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인 루니(왼쪽)와 우희용 총재(오른쪽)

웨인 루니(왼쪽)와 우희용 총재(오른쪽) ⓒ 우희용


유난히 추운 겨울, 서울시 한복판을 걸어가는 중년의 한 남성이 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은 그를 그저 평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그냥 지나친다. 그 누구도 그를 알아볼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사실 이 남성은 30년 전, 서울에서 열린 '88 올림픽' 축구 경기 결승전에서 초대 받지 않은 공연으로 시작해, 이탈리아, 독일, 미국과 영국을 거치면서 세계적인 스타 플레이어들에게 강력한 인상을 남긴, 그리고 펠레에게 "나는 축구황제라고 불리지만 이 남자는 프리스타일 축구황제이다"라는 극찬을 받았던, 프리스타일 축구의 창시자 한국인 우희용 총재다.

물론 축구에 관심이 조금이라도 있는 팬이라면 그를 알아볼 수도 있다. 하지만, 국내 축구는 커녕 해외 축구에 대한 관심마저도 떨어지고 있는 요즘 사람들 사이에서 그를 알아보는 사람은 좀처럼 보기 힘들다. 심지어 환갑에 가까운 그가 동네 축구장에 나타나면 학생들은 그를 그저 '축구 잘하는 아저씨'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축구에 관심이 있는 대부분의 우리 국민들은 프리스타일 축구가 유럽에서는 이미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시작이 대한민국이었다는 사실은 전혀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나이키, DHL 등 세계적인 기업에서 광고 촬영을 요청 받으며 해외에서는 엄청난 인기를 얻은 그가 왜 자신을 잘 알지도 못하는 한국 땅에 돌아온 것일까. 그 이유는 바로 그가 한국 땅에서 떠난 지난 30년 전부터 간직해 온 꿈을 이루기 위해서다.

다음은 지난 1일, 서울 잠실역 근처의 카페에서 국제 프리스타일 축구 협회(IFFA)의 총재로 활동하고 있는 우희용 총재와 함께 나눈 이야기이다. 

- 안녕하세요.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네, 안녕하세요. 저는 축구가 너무 좋아서 그저 태극마크를 달고 싶다는 꿈 하나만으로 축구를 시작하게 된 우희용입니다. 현재에는 국제 프리스타일 축구협회(IFFA)라는 기관을 설립해 활동하고 있습니다."

- 축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사실 저는 5살 때 축구를 시작했습니다. 제가 태어난 곳이 아주 작은 동네였는데 그 동네에서 매일 축구를 하시던 형이 계셨죠. 그 형이 너무 멋져보여서 이후로는 그 형만 졸졸 따라다니면서 마음 속으로 축구선수라는 작은 꿈을 키워왔던 것 같아요(웃음).

그 이후, 사시사철 축구만 하다가 결국 초등학교 4학년때 축구부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 당시에 제가 살던 동네는 너무 작은 시골이었기 때문에 학교에서 축구만 하면 그냥 그게 축구부였지 별다른 의미는 없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그 동네에서 공 차고 노는 친구들이 다 축구부라고 불렸으니까요(웃음).

그러다가 우연하게 도시로 이사를 가게 되었는데, 전학 간 학교에는 정식 축구부가 있었어요. 축구부원들이 유니폼을 입고 훈련하는 모습에 매료되어 다시 축구선수의 꿈을 키우게 되었습니다. 바로 입단 테스트를 보고 합격해서 들어갔죠(웃음).

물론 처음에는 부모님의 반대가 심했습니다. 특히 아버지께서 반대하셨죠. 어머니께서는 어떻게든 제 꿈을 지원해주고 싶어하셨던 것 같아요. 하지만 하루는 집에 있는 옷(유니폼)에 흙이 묻은 것을 아버지께서 보시고 학교에 직접 찾아오신 적도 있었습니다. 또한 축구부에서도 선배들에게 구타를 당하는 등 정말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저 꿈에 대한 열정 하나로 버틸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 프리스타일 축구를 왜 만들게 되었는지?
"프리스타일 축구를 제가 만들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처음에 프리스타일 축구라는 말은 잘 사용하지 않았고, 처음에는 '우희용이 한다'라고 해서 외국인들 사이에서 '우싸커'라는 이름으로 불렸죠. 우싸커가 지금 많은 이들이 즐기고 있는 현대 프리스타일 축구의 시작인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정확하게 말해서는 프리스타일 축구를 누가 어디서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저는 그저 프리스타일 축구라는 하나의 공식적인 종목을 만든 사람이죠. 한 가지 더 말씀드리자면, 프리스타일 축구라는 이름은 2002년 나이키 사에서 프리스타일 풋볼을 주제로 한 광고가 방영되면서 불리게 된 이름입니다."

 프리스타일 축구 창시자 우희용 총재의 모습.

프리스타일 축구 창시자 우희용 총재의 모습. ⓒ 우희용


- 프리스타일 축구가 실제 축구 경기에서도 유용한 것인가요, 아니면 다른 개념인가요? 

