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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4월 27일 금요일. 제3차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는 역사적인 날이다. TV에서는 뉴스특보가 계속 보도되고 인터넷에서도 실시간 속보들이 쏟아진다. 새로운 역사가 쓰이고 있는데 그 지점을 같이 통과하고 있는 평범한 소시민은 무엇을 해야 할까.

제2차세계대전의 한 가운데에서 평범한 학생이었던 안네는 일기를 써서 자신의 일상을 기록했다. 그것은 다른 어떤 거창한 역사책보다 소중한 유산이 되었다. 나치가 유대인을 어떻게 탄압했는지, 몇 명이 죽었는지 숫자까지 정확하게 기술되어 있는 역사책보다 안네의 일기가 당시의 상황을 더 절실하게 느끼게 해 준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The personality is the political.)'란 말은 이럴 때에 적용하는 것일 거다.

전혀 특별하지 않은 소시민이 평범함을 내세워 오늘을 기록해보고자 한다. 2018년 4월 27일 평범한 소시민은 이 날은 어떻게 보냈는가를 궁금해 하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대통령, 정치인, 언론인이 오늘을 어떻게 보내는지는 쉽게 알 수 있으니까 말이다. 역사 강사인 최태성은 sns에서 오늘은 교과서에 기록되는 날이라며 오늘의 일상을 기록해야 한다고 하기도 했다.

한국사 강사 최태성의 sns 내용
 한국사 강사 최태성의 sns 내용
ⓒ 최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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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마침 회사를 쉬는 날이다. 남북정상회담과 쉬는 날의 상관관계는? 전혀 없다. 회사를 나가지 않는 날이 하필 남북정상회담 하는 날인 것은 좋은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다. 일단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TV를 켠다. 대통령이 판문점 가기 전, 가는 중, 도착 모든 것을 생중계한다. 회사를 나가지 않아 편하게 생중계를 지켜보지만 회사를 나갔어도 마찬가지였을 것 같다. 오히려 다 같이 생중계로 보면서 이야기 한다고 더 재밌지 않았을까. 나도 한 마디씩 논평을 하고 싶은데 같이 할 사람이 없어 아쉽다. 친구에게 문자를 보낸다.

"보고 있냐? 두근두근.ㅋㅋㅋ"
"응. 몰래 눈치 보면서 라이브로 생중계 봄.ㅋㅋㅋㅋ"

기다림 끝에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나타났다. 밝게 웃으면서 문재인 대통령을 향해 걸어온다. 두 정상이 악수를 한다. 그리고는 서로 잠깐 이야기하더니 군사분계선을 북측으로 같이 넘어갔다가 남측으로 같이 넘어온다.

군사분계선 넘는 남북 정상. 2018 남북정상회담이 열린 27일 오전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손을 잡고 군사분계선(MDZ)을 넘어오고 있다.
 군사분계선 넘는 남북 정상. 2018 남북정상회담이 열린 27일 오전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손을 잡고 군사분계선(MDZ)을 넘어오고 있다.
ⓒ 한국공동사진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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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이 났다. 주책없이. 이산가족이 가족 중에 있는 것도 아니고, 평소 소원이 통일이었던 것도 아니고, 남북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했던 것도 아닌데 이 눈물은 무슨 의미인가. 무엇에 대한 감동일까. 형제와 같은 남과 북이 만났다는 것에 대한 감동? 세계 유일의 분단 국가라는 오명을 벗을 수 있겠다는 희망? 평화에 대한 벅찬 기대? 모르겠다. 알 수 없다. 하지만 나처럼 알 수 없는 눈물을 흘린 사람이 전국에 아주 많을 것 같긴 하다.

"힘든 높이로 막힌 것도 아니고 여기까지 역사적인 이 자리에 오기까지 11년이 걸렸는데, 오늘 걸어오면서 보니까 왜 이렇게 오래 걸렸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역사적인 이런 자리에서 기대하는 분도 많고 아무리 좋은 합의나 글이 나와도 발표돼도 그게 제대로 이행되지 못하면 오히려 이런 만남을 갖고도 좋은 결과에 기대를 품었던 분들에게 더 낙심 주지 않겠습니까. 앞으로 정말 마음가짐을 잘하고 정말 우리가 잃어버린 11년 세월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정말 수시로 만나서 걸리는 문제를 풀어나가고 마음을 합치고 의지를 모아서 그런 의지를 갖고 나가면 우리가 잃어버린 11년이 아깝지 않게 우리가 좋게 나가지 않겠나 그런 생각도 하면서 만감이 교차하는 속에서 한 200m를 걸어왔습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말을 이렇게 길게 들어본 것은 처음이다. 그의 모습을 이렇게 찬찬히 오랫동안 들여다 본 것도 처음이다. 지금은 북한 사람을 도깨비로 표현하는 시대도 아니고, 뉴스를 통해 가끔 접하긴 하지만 그래도 왠지 우리와 다를 것 같다고 생각했나 보다. 당연한 것인데도 그의 모습과 말이 우리와 다르지 않아 놀랐다.

