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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4월 25일 독도의용수비대 창설

1953년 한 해 동안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 어업지도선, 일반 어선의 독도 침범이 이어졌다. 해상 감시는 물론 독도에 상륙하여 조업하는 울릉도 어민을 조사하고 다시 오지 말라는 경고를 하기도 했다.

6월 28일에는 구두 경고도 부족해 권총과 사진기를 휴대한 30여 명이 독도에 상륙해 '시마네현은기군오개촌죽도'라는 영토 표목과 '본 섬은 일본의 영토이니 차후에는 본 섬에 침범 작업을 하면 일본 경찰에 인치(引致) 당한다"는 경고판을 세우기도 했다. 1953년 한 해 동안 20여 회 이상의 독도 침범이 있었다. 우리 정부가 세운 표식을 철거하고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표목을 세운 것도 여러 차례였다.

1953년 6월 28일, 일본 권총, 사진기를 휴대한 30여명이 동도에 상륙해 '도근현은지군오개촌죽도'라는 표목과 함께 경고판을 설치했다. 경고판에는 '본 섬은 일본의 영토이니 차후에는 본 섬에 침범 작업을 하면 일본 경찰에 인치 당한다"로 썼다. 우리 정부는 이때 독도의용수비대가 상주하고 있었고 일본인의 불법상륙은 불가능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1953년 일본의 불범 침범은 20여 회에 이른다.
▲ 일본 정부가 독도에 세운 경고판 1953년 6월 28일, 일본 권총, 사진기를 휴대한 30여명이 동도에 상륙해 '도근현은지군오개촌죽도'라는 표목과 함께 경고판을 설치했다. 경고판에는 '본 섬은 일본의 영토이니 차후에는 본 섬에 침범 작업을 하면 일본 경찰에 인치 당한다"로 썼다. 우리 정부는 이때 독도의용수비대가 상주하고 있었고 일본인의 불법상륙은 불가능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1953년 일본의 불범 침범은 20여 회에 이른다.
ⓒ 아사히구라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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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해가 바뀌었다. 그러나 일본의 선박 침범은 계속 이어졌다. 1월 13일, 이승만 대통령이 일본 선박이 평화선을 침범하면 엄단하겠다고 밝히고, 18일에 독도에 영토 표석을 설치했다.

2월 26일, 일본 정부는 자국민에게 독도 인광석 채굴권을 허가하고 광구세를 징수하기 시작했다. 비정기적인 감시나 순찰의 수준을 넘어 일본인을 상주시켜 실질적으로 점유하겠다는 의도가 분명히 드러나는 사건이었다.

독도를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 울릉주민에게 큰 위험으로 다가왔다. 4월 11일, 우리 정부는 일본 순시선이 독도 인근 해역을 침범하면 강경하게 대응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6·25 전쟁으로 인한 혼란 상황에서 독도를 지키기 위한 우리 정부의 노력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울릉도에는 주민 스스로 독도를 지켜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4월 3일, 울릉도 주민 이정윤씨는 내무부에 등대 설치, 무선 시설이 있는 감시 초소 설치, 해안경비정 보급을 요청하는 진정을 했다.

4월 25일, 1만5천 주민을 대표하는 관공서 등 각 기관장과 사회단체 대표, 각 면 의회 의원, 지방 유지 등이 도민궐기대회를 개최하고 독도방위대책위원회 결성을 결의했다. 더불어 독도에 상주하며 독도를 지킬 독도자위대 결성 결의와 운용계획도 수립했다.

"독도에 등대와 감시초소를 설치한 다음 일주일 교대로 50명씩 청장년을 소집해서 그중 20명은 독도에 직접 파견하여 등대와 감시초소에 근무케 하고, 무전사 1명씩을 교대로 근무케 하여 본 도와 경비선에 각각 상시 연락하도록 한다."