"물론 프리스타일을 실제 경기에서도 잘 활용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호나우지뉴죠. 호나우지뉴는 프리스타일 기술만으로도 상대 수비진들을 무력화시켰습니다. 그 외에도 프리스타일이 실전에서도 유용하다는 것은 이미 잘 드러난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프리스타일이 축구 경기의 전부로 작용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선수들이 갖춰야 할 가장 기본적인 능력은 볼 감각으로부터 비롯되는데, 그 감각을 익히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 프리스타일인 것이죠. 프리스타일이 보통선수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최고의 선수로 남을 것인가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라고 저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박지성과 손흥민 등 해외에서도 훌륭한 선수로 이름을 알린 이들의 코치들은, 선수들에게 무엇보다도 볼을 다룰 줄 아는, 즉 볼 감각을 익히기 위해 개인기 연습을 집중적으로 진행했습니다.

한 가지를 덧붙여서 이야기하자면 현재 큰 위기를 마주한 우리 한국 축구가 이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해결책을, 지금 제가 하고있는 프리스타일 축구에서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 프리스타일 축구가 쉬워 보이진 않습니다. 프리스타일을 잘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물론 쉽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저는 하나의 기술을 익힐 때마다 엄청난 보람을 느꼈습니다. 누구나 경험하는 그 어려움을 이겨내는 과정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1만 번만 시도하면 무조건 성공한다'는 긍정적인 마음으로 연습한다면 누구나, 언젠가는 최고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 88 올림픽 당시 초대받지 않은 손님으로 유명합니다. 무슨 상황이었는지?
"23살 때였습니다. 축구부가 해체되는 등 어려운 환경 때문에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축구에만 전념한지 6년이 되던 해였죠. 늘 마음 속에는 해외 진출을 품고 있었지만, 제가 환경적으로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이런저런 상황 때문에 좀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우리나라에서 올림픽이 열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지금와서 보면 정말 엉뚱한 생각이었지만, 그 당시에 제가 해외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올림픽 방송에 나가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습니다(웃음).

처음에는 공식적인 방법으로 올림픽 관계자 측과 접촉을 시도하였지만 이름도 모르는 사람에게 축구장에서 공연을 하게 해달라는 이야기를 들으니 당연히 거절할 수밖에 없었죠(웃음). 그대로 해외진출의 꿈이 좌절되는 줄 알았지만 올림픽 마지막 날 저는 결국 무단으로 경기장에 난입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기억하기론 소련과 브라질의 축구 결승전이었습니다. 그날이 올림픽 마지막 경기여서 많은 외부 인사들이 왔다고 들었죠. 그 때문인지 경기 당일, 완전무장한 경비원들이 경기장 앞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나름대로 멋지게 차려입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그 사이를 지나가는데 정말 식은땀이 났습니다. 다행히도 경기장 안에 무사히 들어가게 되었고, 그때가 경기 시작 약 3시간 전이었는데, 저는 일단 화장실로 향했습니다. 일단은 숨어야할 것 같았거든요. 가장 구석에 위치한 칸에서 약 3시간 동안 몸을 풀면서 하프타임 휘슬이 들리기만을 기다렸던 것 같아요.

결국 하프타임을 알리는 휘슬소리가 울리고 경기장에 들어갔는데 그 당시 경비진들이 정말 난리가 났었습니다. 엄청 화나 보였어요(웃음). 물론 뒷일은 책임질 수 없었지만 일단 성공했다는 마음에 공연(?)을 끝내고 재빨리 도망쳤습니다.

이후에 경비 감독관님께 엄청 혼나긴 했지만 지금은 서로 연락하면서 사이좋게 지내고 있습니다(웃음)."

- 지난 1989년, 헤딩 기네스 기록을(5시간 6분 30초) 달성했을 당시의 기분은?
"그 기록을 달성하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사실 이전에 3시간대 라는 최고 기록을 제가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 당시 한국에서 헤딩 대회가 열리기로 했던 기간이었고, 저는 기존의 기록에서 조금만 시간을 더 늘리자라는 마음으로 대회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회가 몇일 남지 않은 상황에 갑작스럽게 기네스북 관계자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던 기록이 깨졌다고 말하더군요. 그것도 한 시간 이상 차이로 말이죠(웃음). 제가 3시간까지는 큰 어려움없이 해왔던 터라 별부 담이 없었는데 그때는 정말 모든게 무너지는 기분이었습니다.

결국 일단은 도전해보자는 마음으로 대회에 참여하게 되었고, 정말로 4시간 이후부터는 공이 아니라 바위가 머리 위에 떨어지는 기분이었습니다. 나중에는 앞도 잘 보이지 않아 공을 볼 수도 없었어요(웃음). 하지만 기록이 갱신되었다는 소리가 체육관 내에 울려퍼졌을 때는 정확하게 기억합니다. 사실 그 이후 기억은 잘 안 나는데 눈을 떠보니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죠(웃음)."

