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엄마는 아파서 누워있을 자유도 없어!" 엄마들끼리 모이면 흔히들 주고받는 말입니다. 더 이상 이 말이 사실이 아닌 세상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엄마들도 돌봄받는 세상을 위해 지극히 개인적인 독박돌봄노동 탈출기를 시작합니다. [편집자말]
아이를 키우면서 생긴 갈등들이 오래된 문화와 사회의 구조적 문제에서 연유한 것임을 깨달은 남편과 나는 이대로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세상을 바꿀 수는 없겠지만, 우리의 일상이라도 바꿔보기로 했다(이전 기사 : 술 먹고 쓰러진 남편... 가부장제가 잘못했네).

우선 '돕다'라는 표현을 쓰지 않기로 했다. 나는 '도와줘' '이것 좀 해줘'라는 말 대신 이것 좀 '같이 하자'라는 말을 쓰기로 다짐했다. 남편 역시 '도와줄게'라는 표현은 자제하고 '내가 할게'로 바꾸어 말하기로 했다.

집에서 남편의 눈길을 사로잡던 텔레비전도 없애기로 했다. 아이가 울어도 모를 만큼 남편을 유혹했던 우리 집 텔레비전은 그 무렵 여름 장마철에 고장이 났다. AS 견적이 생각보다 많이 나온 데다, 어린 시절 과도한 TV 시청이 좋지 않다는 육아서적들의 충고에 남편은 선뜻 TV를 없애는 데 합의해줬다. 그리고 나의 사회적 정체감을 찾기 위해 도우미 이모님을 섭외하는 대로 공부와 일을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진정으로 같이 하는 것

JTBC 드라마 <이번주 아내가 바람을 핍니다>에서 송지효가 연기한 정수연은 워킹맘의 고충을 잘 보여준다.
 JTBC 드라마 <이번주 아내가 바람을 핍니다>에서 송지효가 연기한 정수연은 워킹맘의 고충을 잘 보여준다.
ⓒ JTBC

관련사진보기


몸에 배어 버린 익숙함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우리 둘 다에게 쉽지 않았다. 먼저, '같이 하자'와 '내가 할게'라고 말하게 되면서 남편은 좀 더 적극적이 되었고, 나 역시 짜증을 덜 내게 됐다.

남편은 일찍 퇴근한 날이나 휴일엔 빨래를 널기도 하고 아이의 목욕을 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내가 부탁하는 것에 한해서만 움직였다. 아이의 옷을 입힐 땐 어디서 어떤 옷을 꺼내서 입히라고, 외출을 준비할 땐 가방엔 무엇과 무엇을 넣으라고 구체적으로 알려주어야만 남편은 해낼 수 있었다.

여기서 '같이 하는 것'은 가사와 육아를 부부가 똑같은 양으로 나누어 하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아내가 아이와 함께 집에 있는 시간이 훨씬 많다면 아내가 가사와 육아에 시간을 많이 쓰는 건 당연하다. 진정으로 함께한다는 것은 시간과 노동의 양이 아니라 가족 구성원의 안녕에 관심을 가지고, 가정을 가꾸는 일에 부부가 동등한 책임감을 가지는 마음과 태도를 의미한다.

퇴근 후 아내의 하루가 어땠는지, 아이는 무엇을 했는지 관심 갖고 물어봐주는 것. 아내 혼자서 식사준비 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고 함께 만들어 먹고 치우고 같이 쉬는 것. 집 안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스스로 찾아서 사용하고 정리하는 것.

아이의 문제에 대해 '알아서 해결해'라고 하지 않고, 함께 의논해 주는 것. 아내가 마음 편히 집을 비울 수 있게 기본적인 가사와 식사, 아이를 돌보는 일을 할 줄 아는 것. 이런 것이 돌봄에 책임을 지고 함께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당시 일주일에 3번 이상 밤 늦게 퇴근하거나 회식을 가야했던 남편은 이런 것들을 알아갈 여유가 전혀 없었다.

즐거울 땐 아빠, 힘들 땐 엄마

엄마가 사회적 정체감을 찾아가는 일은 여기저기에 대단히 '미안한' 일이었다
 엄마가 사회적 정체감을 찾아가는 일은 여기저기에 대단히 '미안한' 일이었다
ⓒ 롯데그룹 CF

관련사진보기


TV를 없앤 건 잘한 일이었다. 집에서 시선을 고정할 텔레비전이 사라지자, 아이와 종일 집안에서 놀아주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남편은 금세 깨달았다. 우리는 주말마다 나들이를 했다. 즐거운 추억들이 쌓여가자 아빠가 퇴근해도 그다지 반기지 않았던 아이는 아빠를 좋아하게 됐고, 남편 역시 아빠됨의 기쁨을 누리는 듯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아이가 즐겁고 행복할 때는 아빠로서 함께 했지만, 울거나 고집을 피우며 떼를 쓸 때 남편은 종종 그 상황을 외면했다. 아이는 유난히 잠투정이 심한 편이었는데 잠투정이 시작되면 남편은 그냥 그 자리를 떠나 다른 방으로 갔다. 몇 시간씩 보채는 아이를 달래는 건 오로지 엄마인 내 몫이었다.