개그 프로그램에서 코미디언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우스꽝스럽게 희화화하는 모습에만 익숙했지 이렇게 똑같은 말을 하고, 웃고, 걷는 모습이 오히려 신기하게 느껴진다. 개그 프로그램에서는 늘 핵 미사일을 쏘아라든지, 처형한다든지 무서운 말만 했는데 그의 입에서 수시로 만나자, 좋은 결과를 만들자는 말이 나오다니 놀랍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도깨비가 아니었다.

"오기 전에 보니 만찬 음식을 갖고 많이들 얘기하던데 어렵사리 평양에서부터 평양냉면을 가져왔습니다. 대통령께서 편한 마음으로 멀리 온 평양냉면을 아. 멀다고 하면 안 되겠구나. 맛있게 드셨으면 좋겠습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냉면 이야기를 하니 더 친근하게 느껴졌다. 한동안 화제가 됐었던 평양냉면을 남한까지 가지고 오다니. 옆집 사는 사람이 놀러온 느낌이랄까. 게다가 그는 농담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멀리서 평양 냉면을 가지고 왔다고 하다가 '아, 멀다고 하면 안 되겠구나'라고 말해 다같이 웃었던 것이다. 이쯤 되면 그는 도깨비가 아니라 귀요미가 아닌가.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생각을 했던 걸까.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평양냉면 발언 후 전국의 평양냉면 대란이 일어났다고 한다. 점심시간이 지나서까지 줄을 서고 준비한 재료가 떨어져 문을 닫는 가게도 있었다. 이런 현상은 남한으로 건너 와서 회담을 갖고 편안하게 농담을 하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에 대한 호감인 동시에 평화에 대한 소망이었을 것이다.

남북 정상이 나란히 서서 공동선언문을 발표했다. 올해 종전선언을 하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기로 했다. 설마 설마 하던 일이 드디어 실현되었다. '통일, 종전, 평화' 이 단어들이 너무 멀게만 느껴졌었다. 모두가 원한다고 말하면서도 그렇게 쉽게 되는 일은 아니고, 그렇게 쉽게 되어서도 안 되는 일이라고 했다. 하지만 오늘은, 오늘부터는 다르다. '통일, 종전, 평화'라는 단어를 마음대로 입에 올릴 수 있다. 마음껏 꿈꿔도 될 것 같다. 농담처럼 말하던 평양에서 평양냉면 먹기, 기차타고 유럽까지 여행가는 일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을 것 같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나의 하루는 남북정상회담에서 시작해서 판문점 선언문으로 끝났다. 평소처럼 밥을 먹고, 택배를 받고, 전화를 받아 일을 처리했으며 근교로 외출도 했지만 온통 관심은 남북정상회담이었다. 나와 전혀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북한이, 통일이, 평화가 내 일상으로 들어왔다. 앞으로의 일상은 또 어떻게 달라질지 더욱 기대된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방명록에 쓴 글처럼 새로운 역사는 이제부터이다. 지금 우리는 평화의 시대, 역사의 출발점에 서 있다. 평범한 시민인 나도 같이 여기에 서 있다. 설렌다. 오늘 밤은 좋은 꿈을 꿀 것 같다.

2018 남북정상회담이 열린 27일 오전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새로운 력사(역사)는 이제부터. 평화의 시대, 력사(역사)의 출발점에서. 김정은 2018.4.27.'라고 방명록을 작성했다.
▲ 김정은 위원장 방명록 2018 남북정상회담이 열린 27일 오전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새로운 력사(역사)는 이제부터. 평화의 시대, 력사(역사)의 출발점에서. 김정은 2018.4.27.'라고 방명록을 작성했다.
ⓒ 한국공동사진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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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남북정상회담, #김정은, #문재인, #통일,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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