울릉도 1만 5천 도민은 독도자위대를 결성해서 한국의 영토인 독도를 지키기로 결의하였다 한다.
▲ 우리 영토를 수호, 독도자위대를 결성, 조선일보 1954.5.3 울릉도 1만 5천 도민은 독도자위대를 결성해서 한국의 영토인 독도를 지키기로 결의하였다 한다.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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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한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에 맞서야 하는 독도자위대는 중화기로 무장해야 했다. 그러나 무기를 구할 수 없었다. 민간인 무기 휴대 금지 조치 때문에 무기가 있더라도 민간인이 휴대할 수 없었다.

독도방위대책위원회는 정부에 무기 지원을 요청했고, 외교부를 통해 언론에 보도되었다. 5월 3일, 당시 백두진 총리는 내무부 장관에게 "훌륭한 조직"이라며 적극적인 지원을 지시했다. 독도자위대 결성을 결의한 지 8일 만에 이루어진 전격적인 조치였다.

독도자위대 결성 소식은 외무부를 통해 알려졌고 백두진 총리는 내무장관에게 협조를 지시했다.
"백 국무총리는 3일 백 내무부장관에게 울릉도 도민의 독도자위대 조직을 적극 후원하라고 지시하였다 한다. 백 총리는 동 지시에서 엄연한 독도의 주권을 확보하기 위해서 궐기대회를 열어 독도자위대를 조직하기로 한 그 결의야 말로 훌륭한 것이며..."
백두진 총리의 지시에 따라 울릉경찰서는 무기를 울릉군은 식량을 지원했다.
▲ 아주 훌륭한 조직이다. 백총리, 독도자위대에 협조 지시, 조선일보 1954.5.6 독도자위대 결성 소식은 외무부를 통해 알려졌고 백두진 총리는 내무장관에게 협조를 지시했다. "백 국무총리는 3일 백 내무부장관에게 울릉도 도민의 독도자위대 조직을 적극 후원하라고 지시하였다 한다. 백 총리는 동 지시에서 엄연한 독도의 주권을 확보하기 위해서 궐기대회를 열어 독도자위대를 조직하기로 한 그 결의야 말로 훌륭한 것이며..." 백두진 총리의 지시에 따라 울릉경찰서는 무기를 울릉군은 식량을 지원했다.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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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자위대원대는 김경호(26세), 김수봉(24세), 김영복(24세), 김영호(21세), 김용근(24세), 김재두(22세), 김현수(미상), 양봉준(23세), 이규현(28세), 이상국(27세), 이형우(22세), 정원도(24세), 하자진(27세), 홍순칠(25세), 황영문(20세) 15인으로 구성해했다. 서기종(24세) 대원이 8월 1일에 전역하고 귀향했고 16번째 대원으로 합류했다.

16명의 대원은 모두 6·25전쟁 참전 군인으로 별도의 훈련 필요 없는 용사들이었다.

독도자위대는 독도 경비를 시작하면서 독도의용수비대로 개칭했다. 독도의용수비대는 울릉경찰서에서 제공하는 경비선으로 독도에 도착, 서도 물골을 주둔지로 삼고 독도 상주 경비를 시작했다.

그러나 물골 입구가 울릉도를 향해 있고, 해안가에 있어 일본 순시선을 감시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독도의용수비대는 독도 주둔 며칠 후에 동도 정상에 간이 천막을 설치하고 새 주둔지로 삼았다. 새 주둔지는 러일전쟁 당시 일본 해군이 망루를 설치한 곳으로 주둔과 감시를 하는데 최적의 장소였다. 그러나 해안가에서 이동하는 통로가 없어 밧줄을 이용해 절벽을 기어 올라다녔다.

