 그릴 수 있어야 한다. 글을 쓰는 궁극적인 목적은 전달이다. 이러한 목적을 가장 효과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게 시각적 방법이다. 시각적 방법은 독자의 머릿속에 이미지를 그려주는 것이다. 글은 눈으로 읽는다. 읽으면서 생각한다. 생각은 이미지 형태로 그려진다. 소설이나 희곡은 물론 여타 글도 그런 그림이 그려져야 한다. 그것이 좋은 글이다.

글 이전에 그림이 있었다. 동굴벽화도 그중 하나다. 아니 그 시대엔 그림이 글이었다. 어린아이도 그림부터 그린다. 그림책을 읽으며 글을 배운다. 학교에 가면 그림일기로 양수겸장을 한다. 마인드맵은 그림을 빌려 글을 쓰는 방식이다. 개요를 짠다는 것은 글의 전체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그림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글로 쓴다.

기업에서 근무할 때 나의 상사는 업무를 종이 한 장에 그림으로 그려 지시했다. 벤처기업에서 일할 때 회사 대표 방에는 화이트보드가 있었고, 대표는 늘 그림으로 회사 방침을 설명했다.  이런 사람을 보며 나는 좌절했다. 나는 그림으로 보여주지 못한다. 그림으로 보여주는 사람의 공통점은 상상력과 논리력이 뛰어나다는 것이다. 상상과 논리라는 두 날개로 날지 않으면 그림을 그리지 못한다. 그릴 수 있다는 것은 머릿속에 그림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의 특징은 복잡한 것을 단순화한다. 어려운 것을 쉽게 설명한다. 그래서 한눈에 보여준다.

간혹 신문 방송에서 재벌 혼맥이나 조폭 조직도를 봤을 것이다. 그런 그림을 말로 풀어 설명하거나 글로 쓰려면 얼마나 복잡하고 장황해질까. 그림으로 그릴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자기 생각을 그림으로 이미지화해 종이에 그려보자. 기획안을 작성할 때도 그림을 그려보자. 이런 낙서가 생각을 정리해주기도 하고, 글 쓰는 데 도움도 된다. 한눈에 보이게 그릴 수 있으면 글도 잘 쓸 수 있다.

소리와 글쓰기도 밀접하다. 사람은 정보를 받아들이는 데 80%를 시각에 의존한다. 그다음이 청각, 촉각, 미각, 후각 순이다. 하지만 청각은 시각보다 더 큰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TV보다 라디오가 더 상상하게 하는 건 틀림없다. 80%를 차지하는 시각은 절대 교주와 같이 내게 틈을 주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김경주 시인의 제안은 귀 기울여 들을 필요가 있다. 그는 여행 가서 사진 말고 소리를 녹음해보라고 한다. 돌아와서 녹음한 소리를 글로 옮겨보는 것이 훌륭한 글쓰기 공부가 된다는 것이다. 청각은 마지막까지 남는 가장 예민한 신체기관이라고 한다. 죽기 직전, 모든 신체기관이 정지 상태에 갈 때도 청각만은 살아서 소리를 듣는다. 이렇게 귀한 청각을 우리는 소리를 듣는 데만 쓴다. 글을 쓰는 데 청각을 활용해보자.

독자는 두 가지 통로를 통해 글에 빠져든다. 하나는 내용이고, 다른 하나는 리듬이다. 내용은 시각 비중이 크고 리듬은 청각의 역할이다. 글을 읽는 것 역시 노래 감상과 같다. 우리는 노래를 들을 때 가사와 가락을 동시에 음미한다. 글도 마찬가지다. 가사와 가락의 비중이 다를 뿐이다. 노래는 가락 비중이 큰 반면, 글은 가사에 더 방점이 찍힌다. 그러니 글 쓰는 사람은 작사가인 동시에 작곡가여야 한다. 가사만 좋고 박자가 안 맞으면 잘 읽히지 않는다. 글에 빠져들지 않는다. 방법은 마음속으로 소리 내어 읽으면서 글을 쓰는 것이다.

