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엄마가 병에 걸렸다. 작년 이맘때쯤 엄마는 나에게 섬으로 떠나고 싶다고 말했다. 섬으로 들어가서 없었다는 듯이 살다가 흔적도 없이 떠나고 싶다고 했다. 엄마가 이야기하는 섬이 다른 것을 의미하는 거 같아서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 후 1년 동안 온 가족이 엄마의 병을 고치려고 노력했다. 가족여행도 갔고, 좋다는 약은 다 지어오고, 병원도 여러 군데 다녔다. 엄마는 아직도 병에 걸린 상태다. 딱히 아픈 곳은 없는데 수면제 없이는 잠을 못 자고, 식욕도 느끼지 못한다.

살은 갈수록 빠지고 이전에 엄마에게 행복을 줬던 그 어떤 것도 엄마를 다시 행복하게 만들지 못했다. 어떤 병원에서는 엄마의 병이 갱년기 우울증이라고 하고, 어떤 병원에서는 스트레스라고 했다. 요새 들어 내가 생각하는 엄마의 병명은 '엄마병'이다.

영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2011)의 한 장면. 극중 '엄마'(배종옥 분)는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와 무심한 남편과 아이들 모두를 책임진다. 그런데 분명 슬픈 이야기임에도, 슬픔보다는 분노가 이는 건 왜일까?
 영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2011)의 한 장면. 극중 '엄마'(배종옥 분)는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와 무심한 남편과 아이들 모두를 책임진다. 그런데 분명 슬픈 이야기임에도, 슬픔보다는 분노가 이는 건 왜일까?
ⓒ NEW

관련사진보기


엄마는 2녀 1남 중 맏딸로 태어났다. 삼촌이 셋째니까 아들을 낳기 위해 첫째인 우리 엄마와 둘째인 이모를 낳은 것이다. 엄마는 탄생의 순간부터 누군가의 염원을 저버리며 태어난 것이다. 장녀로 태어난 엄마는 그 시절의 여성이 그러하듯이 비슷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적당한 나이에 결혼해 남들처럼 딸 하나 아들 하나를 낳았고 비슷하게 살면서 딸로서, 아내로서, 엄마로서 살았다. 아빠는 내가 유치원에 들어갈 무렵 사업에 크게 실패했다. 엄마는 다니던 은행을 그만두고 온갖 일을 해야 했다. 그 무렵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각각 중풍과 치매로 쓰러졌다.

세월이 흘러 엄마가 부양하던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돌아가셨다. 동생과 나는 어느덧 대학교를 졸업했다. 아빠는 조만간 일을 그만두고 귀농을 할 예정이다. 짐들이 하나씩 하나씩 벗겨지니 지난 삶이 이제야 고단함으로 몰려왔다. 고단함은 그렇게 병이 되었다.

엄마의 희생과 사랑을 먹고 자란 나는 이제와 엄마를 생각한다. 그녀가 덜 좋은 딸이었다면, 덜 좋은 아내였다면, 덜 좋은 엄마였다면 그리고 그래도 괜찮은 사회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한다. 지난날의 엄마의 희생과 인내가 누군가로부터 강요받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10년 전 읽었던 권정생의 <몽실 언니>가 떠올랐다. 전쟁과 가난이라는 가혹한 환경에서 동생들을 돌보며 희생하는 몽실 언니의 이야기가 감동적이었던 책이다. 그런데 꼭 10년 만에 다시 읽은 <몽실 언니>는 그때와는 다른 감정으로 읽혔다.

권정생 선생님이 쓴 장편동화, <몽실언니>
 권정생 선생님이 쓴 장편동화, <몽실언니>
ⓒ 창비

관련사진보기


그녀의 희생과 인내와 사랑은 가부장제 사회가 만든 억압이자 강요이자 족쇄였다. 이혼과 재혼을 한 부모님 새어머니가 남겨둔 동생, 병든 아버지, 친어머니가 낳은 동생들까지 모두 몽실에게 짐이자 고통이었다. 하지만 인내와 희생을 강요하는 사회구조에서 몽실은 그 모든 것들을 숙명처럼 받아들인다.