동해상의 러시아 함대를 감시하기 위해 1905년 8월 19일 준공했다. 일본은 망루를 설치하기 위해 시마네현 고시 40호로 독도를 시마네현에 편입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붉은 원이 독도의용수비대 주둔지다.
▲ 독도 망루 배치도 동해상의 러시아 함대를 감시하기 위해 1905년 8월 19일 준공했다. 일본은 망루를 설치하기 위해 시마네현 고시 40호로 독도를 시마네현에 편입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붉은 원이 독도의용수비대 주둔지다.
ⓒ 김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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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는 울릉주민의 삶의 터전이었고, 울릉주민의 희망과 기대 속에 출범한 독도의용수비대에게 독도는 반드시 사수해야 하는 고지였다. 백마고지에서 근무한 서기종 대원, 특히 백마고지에서 부상을 입은 이규현 대원에게 독도는 동해의 백마고지였다. 일본 선박이 접근하면 기관총과 박격포로 위협 사격을 했다. 일부 총탄이 순시선에 명중하기도 했다.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에 무장 병력의 철수를 요구했다. 한국 정부는 "한국 관리들에게 직책을 부여하는 것은 대한민국 관할권 내에서 정당하다. 한국 관리들이 어떠한 불법 행위에 대하여 동 섬 수호에 필요한 어떠한 행위도 이를 부득이 취하지 않을 수 없고 또 계속 취하리라는 것은 자명한 이치다"라며 더욱 강력한 대응조치도 가능하다는 견해를 밝혔다.

독도의용수비대 활동 이후 일본 선박의 해상 감시는 있었으나 독도 상륙은 완전히 제지되었다. 독도의용수비대의 역사적 의의가 여기에 있다.

1954년 12월 31일, 민간인으로 운영되던 독도의용수비대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정부는 기존 독도의용수비대원 16명 가운데 김영복, 김영호, 양봉준, 이규현, 이상국, 정원도, 하자진, 황영문, 서기종 등 9명을 울릉경찰서 경찰관에 특별 채용했다. 이후, 독도의용수비대는 해산하고 특별채용된 이들을 중심으로 독도경비대가 독도에 상주파견 된다.  

울릉경찰서 독도경비대 경비초사, 촬영 1956년 5월 28일
 울릉경찰서 독도경비대 경비초사, 촬영 1956년 5월 28일
ⓒ 김산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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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의용수비대 역사 왜곡의 과정

1965년 한일기본조약이 체결될 당시, 굴욕적 협약이라는 국내 비난에 박정희 대통령은 민간인으로 활약했던 독도의용수비대 대원들에게 훈장을 수여하기로 결정한다. 이때 서훈을 주도한 이는 울릉도 주민 출신 독도의용수비대 대장을 맡았던 홍순칠이다.  

독도의용수비대는 "1954년 6월부터 1956년 12월까지 30여 명의 대원이 활동"한 것으로 정의되었다. 30여 명의 대원이라고 했지만 11명만이 훈장을 받았고, 독도에 전혀 간 사실이 없는 김병렬, 유원식, 한상용 등 이른바 가짜 대원이 포함되었다.

독도의용수비대원 김경호, 김수봉, 김영복, 김영호, 김용근, 김재두, 김현수, 양봉준, 이규현, 이상국, 이형우, 하자진, 황영문 대원은 훈장을 받지 못했다. 대한민국 정부에 의한 독도의용수비대 역사 왜곡의 시작이었다.

대부분의 독도의용수비대원은 훈장을 받지 못했다.
▲ 청와대 방문 기념 대부분의 독도의용수비대원은 훈장을 받지 못했다.
ⓒ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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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996년 신해양법과 신한일어업협정으로 독도문제가 한일 양국의 외교 현안으로 떠오르며 독도의용수비대에 대한 2차 서훈이 이루어졌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서훈대상자와 유족을 청와대에 초청해 직접 훈장증을 전달하고 다과회를 열기도 했다.

이때 "활동기간 1953년 4월부터 1956년 12월까지 33명이 활동"으로 정의되었는데, 1966년에 훈장을 받은 11명은 법에서 금지하고 있는 중복 서훈이었다(같은 공적으로 중복서훈을 줄 수 없다는 것).
공적조서의 미역채취 및 어로작업은 독도의용수비대와 무관하다. 홍순칠은 1955년~1956년에 걸친 미역채취 사업 기간을 독도의용수비대 활동기간에 포함하고, 작업에 참여했던 동료를 독도의용수비대 대원에 포함했다.
▲ 홍순칠 공적요약서 공적조서의 미역채취 및 어로작업은 독도의용수비대와 무관하다. 홍순칠은 1955년~1956년에 걸친 미역채취 사업 기간을 독도의용수비대 활동기간에 포함하고, 작업에 참여했던 동료를 독도의용수비대 대원에 포함했다.
ⓒ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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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과 1996년 서훈 당시, 공적을 확인하는 기초 조사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서훈은 법에서 정한 절차에 따라 공적을 확인해야 하고, 생존자의 면담 조사는 반드시 거쳐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대원은 서훈 당일 아침에 해당 지역 보훈지청으로부터 서훈 사실을 통보받았다.

