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4.19 08:02최종 업데이트 18.04.19 08:02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했던 자신의 과거를 들려주는 사람들-국가폭력피해자들이 있다. 그들의 억울함을 듣고 조사하는 과거사 위원회가 사라진 뒤에도 나는 여전히 그들을 만나는 일을 해왔다. 나는 국가폭력피해자를 음식으로 기억한다. 그 이야기를 풀어보려 한다. [편집자말]
"아니 전화 한 통으로 사건을 기각시키는 경우가 어디 있어요. 적어도 사람을 만나보고 기록도 보고 증거가 있는지 살펴봐야지. 몇십 년간 죄인으로 살다가 억울한 사람 진실을 풀어준다고 해서 과거사위원회에 신청을 했는데 이런 경우가 어디 있어요?"

그녀는 사무실 중간에 위치한 회의 테이블에 앉아 본인의 억울함을 마구 풀어놨다. 나는 흥분한 그녀를 진정시켰다. 일단 조사규정을 살펴보고 다시 구제할 수 있는 방법을 살펴보겠다고 약속했다.


그녀를 보내고 위원회 법안을 살펴보니 다행히 법 8조에 재조사 규정이 있었다. 그 규정을 근거로 그녀의 사건을 다시 진정 받아 재조사에 임했다. 그녀를 다시 만난 건 그로부터 2주 뒤였다. 재조사 결정이 내려지고 다시 조사실에 마주앉았다.

"1979년 6월이었나 봐요. 제가 보험회사 일로 외근을 나갔다가 퇴근해서 집에 들어오니 올케가 하는 말이 형사가 집으로 찾아왔었다고 했어요. 그래서 집에 있다가 형사도 안 찾아 오길래 뭔가 이상해서 친정으로 갔더니 친정식구들이 싹 다 사라진 거예요. 갓난 아기였던 막내를 외숙모 댁에 맡겨 놓고 저만 다시 서울로 와서 사무실에 출근했어요. 그랬더니 형사들이 찾아와서 잡아 가더라고요."

보험설계사 일을 하던 김순자는 그렇게 연행되었다.

그때 죽더라도 신고를 했더라면...

김순자 씨의 어머니와 함께 찍었던 사진. 지난 2016년 서울시민청에서 '기억발전소' 기획으로 사진전시회를 하였다. ⓒ 변상철


"용산역 쪽에 있는 건물이었는데 거기가 남영동 대공분실이라고 하더라고요. 시커먼 건물로 들어가는데 왜 잡아가는지 아무도 말을 안 해줘요. 건물로 들어가는데 시커먼 철문이 자동으로 열리는데 쿵쾅하고 열리더라고요. 차에서 내리자 몇 층인지 모르는 곳에 들어갔어요. 뭐 뺑뺑 돌아가는 계단으로 올라가는데 몇 층인지 아나요."

조사실에 들어가자 수사관들이 그녀를 다짜고짜 책상 앞에 앉혀놓고는 다른 사람들 조사를 다 마쳤는데 부산 다대포에 다녀왔냐고 물었다. 처음에 간 적이 없다고 부인하자 수사관이 신고 있던 구두를 벗어 머리며 손등이며 마구 때렸다. 다대포가 어딘지도 몰랐지만 일단 구타를 피하자는 마음에 다녀왔다고 무조건 시인했다.

"거기서 다대포에 가서 미사일 기지를 탐지하고 왔다는 시인을 했어요. 그렇게 며칠 조사받고는 차에 태워서 춘천 대공분실로 끌고 가더라고요."

1968년 가을, 소위 '울진삼척 무장공비' 120명이 남파되어 동해안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울진과 삼척 등지에 남파된 이들은 대부분 교전 중 사망하였다. 이 120명의 무장공비는 대부분 한국전쟁 때 인민군에 끌려간 남한 출신의 사람들이었다. 그 중에는 김순자의 외가 쪽 친척이 되는 진현식이 있었다.

"큰딸을 데리고 친정에 가서 자고 있는데 누군가 문고리를 열면서 '접니다'하는 거예요. 어릴 때 외가에 자주 다녔기 때문에 진현식이 한국전쟁 때 행방불명되었다는 말을 들었거든요. 그래서 순간적으로 진현식이 북한에서 내려온 간첩이라는 걸 알았어요. 아버지한테 얼른 신고하자고 했죠.

그랬더니 아버지는 '우리가 살려면 신고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살려면 이 사람들 조용히 보내야 한다. 안 그러면 이 사람들 손에 다 죽는다'라고 하셨어요. 그때 죽더라도 신고를 했으면 이렇게 집안사람들이 죽지는 않았을 텐데요."

그렇게 머물다 간 친척 때문에 10년 뒤 집안이 몰살되다시피 한 광풍을 맞아야 했던 것이다.

