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버닝>

영화 <버닝>이 16일(현지시간) 칸영화제에서 첫 공개됐다. 사진은 왼쪽부터 이창동 감독, 유아인, 전종서, 스티븐 연, 제작사 파인하우스 필름 이준동 대표. ⓒ CGV아트하우스


자신은 의식하지 못하고 있지만, 불덩이를 한 가득 가슴에 안고 사는 청년(유아인)이 있었다. 택배 아르바이트로 연명하며 작가를 지망하는 이 청년을 한 여성이 알아본다. '종수야!, 나 해미야' 

영화 <버닝>은 이렇게 서로의 이름을 명명하면서 시작한다. 그 주체는 해미(전종서)다. 종수는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현실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살고 있고, 그 틈을 해미가 파고들면서 종수의 가슴엔 작은 불씨가 생긴다.

또 다른 사내, 그리고 여성

불의 발견으로 인류의 역사는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잘 다루면 유익한 이 불은 동시에 파멸을 가져다주는 양면성이 있다. <버닝> 속 종수도 그렇다. 아직 제대로 타보지 못한 연료가 그의 내면에 가득하다. 영화에선 종수의 아버지(최승호 MBC 사장이 특별출연했다-기자 주)가 분노조절장애를 앓고 있고, 그로 인해 이웃 사람들에게 막연한 불안감을 주었으며 결국 해를 끼친 인물로 묘사된다.

선천적인 기질, 즉 종수에겐 부계로부터 내려온 '화'가 자리 잡고 있다. 영화는 해미를 만나면서 당겨진 종수 안의 불씨가 언젠가는 종수 자신마저 집어삼킬지도 모른다는 암시를 아버지의 기질로부터 설명한다. 특히 영화 초반 등장하는 아버지의 소품 중 금고 속에 숨겨져 있던 칼 세트는 후반까지 어떠한 기능도 하지 않은 채 일종의 '맥거핀'으로 작용한다.

그렇다면 모계는 어떠한가. 아버지의 잦은 화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엄마는 일찌감치 종수 곁을 떠났다. 야반도주한 엄마를 뒤로 하고 아버지는 종수에게 그녀의 옷을 모두 태우라고 지시했다. 엄마의 옷을 모두 태워버려야 했던 종수. 사실 이미 그는 한 번 심리적으로 거칠게 그을린 경험이 있는 인물인 셈. 앞서 제대로 타보지 못했다는 게 바로 이 지점에 기인한다. 재료로서 순수성을 잃은 그을음이 있는 영혼이 바로 종수의 존재다.

해미와 종수만 존재했다면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여행을 좋아하기에 종수에게 자신의 집과 고양이를 맡기고 훌쩍 아프리카로 떠난 해미는 또 다른 남성 벤(스티븐 연)을 자신의 관계로 끌고 온다. 이로써 종수-해미-벤이라는 역학 관계가 성립된다. 한 여성을 사이에 둔 두 남성의 신경전. 아니, 보다 정확하게는 종수의 일방적인 경계만이 존재한다.

벤은 다른 차원에서 두 남녀에게 영향을 준다. 강남의 그럴싸한 집에 살고, 포르셰를 모는 청년. 대한민국 젊은 부자들의 속성을 대화를 통해 설명하고, 단순한 장난을 치기 위해 치밀하게 사전 준비를 하는 벤의 모습을 설명한다. 이로써 벤이 그 배경과 이유는 알 수는 없지만 종수와 해미 사이에서 어떤 훼방을 놓을 것임을 암시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해미의 손금을 봐준다면서 '너의 마음에 돌이 있어. 그걸 꺼내줄게'라는 말을 던지기 위해 그는 카페 외부에서부터 이미 돌멩이를 숨겨놓고 있었다. 또한 요리를 잘한다는 상대의 말에 벤은 '나를 위한 제물로서 아름답게 꾸미는 재미가 있다'고 답한다. 즉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무엇이든 하는 존재인 것이다. 해미를 건드리지 말라고 소리치는 종수에게 '2개월마다 한 번씩 비닐하우스를 태우며 쾌감을 느낀다'고 말하는 벤의 모습에서도 농락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습성을 잘 알 수 있다.