청와대 있을 때나 기업에서 글을 쓸 때도 소리로 글쓰기를 시작했다. 구술을 듣고 그 내용을 글로 옮겼다. 구술해주는 내용을 받아 적어 글로 만드는 것은 소리와 글쓰기가 협업하는 과정이다. 친구의 말을 듣고 글로 써보거나, 하고 싶은 말을 녹음해서 그것을 들으면서 글로 옮겨본다든가, 인터뷰 기사를 작성해보면 이런 훈련이 가능하다. 사실은 내 글을 쓸 때도 내 안에서 나는 내 목소리를 듣고 글로 옮긴다. 소리를 듣고 글을 쓰면 읽는 사람 역시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글 잘 쓰고 싶거든 몸을 쓰자

요즘에도 글을 다 쓰면 출력해서 소리 내어 읽어본다. 글에는 내재돼 있는 운율이 있고 이것은 소리 내어 읽었을 때 비로소 알 수 있다. 읽으면서 리듬이 타지지 않으면 고친다. 프랑스 소설가 귀스타브 플로베르(Gustave Flaubert)는 "문장은 독자의 지성에 호소할 뿐만 아니라 음악처럼 독자의 잠재의식에 호소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액면 그대로의 낱말 뜻만이 아니라 좀 더 감동적인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말했다. 의미심장한 말이다.

글에서 운율은 중요하다. 시뿐만 아니라 산문에서도, 심지어 보고서에서도 운율을 간과해선 안 된다. 글에도 소리가 있다. 독자는 눈으로 보지만, 귀로도 듣는다. 글 쓰는 사람은 리듬감을 가져야 한다. 글을 쓸 때 자기만의 리듬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리듬을 타야 한다. 시 낭송을 하거나 좋아하는 작가의 글을 소리 내어 읽어보는 것도 방법이다. 반복해서 읽다 보면 자신도 그런 리듬으로 쓰게 된다. 그것이 자기의 문체가 된다. 글의 고유한 리듬이 곧 문체이다.

시각과 청각뿐만 아니라 손으로 만지기, 코로 냄새 맡기, 혀로 맛보기 등 오감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이런 오감을 상호 교차해서 사용해보는 것은 글쓰기 훈련에 도움이 된다. 예를 들어, 보이지 않는 물체를 만져보고 냄새 맡고 맛을 본 후, 그 느낌을 써서 읽어보면 글을 매개로 시각, 청각, 촉각, 후각, 미각이 총동원된 글쓰기 연습을 할 수 있다. 다섯 가지 감각의 융합, 공감각적 시도는 우리의 뇌가 오감과 글쓰기 간의 협력 방식을 스스로 깨우치고 적용해보는 과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어릴 적, 공부 잘하는 친구와 음악, 미술을 잘하는 친구는 다른 종족이었다. 음악, 미술을 잘하는 친구는 공부를 못했다. 공부 잘하는 친구는 예능에 약했다. 그리고 공부 잘하는 친구들이 글을 잘 쓴다고 생각했다. 과연 그럴까. 잘못된 교육에서 비롯된 현상이다. 음악, 미술을 잘하는 친구는 공부하고 글 쓸 시간이 없었을 뿐이다. 만약 음악, 미술을 잘하던 친구에게 글 쓸 기회가 주어졌다면 지금 글만 쓰는 서생들은 부끄러워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이 먹고 보니 글쓰기와 몸 쓰기는 하나다. 글은 쓰고 있는 시간만이 아니라, 쓰기 위해 경험하는 시간까지를 포함한다. 자기소개서 안에는 산만큼의 시간이 스며있고, 자서전에는 평생이 녹아 있다. 글을 잘 쓰고 싶거든 몸을 쓰자. 눈과 귀와 코와 입과 손을 자극하자. 뇌와 몸은 하나다. 생각이 움직임으로 나타나고, 움직임이 생각에 영향을 미치는 삶, 그것이 진정으로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환경이다. 내가 좋아하는 안도현 시인은 '제발 삼겹살 좀 뒤집어라'고 말한다.

"삼겹살을 구울 때 고기가 익기를 기다리며 젓가락만 들고 있는 사람은 삼겹살의 맛과 냄새만 기억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고기를 불판 위에 얹고 타지 않게 뒤집고 가스레인지의 불꽃을 조절할 줄 아는 사람은 더 많은 경험을 한 덕분에 더 많은 기억을 소유하게 된다."


나는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그날을 떠올린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몹시 아팠던 날이었다. 엄마가 밤새 머리맡에 있었다. 이마 위에 얹혀준 차디찬 수건이 시원했다. 걱정하는 엄마의 한숨 소리에 맞춰 나는 앓는 소리를 냈다. 해열제인 듯한 시럽의 쓴맛도 그날은 감미로웠다. 엄마 품에 온전히 안겨 있는, 안전하고 평화로운 밤이었다.
덧붙이는 글 필자 강원국은 청와대 연설비서관을 역임했으며 2014년 <대통령의 글쓰기> <회장님의 글쓰기>를 출간한 이후 글쓰기 관련 강연과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강원국의 글쓰기'는 3월 26일부터 매주 월·수·금 <오마이뉴스>에 연재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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