독도의용수비대동지회와 독도수호대는 2005년부터 국가보훈처를 상대로 병적증명서, 경찰 경력증명서, 경상북도 경찰국 조사보고서, 외무부 발행 독도문제개론, 한일 왕복 외교 문서, 국가기록원 소장 공문 등을 제시하며 "3년 8개월, 33명"이 잘못되었다며 재정립을 요구했다.

그러나 국가보훈처는 "제시한 자료는 객관적 반증이 되지 않는다"며 재정립 요구를 거부하고 있고, 공적조서 작성 과정과 서훈과정 그리고 내용에 문제가 없다는 주장만 반복했다.

2차에 걸친 서훈과 독도의용수비대지원법 제정은 독도문제가 한일외교 현안으로 등장하고, 이와 비례해 우리 정부의 소극적 대응을 비난하는 여론이 비등할 때 이루어졌다. 대통령과 국회의원이 독도를 정치적 희생물로 이용하면서 16명의 독도의용수비대 대원은 '3년 8개월'이라는 틀에 갖혀 거짓 인생을 살아야 했고, 거짓말쟁이라는 비난을 들어야 했다.

"독도의 영웅 독도의용수비대"는 16명의 대원에게 시지프스의 바위가 되어 영원한 고통을 안겨주고 있을 뿐이다. 4월 25일이 고통의 날인 이유다.

독도의용수비대 창설 기념일은 고통의 날

올해 4월 25일은 독도의용수비대 창설 64주년이 되는 날이다. 독도의용수비대는 1954년 4월 25일 1만5천 울릉주민이 독도를 스스로 지키기 위해 결성하고, 정부에서 무기와 식량을 지원하면서 탄생했다.

그러나 청와대, 국가보훈처, 경찰청, 경상북도, 울릉군, 동북아역사재단(이사장 김도형), 독도의용수비대기념사업회(회장 심재권 의원) 등 독도의용수비대와 관련한 공공기관 그 어디에도 1954년 4월 25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4월 25일을 역사에서 지운 대한민국 정부의 원죄와 원죄를 감추기 위한 거짓의 역사가 점철되어 있기 때문이다.

국가보훈처 주관으로 설립된 독도의용수비대기념사업회는 2013년에 독도의용수비대 활동기간을 규명하는 연구용역을 수행했고, '독도의용수비대는 1954년 4월 25일 창설, 1954년 12월 31일 해산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이들은 연구용역 보고서를 아직까지 공개하지 않고 있다.

독도의용수비대 대원에게 4월 25일은 국가에 의해 인생 이력이 날조되고, 수십 년 동안 강요된 거짓 인생을 살고 있다는 현실을 실감케 하는 고통의 날이다. '국가유공자가 되기 위해 공적을 허위로 과장하는 거짓말쟁이'라는 비난이 더욱 커지는 날이다.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1950년대 대한민국 독도경비사가 부정되고, 목숨을 걸고 지키려 했던 독도의 국제법적 지위가 부정되는 치욕의 날이다.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독도의용수비대 활동 기간 8개월(1954.4.25.~1948.12.31.)이 3년 8개월(1953.4.20.~1956.12.31.)로 왜곡되고, 대원 16명의 인생 이력이 3년 8개월에 맞춰 조작되었기 때문이다.

현재까지도 독도의용수비대에 대한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 입장은 '3년 8개월 동안 33명이 활동'이다.