"춘천에 있을 때 수사관이 '초가집 사진을 찍어다가 간첩에게 갔다 줬지?'하고 묻길래 그런 적 없다고 하자 수사관이 저를 때렸어요. 때리는 이유도 가지가지입니다. 정치인 중에 누구를 지지하느냐고 해서 김대중이라고 했더니 빨갱이년이라며 또 때립니다. 집에 라디오가 있느냐고 해서 있다고 했더니 그걸로 북한 방송을 듣지 않았느냐고 해서 안들었다고 하자 이번에는 '막대기로 젖가슴이나 XX를 찔러야 정신을 차리지'라는 등의 협박을 합디다."

여관으로 친척들을 다 모아놓고 고문

2016년 가을 백남기 농민 사망시 영안실을 '지금여기에'피해자분들과 백남기 농민 영안실을 방문했던 김순자 씨. 사회활동을 위해 분주히 뛰어다닌다. ⓒ 변상철


그녀는 비장한 표정으로 쏟아지는 울음을 참았다. 비참함을 이겨내며 말을 이었다.

"잘 참았죠. 잘 버티고 있었는데 하루는 수사관이 가족을 몽땅 잡아왔다는 말을 하는데 맥이 탁 풀리더라고요. 그때부터 몸이 아프기 시작했어요. 조사받으며 맞을 때도 잘 버텼는데 그때부터는 몸 여기저기 아프고 통증이 밀려오더라고요. 한 달간 옷도 못 갈아입고 매일 차가운데서 오래 앉아서 조사받다 보니 냉병 같은 것도 생겼어요. 생리한다고 말도 못하고..."

"춘천에서 유치장에 얼마간 있다가 여관으로 우리 친척들을 다 모아 놓더라고요. 네모 반듯한 여인숙 같은 곳인데 방 하나에 사람 하나에 수사관 하나씩 배치가 됐어요. 방문을 열어놓으면 맞은 편 방에 있는 사람이 보이는데 하루는 작은 아버지가 깁스를 하고 방에 들어가는 거예요. 제가 눈짓으로 많이 맞았냐고 하니까 고개를 끄덕이더라고요. 삼촌들 옷에 흙이 그대로 묻어 있는걸 보고는 논일하다가 잡혀왔다고 짐작했지요. 팔이 부러질 정도로 때렸으니 고문이 얼마나 심했겠어요."

그녀는 조사받는 동안 스스로 간첩이 되었다고 한다. 조총련이 무엇인지, 반국가단체가 무엇인지 몰랐던 그녀를 경찰이 알려주었다.

"수사관이 조총련, 조총련 하길래 조총련이 누구냐고 물었어요. 조총련이 사람 이름인줄 알았거든요. 통일혁명위원회라고 하길래 내가 혁명공약을 안다고 하니까 수사관들 눈이 휘둥그레져요. 그래서 저보고 혁명공약이 뭐냐고 물어보는 거예요. 그래서 줄줄 외워줬죠. 그리고 나서 엄청 맞았어요."

그녀가 외운 혁명공약은 박정희가 5.16쿠데타 이후 쿠데타의 명분을 내세우기 위해 내건 공약이었다. 그녀는 어릴 적 그 혁명공약을 학교에서 달달 외웠다고 한다. 수사관들 앞에서 박정희의 혁명공약을 외웠으니 수사관들 얼굴이 어땠을까 짐작이 된다.

"너무 때리더라고요. 매일 개 패듯 패요. 나중에는 심심해서 때리는 거예요. 가슴이며 엉덩이며 막대기로 재미 삼아 찔러요. 그런데 어느 날 조사도 안 하고 여관이 조용한 거예요. 무슨 일인가 하고 밖을 내다 보니 수사관들도 하나도 안 보여요. 그대로 조사가 마무리되더라고요."

대통령이 사망한 것이다.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유신의 시대가 끝나자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그녀의 고문도 그렇게 끝난 것이다. 그렇게 조사가 끝나고 하루는 수사관이 '내일은 검사에게 조사를 받으러 가니 여기서 조사받은 대로 시인을 하라'는 단속을 받았다고 한다.

"수사관들이 그래요. 내일은 영감님에게 가서 조사를 받을 것이라고요. 그래서 그런가 보다 하고 다음 날 그 '영감님' 만나러 갔지요. 그런데 검사실에 들어가니 '영감'이 아니라 새파랗게 젊은 남자가 앉아 있는 거예요.

내가 속으로 '아니 저렇게 젊은 사람을 영감님이라고 하니 이상하기도 하네' 하고 생각한 적이 있어요. 그 영감님 이름도 잊지 않아요. 초대 헌법재판관이었던 김양균 검사였어요. 수사관들이 말한 대로 검사 앞에 가서 부인하면 또 맞을까봐 검사가 묻는 대로 전부 네, 네 했습니다하고 다 인정했어요. 수사관이 옆에 딱 앉아 있는데 어떻게 부인을 해요."

제가 당한 일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그렇게 그녀는 법정에서 5년의 형을 선고 받고 살아야 했다. 그녀가 감옥에서 살아가는 5년간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큰 딸아이가 동생 둘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아이들에게는 지옥 같은 삶이었다.

배고픔도 참기 어려운 고통이었지만 더 참기 어려운 고통은 간첩자식이라는 고통이었다. 학교 아이들과 친척들의 차가운 시선도 힘들었지만 간첩자식이라고 비난하는 소리는 정말 참기 힘들었다고 한다.