"몽실아, 네 동생은 틀림없이 아들일 게다. 엄마가 낳거든 잘 업어 키워라, 응?"
"......"
"왜 대답이 없니?"
"잘 키우겠어요." (p.83)

몽실의 아버지는 엄마가 집을 나가고 얼마 안 있어 재혼을 한다. 새어머니가 임신을 하자마자 아버지는 몽실에게 강요 섞인 약속을 받아낸다. '아들'일 것이라고 짐짓 기대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 아들로 태어나지 않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고민이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동생을 잘 키우라는 말은 딸로 태어난 몽실에게 가부장제가 원하는 여성의 모성과 순종을 장착시키는 말이 된다. 몽실이 대답이 없자 재차 질문을 하고, 나중에서야 시원찮은 대답을 하지만 몽실은 "마음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다"라고 생각한다.

몽실은 이후 새어머니가 낳은 동생뿐만 아니라 친어머니가 낳은 동생들 그리고 아픈 아빠까지 모성적이고 희생적인 '착한 여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후 배우자 또한 몸이 불편한 곱추를 만난다. 어린 몽실은 동생뿐만 아니라 어머니, 아버지 더 나아가 자신의 배우자까지 보살피는 역할을 부여받은 것이다.

"어머! 저건, 저건, 갓난아기야!" 어떤 아주머니가 기겁을 하며 소리쳤다. "검둥이 새끼구나. 어느 나쁜 엄마가 내다 버린 거야!" 또 한 사람의 남자가 화난 소리로 말했다. 검둥이 갓난아기는 조그만 까만 주먹을 꼭 쥐고 줄곧 울었다. 몽실은 너무 뜻밖이어서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p.189)

또한, 몽실의 희생은 가족에게만 한정되지 않는다. 마을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공비들이 춥고 배고플까 가슴 아파하기도 하고, 양공주가 버린 검둥이 아기에게 돌팔매질을 하자 자신의 몸으로 감싸 필사적으로 보호하기도 한다.

결국 아기가 죽자 몽실은 앓아 눕는다. 몽실이 인류애적인 사랑을 가진 인물이라 그런 것일까. 여성에게 부여된 모성은 가족을 넘어 이웃과 우리 사회까지 뻗어 있다. 모성이라는 이름 하에 가족을 넘어 이웃까지 사랑하는 모습을 여성에게 부여한다.

'착한여자'에 대한 사회의 요구는 오늘날도 그대로다. 남성이 범죄를 저지르거나 반인류적인 행위를 했을 때와 여성이 똑같은 행위를 했을 때 다른 반응을 보이는 것 말이다.

"오빠한테 지난번 소식이 왔는데 집배원 생활이 더없이 보람있다는군요. 모두가 언니 덕분이어요. 언니가 아니었더라면 오빠도 영원히 비뚤어진 인생을 살다 죽었을 거여요." (p278)

난남은 현관문 기둥을 붙잡았다. 뜨거운 눈물이 그제서야 볼을 타고 내려왔다. "언니... 몽실 언니..."(p286)

몽실의 희생과 사랑은 보상이라도 받듯 동생들에게 인정받는 언니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몽실은 좋은 딸이자, 좋은 언니이자, 좋은 부인이자, 좋은 엄마였다. 그러면 몽실은 행복했을까? 우리 엄마는? 엄마는 주변에서 칭찬이 자자한 사람이었다.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의 역할을 잘 수행했기 때문이다.

몽실언니와 우리 엄마가 덜 좋은 사람이었다면 어땠을까. 덜 좋은 여성이어도 괜찮은 사회였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엄마는 지금처럼 아프지 않았을 것이고, 몽실은 조금은 더 행복한 삶을 살다 죽었을 것이다.


몽실 언니 - 권정생 소년소설, 개정판

권정생 지음, 이철수 그림, 창비(2012)


태그:#몽실언니, #엄마병, #페미니즘, #권정생,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
댓글3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