울릉경찰서 독도순라반 최헌식 경사(가운데 모자)가 헤쿠라호에 승선하여 해상보안천 관리(왼쪽)를 만나 철수를 요구하고 있다.
▲ 1953년 7월 12일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 헤쿠라호 격퇴 울릉경찰서 독도순라반 최헌식 경사(가운데 모자)가 헤쿠라호에 승선하여 해상보안천 관리(왼쪽)를 만나 철수를 요구하고 있다.
ⓒ 아사히구라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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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의용수비대동지회 서기종 회장은 1948년 6월 27일에 국방경비대에 입대하고 1954년 8월 1일 전역해 귀향했다. 군 복무 중이던 1953년 6월 25일에 무공훈장을 받았다. 1954년 12월 31일 울릉경찰서 경찰관에 특채되어 독도경비대원으로 근무하고 1956년 4월 24일 사직했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1953년 4월 20일부터 1954년 8월 1일까지의 군 경력과 경찰 근무 경력 전부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서기종 회장은 수년째 국가보훈처 등 국가기관에 자신의 인생 이력을 수정해달라는 요청하고 있다. 자신의 독도의용수비대 공적 활동 기간 '3년 8개월'을 '5개월'로 줄여달라는 것이다.

허위의 공적을 만들어 국가유공자가 되려는 시도가 빈번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에서 서기종 회장의 요구는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서기종 회장은 단호하다.
'기간은 중요하지 않다. 3년 8개월은 거짓이고 나한테 5개월이 진실이다. 단 하루라도 진실한 독도의용수비대원이고 싶다'


병적증명서 입영년월일 (1948.6.27), 전역년월일 (1954.8.1), 경력증명서 근무기간 (1954.12.31 부터 1956.4.23까지) 울릉경찰서에 특채된 9명의 근무 시작일은 모두 동일하고 퇴임 일자는 서로 다르다.
청와대 등 정부기관은 병적증명서와 경력증명서가 증명하는 서기종 회장 등 9명의 경력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 서기종 회장의 병적증명서와 경찰 경력증명서 병적증명서 입영년월일 (1948.6.27), 전역년월일 (1954.8.1), 경력증명서 근무기간 (1954.12.31 부터 1956.4.23까지) 울릉경찰서에 특채된 9명의 근무 시작일은 모두 동일하고 퇴임 일자는 서로 다르다. 청와대 등 정부기관은 병적증명서와 경력증명서가 증명하는 서기종 회장 등 9명의 경력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 서기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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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종 회장의 진실규명을 위한 노력

서기종 회장이 독도의용수비대 진실 규명을 주장한 때는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독도의용수비대동지회와 함께 국가를 상대로 진실 규명 활동을 시작한 때는 국가보훈처를 방문한 2005년 8월 16일 부터였다. 국가보훈처는 2016년 1월부터 독도의용수비대와 관련한 게시물을 삭제하기 시작했고, 3월부터 진실 규명을 말하지 못하게 '독도' '독도의용수비대'를 홈페이지 금지어로 등록했다.

2017년 10월 31일, 서기종 회장은 문재인 대통령에게 인생 이력을 되돌려 달라고 진정하는 호소문을 제출했다. 그러나 진정서의 내용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하고도 정부는 현재까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다.

서기종 회장은 "지난해 11월 청와대는 내 호소문을 접수하고, 외부인사로 구성하는 위원회를 구성해 진실을 밝히겠다고 했다, 그러나 수개월이 지났지만 후속 조치가 전혀 없다"고 토로했다.

서기종 회장의 호소문은 청와대 사회혁신수석실에서 담당했다. 2017년 11월 17일, 청와대 비서실은 독도의용수비대동지회 사무국에 전화로 "호소문을 검토한 결과 대부분이 사실로 보여진다"며 추가 자료 제출과 면담을 요청했다. 이후, 11월 20일, 청와대 연풍문에서 면담이 이루어졌다. 11월 23일, 청와대 측은 "국가보훈처·국가기록원을 통해 관련 자료를 조사하고 진정서의 내용이 사실이라고 확인했다"며 문재인 대통령이 중국 방문(12.13~16)을 마치고 돌아오면 보고겠다고 전했다.