다시 공부와 일을 시작한 건 나의 숨통을 틔워주었다. 엄마가 되기 전엔 프로젝트 발표며, 논문 쓰는 일, 상담을 하고 보고서를 쓰는 일이 무척이나 어려웠다. 그런데 아이 엄마가 되고 다시 시작한 일과 공부는 예전과는 완전히 달랐다.

논문 쓰는 일도 즐거웠고, 발표를 하는 일도 전혀 긴장되지 않았다. '아기도 낳고 키웠는데 이것쯤이야!' 이런 마음이 절로 들었다. 하지만, 이렇게 기쁜 마음으로 일하고 공부할 수 있는 건 이모님이 아이를 봐주는 날 뿐이었다.

이모님이 오시지 않는 주말에 열리는 학회에 참여해야 하거나 저녁 늦게까지 모임이 있는 날엔 여기저기 수소문해 아이를 돌봐줄 사람을 구하는 것은 늘 내 몫이었다. 심지어 내가 미리 예정된 일정이 있어 남편이 아이를 돌보기로 되어 있던 날에도, 남편에게 갑작스런 약속이 생기면 그 뒷수습은 내가 해야 했다.

이럴 때마다 난 예정된 일정을 취소하면서 미안해했고, 시댁 혹은 이웃에게 읍소하듯 아이를 부탁하면서 또 미안해했다. 엄마가 사회적 정체감을 찾아가는 일은 여기저기에 대단히 '미안한' 일이었다.

엄마가 사회적 정체감을 찾기 위해 감당해야 할 것들

아이가 어린이집에 들어가게 되면서 이모님은 더 이상 오시지 않게 되었다. 나는 아이가 어린이집에 있는 동안에는 일과 공부를 병행했고, 아이의 하원시간에 맞춰 퇴근해 오후에는 육아와 가사에 전념했다. 24시간 아이만 돌볼 때보다는 훨씬 나은 삶이었지만, 늘 시간에 쫓겼고 동시에 여러 가지 일을 해야 했다.

아침 시간엔 남편과 아이보다 1시간 정도 먼저 일어나, 나의 출근준비를 했다. 씻고 화장하고 옷까지 다 입은 후에 아침 식사 준비를 하면서 남편을 깨웠다. 남편이 일어나서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보며 스마트폰으로 아침 뉴스를 확인하는 동안, 나는 남편의 와이셔츠와 양말을 챙겨 두었다. 동시에 아이를 깨우고 씻기면서 아침 식사를 차렸다.

남편은 차분하게 아침을 먹고 출근했지만, 나의 아침은 전쟁같았다. 땀이 날 정도로 바쁘게 움직이다 사무실에 도착하고 나면 그제서야 '쉬는 것' 같았다. 퇴근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퇴근과 동시에 아이를 픽업해 집에 오면 그 때부터 아이와 놀아주면서 동시에 청소와 빨래를 했고, 저녁 식사 준비를 했다. 저녁을 다 먹고, 아이를 씻기고, 소파에 앉아서 한 숨을 돌릴 때쯤엔 대부분 밤 9시가 넘어서였다.

나는 자꾸만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왜 아침엔 나만 바빠야 하는지, 퇴근 후 집에서 나는 왜 쉴 수 없는지 친정엄마의 바빴던 삶과 오버랩 됐다. '내 아이'가 아니라 '우리 아이'인데 왜 아이를 부탁하면서 미안해하고 아쉬운 소리를 하는 것은 늘 나여야만 하는지 답답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남편만큼 돈을 벌지도 못하면서 사회적 정체감을 찾는다는 이유로 가족의 일상을 불편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가사도 육아도 더 잘해내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그쳤다.

머리로만은 되지 않는 변화

이 시기 우리 부부의 삶을 돌아보면 머리로 이해하는 것을 행동으로 옮긴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문제를 인식하는 것은 머리가 하는 일이다. 하지만 이를 고쳐나가는 건 이런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심리적 변화가 함께 있어야 가능한 법이다.

남편과 나는 다른 면에서 어려움을 느꼈다. 남편은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정체감을 찾고 싶어했지만 몸담고 있던 조직은 이를 위한 시간을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변화를 절실히 원하면서도, 내 마음에 깊이 새겨진 가부장 사회에서의 아내와 엄마의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이렇게 남편은 어쩌지 못하는 조직생활에, 나는 어쩌지 못하는 내 마음에 피로감만 쌓아가고 있는 사이 어느덧 아이는 초등학생이 되었다.

아이의 소풍 도시락까지 싸느라 더 바빴던 어느 날 아침이었다. 정신없이 준비해 아이를 보내고 출근을 하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 아이가 아빠가 되어서도 이 세상이 변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지금과 같은 환경에서 아이가 계속 자라게 되면, 결국 아이도 가부장적 문화를 답습하게 될 것이 뻔했다. 우리처럼 벗어나고 싶어 노력을 해도 벗어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가슴이 쿵쾅거렸다. 변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더 조급해졌다. 그러던 차에 남편의 캐나다 근무가 결정됐다.

(다음 회에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필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게재할 예정입니다.



태그:#가부장제, #독박돌봄, #페미니즘, #육아, #가사
댓글10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글쓰는 상담심리사. 심리학, 여성주의, 비거니즘의 시선으로 일상과 문화를 바라봅니다.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들이 '있는 그대로 존중받기'를 소망합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