 영화 <버닝>

ⓒ CGV아트하우스


완전 연소와 불완전 연소

종수가 사는 곳은 북한 접경 지역 중 하나인 파주다. 대남방송을 또렷하게 들을 수 있는 동네다. 북한 선전을 위한 이 방송은 영화에서 단순한 설정으로 지나가지만 이것 또한 하나의 상징으로 읽을 수 있다. 상대방의 심리에 영향을 주기 위한 장치이고, 그 기능을 영화 속에서 벤이 종수를 향해 수행하고 있는 것. 그 증거가 바로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꿈을 종수가 우연히 꾼다는 것이다. (꿈에서는 유년 시절의 종수로 묘사된다)

이 지점부터 종수안의 연료가 급격히 타오르기 시작한다. '다음엔 너의 집에서 아주 가까운 비닐하우스를 태울 것'이라는 벤의 말을 듣고 매일 인근의 비닐하우스를 점검하는 종수의 모습은 집착에 가깝다. 동시에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채 해미에게 모진 말을 내뱉고, 그 직후 행방이 묘연해진 해미를 향한 집착 또한 시작된다. 

<버닝>에서 해미의 존재는 종수에겐 불씨가 되면서 동시에 종수의 순수성을 비추는 거울로 작용한다. '나, 성형수술 했다. 학창시절 네가 내게 했던 유일한 말이 너 참 못 생겼다였어. 나 예뻐? 자 이제 진실을 말해봐'라는 대사로부터 우리는 종수가 직면한 과제를 추론할 수 있다. 종수 역시 그을음이 있는 영혼이면서 누군가에게 그을음을 안긴 인물이었다. 그는 해미 앞에서만큼은 순수했다는 사실을 증명해내야 한다.

그렇지만 그 스스로 본인이 누구에게도 순수할 수 없음을 잘 안다. 아버지는 잡혀가고 엄마는 떠나 버린 빈 집을 홀로 지키며 소를 키우던 그는 마을 이장에게 소를 팔아달라 부탁하면서 "암컷"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소는 암컷이 아닌 수컷이었다. 이는 곧 영화 중반에 등장하는 종수 엄마의 성정에서 기인했다고 볼 수 있다. 16년 만에 나타나 아들에게 돈 500만원이 궁하다고 암시하는 엄마, 그런 엄마를 종수는 경멸에 찬 눈빛으로 바라본다.

영화 중후반부터 폭주하기 시작하는 그의 심리상태는 부계와 모계로부터 물려받은 기질적 더러움(적어도 그 스스로는 그렇게 여기는 것으로 보인다)에 대한 몸부림, 육체적 관계 이후 사랑에 빠진 것으로 믿는 해미에 대한 집착, 같은 남성으로서 벤에 대해 느끼는 열패감 등이 뒤섞여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과연 완전 연소한 것인가 불완전 연소한 것인가.

배우들의 활용과 조합의 미

 영화 <버닝>

ⓒ CGV아트하우스


알려진 대로 <버닝>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헛간을 태우다>를 원작으로 했다. 비닐하우스 틈으로 헤매고 다니는 내용까진 원작과 유사하지만 이창동 감독은 그 이후의 세계를 창조해냈다. 원작보다 주인공의 심리상태와 사건들은 구조적으로 잘 맞물려 있고, 각 인물들의 세계관도 그 안에서 나름의 설득력이 있다.

유아인, 스티븐 연, 전종서는 각각 분명한 임무를 부여받았다. 자신들의 지분대로 훌륭히 수행해내는 모습이다. 다만, 상반신을 노출하며 종수의 상대가 되는 전종서에 대해선 남성 중심적 시각이 엿보인다. 종수의 욕망을 끌어내기 위한 일종의 도구로서 여체가 활용된 느낌이다. 이 부분은 세계적으로 어느 정도 이름을 알린 국내 영화감독들이 두고두고 넘어야 할 오랜 과제 중 하나다.

스티븐 연의 눈빛이 좋았다. 개인적으로는 전종서의 발견보다는 스티븐 연의 발견 쪽에 더 점수를 주고 싶다. <워킹 데드> 시리즈와 <옥자> 이후 한국영화에서 스티븐 연을 제대로 활용한 첫 사례로 남을 것이다.

평점 : ★★★★(4/5)

버닝 칸영화제 유아인 이창동 전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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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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