이후 몇 차례의 전화 면담이 있었고 이때 청와대는 "역사바로잡기의 일환으로 정확해야 한다. 재조사를 위한 위원회는 관련 기관의 추천을 받아 구성해야 하고, 국가보훈처에 맡기지 않고 청와대에서 직접 할 예정이다. 진정 건은 역사 재정립에 포커스가 있다"며 진실 규명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울릉도 현장조사도 마쳤다. 그러나 2018년 1월 들어서 "큰 사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활동 기간에 대한 이견도 있고 여러 문제가 있다"며 태도를 바꿨다.

청와대 비서실은 2017년 11월부터 담당했던 업무에 대한 회신을 해당 민원과 무관한 경호처에 이송했고, 민원 이송에 이유를 묻는 경호처의 문의에 회신하지 않았다. 경호처는 국가보훈처로 이송했다.
▲ 국민신문고 민원 처리 결과 회신 청와대 비서실은 2017년 11월부터 담당했던 업무에 대한 회신을 해당 민원과 무관한 경호처에 이송했고, 민원 이송에 이유를 묻는 경호처의 문의에 회신하지 않았다. 경호처는 국가보훈처로 이송했다.
ⓒ 김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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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월 5일, 서기종 회장은 국민신문고를 통해 진정 건의 처리 경과를 문의했고 2월 19일 청와대 비서실에서 접수했다. 2월 22일, 비서실에서는 "해당부처의 추가 민원으로 파악되어 이송합니다"라며 해당 민원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경호처에 민원을 이송했다. 경호처는 비서실에 민원의 조정을 요청했으나 비서실에서는 아무런 회신도 하지 않았고, 경호처는 국가보훈처로 이송했다.

국가보훈처는 청와대에 재이송하는 절차가 없다며 재이송을 거부했고, 현재 이 민원은 미결인 상태로 남아 있다. 민원처리에 관한 법률에서는 '행정기관은 민원신청을 받았을 때 그 접수를 보류하거나 거부할 수 없으며 접수된 민원을 부당하게 돌려보내서는 안 된다'고 정하고 있다.

2018년 3월 1일, 문재인 대통령은 3.1절 기념사에서 독도를 얘기했다.

"독도는 일본의 한반도 침탈 과정에서 가장 먼저 강점당한 우리 땅입니다. 우리 고유의 영토입니다. 지금 일본이 그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반성을 거부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울지마 독도야. 독도는 작은 섬이 아니라 대한민국입니다.
▲ 2012년 10월 25일, 당시 문재인 대통령 후보 블로그 울지마 독도야. 독도는 작은 섬이 아니라 대한민국입니다.
ⓒ 문재인 대통령 블로그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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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독도에서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는 독도의용수비대 및 1950년대 독도경비사 재정립이다. 2005년 노무현 대통령의 지시로 설립된 바른역사정립기획단(현 동북아역사재단)은 설립된 지 13년이 지난 현재까지 1950년대 독도경비사 연구를 단 한 차례도 수행하지 않았다.

대한민국 독도역사에서 1950년대 독도경비사는 암흑기이고, 국가의 폭력으로 왜곡된 체 방치되어 있다. 고작 60여 년의 역사도 바로 잡지 못하는 대한민국이 독도의 주권국이라고 자부할 수 있는지 대통령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1950년대 독도경비사의 중심에 독도의용수비대가 있고, 그 중심에 독도의용수비대 창설 기념일 4월 25일이 있다. 독도의용수비대 대원이 창설 기념일 4월 25일을 기쁘게 맞이하는 그날을 간절히 기대한다.

덧붙이는 글 | 독도수호대 홈페이지와 카페에 게시합니다.



태그:#독도, #독도의용수비대, #독도자위대, #독도방위대책위원회, #서기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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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수호대 대표, 문화유산 해설 기획과 문화유산 보존활동을 하고 있다.

오마이뉴스 장지혜 기자 입니다. 세상의 바람에 흔들리기보다는 세상으로 바람을 날려보내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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