- 유럽에서 노숙자 생활까지 했던 것으로 들었습니다. 가장 힘들었던 상황은?
"한 번은 외국인들과 시비가 걸려 죽을 뻔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탈리아와 아르헨티나의 훌리건들끼리의 싸움이었는데, 경기장 근처에서 공연하고 있는 저를 본 이탈리아인들이 제 검정머리를 보고 아르헨티나 사람이 아니냐며 구타했습니다. 아마도 술에 취해있었던 같아요(웃음)."

 호나우지뉴에게 싸인을 요청받은 우 총재

호나우지뉴에게 싸인을 요청받은 우 총재 ⓒ 우희용


- 2002년 나이키 광고 촬영 도중 경험한 호나우지뉴는?
"사실 호나우지뉴와 언어가 달라 커뮤니케이션은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호나우지뉴가 그 당시 세계 최고의 선수였다는 것입니다.

당시 상황을 설명하자면 처음에는 저의 개인 촬영이 진행되었는데 호나우지뉴가 저를 계속 지켜보다가 예정에도 없이 들어와 저에게 기술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후에 저에게 공을 건내주더군요(웃음). 아마 '당신도 보여달라' 이런 뜻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웃음).

그래서 저도 약 10분 동안 제가 가지고 있는 기술들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던 도중 갑자기 호나우지뉴가 공을 두 손으로 잡고 저에게 90도로 인사를 했습니다(웃음). 싸인을 해달라고 하면서 말이죠. 비록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그는 저에게 계속 존경한다는 의사를 전했습니다.

그 이후에도, 이나모토와 호나우지뉴, 그리고 저까지 그렇게 세 명에서 광고를 촬영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또, 호나우지뉴를 세계적인 선수들이 참석한 시상식에서 만난 적이 있는데, 제가 조금 늦게 참석했습니다. 근데 자리가 딱 한 군데 비워져있더라고요(웃음). 공교롭게도 그 자리가 바로 호나우지뉴의 옆자리 였습니다. 우연인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가 이번 시상식에 제가 참석한다는 소식을 듣고 자리를 비워달라고 요청했다고 합니다(웃음).

그정도로 호나우지뉴와는 사이가 좋습니다. 그를 보지 못한지 약 13년이 되어가는데, 정말 보고싶네요. 조만간 한국에서 그를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희용 총재. 30년이 지난 현재에도 그의 꿈은 변함없다.

우희용 총재. 30년이 지난 현재에도 그의 꿈은 변함없다. ⓒ 우희용


- 우리나라에서 프리스타일 축구의 대중성이 낮은 것은 사실입니다. 실망하진 않았나요?
"네, 사실 어느정도 예상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외국에서 20년 가까이 활동했었고 당시에는 지금처럼 미디어 매체가 발달된 시대도 아니었기 때문에 국민들께서 저를 알아보기 쉽지 않다는 것은 저 역시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조국으로 다시 돌아왔을 땐, 예전에 유럽에서 버스킹으로 생계를 유지했듯, 다시 바닥에서부터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돌아왔습니다. 물론 지금도 많은 분들께서 저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사실은 전혀 아쉽지 않습니다. 제 이름은 몰라도 이미 국내외의 많은 언론사에서 프리스타일 축구라는 용어를 사용한다는 자체만으로도 큰 보람을 느낄 수 있거든요(웃음)."

- 외국에서는 뉴스에 출연한 적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귀국을 결심하게 된 이유는?
"사람으로서의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부모님에 대한 효도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하지만 정작 제 부모님께서는 제가 해외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을 때 세상을 떠나셨죠.

아버지께서는 한국전쟁 참전 용사셨는데, 생전에 늘 나라 사랑을 강조하셨습니다. 제가 활동한 사진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제가 늘 태극기를 달고 다니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해외에서 프리스타일 축구 종주국이라는 타이틀을 얻기 위해 귀화 등의 엄청난 제안들도 있었지만 부모님의 못다한 꿈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 모든 것을 뿌리치고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세계대회의 심사위원으로 초청받은 우 총재 .

▲ 세계대회의 심사위원으로 초청받은 우 총재 . ⓒ 우희용


- 향후 계획은?
"제 주변의 많은 분들께서 제 꿈은 프리스타일 축구가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는 것이라고 알고 계십니다. 하지만 제 궁극적인 목표는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전해주는 사람이 되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힘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유일하게 잘하는 프리스타일 축구를 그 수단으로 사용하려는 것이죠.

프리스타일 축구가 올림픽 정식 종목이 된다면 지구촌의 많은 아이들과 우리 민족에게 또 다른 희망을 심어줄 수 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리고 오는 10월에 서울에서 전 세계인이 모이는 프리스타일 축구 대회를 주최할 생각입니다. 많은 분들께서 관심가져주셔서, 전 세계인들에게 프리스타일의 종주국 우리나라라는 사실을 알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이 세상에 빛을 받기 보다는 빛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 누구보다도 자신이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기억한다면, 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빛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전해주는 사람이 된다면, 세상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될 것 입니다.

끝으로 그동안 힘들때마다 제 삶에 모든 원동력이 되어준 제 배우자에게 이 자리를 비롯해 처음으로 정말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프리스타일 축구의 시작이 우리나라라는 사실을 잊지말아주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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