"큰 딸아이가 그래요. 한번은 사람들이 나가 죽으라고 하더래요. 정말 힘들어서 동생 둘을 데리고 죽을 작정으로 약국에 가서 쥐약을 달라고 했대요. 눈치 빠른 약사가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아이들을 타일러서 돌아가라고 하더래요. 오히려 돈 몇 푼을 주면서 열심히 살라고...

그리고 몇 년 있다가 큰 애가 몸이 크니까 생리를 시작하잖아요. 근데 생리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생리대를 살 돈도 없으니까, 하굣길에 시작한 생리 때문에 무작정 부잣집에 들어갔대요. 그리고는 그 집일을 해 줄 테니까 돈 좀 달라고, 그렇게 일을 해서 생리대를 샀다네요. 그 말을 듣는 어미 가슴이 어떻겠어요."

'기억발전소' 기획으로 시민청에서 열린 사진전시회 ⓒ 변상철


말을 듣는 내내 기가 막혔다. 소설보다 더한 현실이 내 주변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난 알지 못했다. 그리고 이러한 그들의 한탄을 과거사위원회에서 조차 듣지 않았다.

"참 답답해요. 제가 당한 그 일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민족의 문제 때문에 우리 가족이 왜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 많은 생각을 해봤어요. 누구라도 이런 일이 생긴다면 다 같은 고통을 당하는 거잖아요. 어떻게 이 민족의 문제를 풀 수 있을까요? 통일이 되면 가능할까요?"

한참 이야기를 듣고 나니 배가 고팠다.

"우리 어디가서 밥이라도 먹어요. 뭐 드실래요?"
"아무거나 잘 먹어요. 조사관님 먹고 싶은 거 먹으러 가요."
"그래도 기왕이면 드시고 싶은 것 드시죠."
"먹는 건 아무것이라도 잘 먹어요. 조사관님도 할 일이 많을 테니 아무거나 정해서 빨리 먹어요."

'아무거나' 먹자는 김순자는 그날도 구내식당에서 백반을 시켜 먹었다. 빠른 속도로 먹는 그녀의 식사 속도에 또 한 번 놀랐다.

"천천히 드세요. 누가 쫓아 오는 것도 아닌데."

아직 절반도 먹지 못했는데 그녀는 이미 밥그릇을 다 비우고 수저를 내려놓았다.

"나는 마음이 급해요. 뭐라도 빨리 하고 싶어요. 조사도 빨리 끝내고 집에 가서 아이들도 봐야하고, 또 집회나 모임에도 나가야 하니 마음이 참 급해요."

'아무거나' 잘 먹는 그녀는 음식을 가리지 않았다. 그녀에게 음식은 즐거움이 아닌 생존이었다. 그녀가 달려가는 그곳이 '즐거움'이었던 것이다. 2016년 그녀는 겨울 강원도 삼척에 사는 친척이 보내왔다며 백골뱅이 한 상자를 보내왔다. 한두 명이 먹기에는 너무도 많은 양이라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중, 송년회 겸 골뱅이 파티를 열기로 하고 마을 청년들을 불러모았다. 그리고 그 밥상 이름을 '평화가 깃든 밥상'이라고 이름 지었다. 그녀와 함께 나눈 밥상은 즐거운 추억으로 남았다.

강원도 삼척에서 보내온 백골뱅이 등 해산물로 차린 '평화의 밥상'을 동네 청년들과 나누었다. ⓒ 변상철


'달리는 여자' 김순자
김순자는 1945년 강원도 삼척에서 김상회의 장녀로 태어났다.

그녀는 가난한 집안 사정으로 일찍 결혼을 하였는데, 상대방은 보안대에서 근무하던 남자였다. 남편은 집에 자주 들어오지도 않을 뿐더러 월급도 제때 가져다주지 않아 경제적으로 매우 곤란했다고 한다. 결국 남편과 이혼하였고, 어린 아이들은 삼척 친정에 맡기고 서울로 상경하여 행상, 식모 등의 일을 하다가 교육보험 외무사원으로 일했다고 한다.

그녀가 보안대 남편과 결혼한 것과 보험회사 직원으로 근무한 것은 그녀가 간첩으로 조작되는 데 불리하게 작용하는 요인이 되었다. 군사기밀을 빼내기 위해 남편과 결혼했다거나 여러 사람들을 만나면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보험외판원이 되었다는 말도 안 되는 혐의를 받게 된 것이다.

1979년 연행되어 7년형을 선고받고 출소한 뒤 그녀는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던 동생 김태룡과 외가 쪽 사람들의 석방을 위해 전국을 뛰어다니며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활동을 했다고 한다.

2012년 서울고등법원 재심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지금도 그녀는 양심수 후원회 활동을 하며 목요일마다 탑골공원 앞에서 열리는 민가협 집회에 빠짐없이 참여한다. 그녀는 감옥에서 자신의 문제가 분단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래서 통일을 위한 행사라면 어디라도 달려가 자신의 목소리를 높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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