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 tvN 새 수목 드라마 <나의 아저씨>가 첫방송됐다.

22일 tvN 새 수목 드라마 <나의 아저씨>가 첫방송됐다. ⓒ tvN


돌려서 시작하지는 않으련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개그맨 유병재씨가 왜 사과를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tvN 수목드라마 <나의 아저씨>(2018)에 대한 취향을 표현한 것이 그렇게까지 지탄을 받아야 하는 일일까?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이 드라마의 팬으로서 시작도 하기 전부터 매서운 의혹의 눈초리에 시달리던 <나의 아저씨>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어졌다.

여주인공 이지안 (이지은 분)은 여섯 살 때부터 할머니와 단둘이 살게 된 조손가정의 어린 가장이다. 한 번도 제대로 된 어른의 도움을 받아본 적이 없는 데다가, 장애를 가진 할머니는 손녀를 제대로 돌볼 수 없다. 여기에 그녀들에게 남겨진 무시무시한 사채는 이미 불어날 대로 불어나서 원금은커녕 이자를 감당하는 것도 힘들다.

기초 생활 수급자이거나 차상위 계층이 분명해 보이는 그녀인데, 아무도 요양 보험이나 국가의 부양의무에 대해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다. 그녀가 의지하는 것은 그녀 또래로 보이는 컴퓨터 게임에 빠져있는 소년뿐이다. 이런 그녀에게 세상을 알려주는 '어른'이 나타났다.

"내가 불쌍해요? 나한테 그런 사람이 없었던 것 같아요? 있었어요. 김치도 가져다주고, 밥도 챙겨주고. 그런데, 네 번을 넘기지 못해요. 그들은 그저 (나의 불행을 통해서) 자기들이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던 것뿐이에요."
"착한 사람들이야. 적어도 네게 관심을 보였잖아. 세상엔 그런데 관심 없는 사람들도 많아."


2014년 2월 송파구에서 어머니와 두 딸이 동반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들은 자살을 결행하던 순간에도 '미안하다'라는 마지막 메모와 함께 70만 원을 집주인에게 전달하여 우리 모두를 부끄럽게 만들었었다. 그때도 대한민국 정부가 내놓은 방안은 '복지 정책에 대한 홍보 강화'였다.

송파 세 모녀가 받을 수 있는 충분한 복지제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제대로 홍보하지 않아서 비극적인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허탈하고 어이없는 문제 분석이었음에도 일순간 고개가 끄덕여진 것도 사실이다. 언제부터 이 나라는 세상의 혜택을 알아챈 사람들에게만 '살만한' 나라가 되었으며, 보호받아야 하는 것이 분명한 사람의 손을 잡아 줄 생각을 하지 않는 곳이 되어버린 것일까? 나는 죄인이 되었다.

<나의 아저씨> 속 지안의 삶은 고달프다. 병든 할머니와 세대를 분리하고 요양보호를 신청하면 문제는 훨씬 가벼워졌을 텐데, 그걸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다. 빚독촉을 구실로 폭력을 행사하던 사채업자를 견디지 못해 살인을 저질렀지만, 그 아들은 아버지의 악행을 그대로 지안에게 전달한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불편한 구애는 모두를 소름 끼치게 하지만, 이것은 현실이다.

지안에게만 유독 가혹한 세상은...

 <나의 아저씨>의 한 장면

<나의 아저씨>의 한 장면 ⓒ tvN


지안에게만 가혹한 세상은, 그녀에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은, 주인공의 해피엔딩을 극대화하려는 극적인 장치만은 아니다. 결국, 지안의 불행은 불편하다고 피할 수 있는 16부작 드라마가 아니라, 우리의 외면과 무관심이 만들어낸 현실이다. 이것이, 그저 그런 어른과 소녀의 사랑 얘기일 것이라고 예단하지 말고, 누구라도 좀 더 봐줬으면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녀에게 세상의 규칙을 알려주는 '어른'이 나타났다. 그 '어른'이 그녀가 세상을 살아오면서 울타리가 되어줄 수 있었을지도 모를 제도권의 어른들이 아니라, 힘들게 들어간 일터의 마흔 넘은 유부남이라는 건 안타깝지만, 그 사람뿐이었다. 게다가, 그녀 주변의 어른들은 각자의 욕망에 사로잡힌 채 위로는 할 생각이 없는 사람들뿐이었으니, 지안이 동훈을 알아본 것이 이상할 것도 없다. 그들은 서로를 알게 되면서 아픔을 알아챘고, 진심으로 '인간'이 전할 수 있는 위로를 전달한다. 인간은 원래 이렇게 살아가라고 만들어진 존재라고.

드라마에서 가장 비현실적인 공간은 '정희네'라는, 그 동네 '철없는' 어른들의 아지트이다. 삶에 지친 동훈네 형제들과 그들의 친구들은, 현실을 꾸역꾸역 견뎌낸 후 서로를 위로하기 위해 이곳으로 모여든다. 그들은 '실패한 삶'이라며 서로를 희화화하지만,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와 웃는 그들의 행복한 모습은 그대로 나의 행복으로 전해진다.

드라마의 비현실성은 '사회의 기준'으로 성공했다 여겨지는 사람들을, 애써 비참하게 그리는 것으로 극대화된다. 현실의 어둠, 그 가장 고통스러운 곳에 버려진 지안은, 행복을 유예하지 않고 자기 것으로 만든 그들을 통해 위로받는다. 나는 이들의 '위로'에 덩달아 마음을 놓는다. 지안을 버린 우리들의 세상이, 아직은 철없는 어른들을 그녀에게 보내 위로를 전달하게 되는 것만으로도 말이다.

'스누피와 그의 친구들'이라는 만화에는 어른은 한 사람도 나오지 않는다. 다만 사람보다 더 속이 깊은 동물들과 서툴지만 그들만의 방식으로 서로에게 위로가 되는 '아이들'이 등장할 뿐이다. 아이들은 종종 실수하지만 곧 다시 일어서서 서로에게 '기댈 수 있는' 어깨를 내어준다. 세상을 망치는 것은 혹시,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것으로 자신을 증명해 온 '나쁜 어른들' 아니었을까? <나의 아저씨> 속 철없는 어른들을 보고 있자니, 스누피네 친구들이 자연스럽게 연상되었다.

앞으로 이들의 관계가 어떻게 전개될지를 예측하는 것은 어리석다. 다만, 인간이 인간에게 허락하는 위로가, 나쁜 어른들에 의해 망쳐지지 않기를 기도할 뿐이다. 이제야 간신히 웃을 수 있게 된 지안의 미소를 보고 있자면, 삶을 챙기느라 외면했던 이웃의 불행에 대한 죄책감이 복잡하게 얽혀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

지안이 더 이상 맞지 않고, 더 많이 웃으며, 억겁의 윤회가 힘겨운 3만 살짜리 애어른이 아닌 스물둘의 젊은이로 살아가게 되길, 진심으로 응원한다. 그것이야말로 인간들의 세상에서 우리가 서로에게 기대한 '인간의 관계'가 아니겠는가? 적어도 이번 정부에서는 홍보 강화를 대책이라며 발표하지는 않을 테니, 같이 한 번 외쳐보자. 지안아, 파이팅!

오늘날의 영화읽기 <나의 아저씨> 인간에 대한 위로 스누피와 친구들 송파 세모녀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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