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의 포스터.

영화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의 포스터. ⓒ 유니버설픽처스


누구에게나 '처음'이 있다. 처음에는 부족하고 서툴지만 실수를 반복하면서 성장하게 마련이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가 될 수도 있고 그냥 실패로 끝날 수도 있다. 성공조차도 단 한 번의 성공으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인 영화계에서 계속해서 영화를 찍는다는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다가 문득 궁금했다. 계속해서 비범한 영화들을 만들어내는 거장들의 첫 영화는 그들의 미래를 예견하고 있을까? 그래서 현재 생존해있는 70세가 넘은 거장들의 첫 영화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들은 과연 떡잎부터 달랐을까? - 기자 말

*주의!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의 한 장면.

영화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의 한 장면. ⓒ 유니버설픽처스


1955년, 25세 당시 단역 배우로 영화계에 입문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지금까지 70편의 영화에 출연했고 39편의 영화를 연출했다. 1993년 <용서받지 못한 자>와 2005년 <밀리언 달러 베이비>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두 번 수상하면서 감독으로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최고의 위치에 올랐고 곧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그는 계속해서 영화를 만들고 있다. 그러나 그의 초기 연출작들을 보면 지금의 성취를 예상하기는 어렵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 최고의 영화들을 만들어 낸 이스트우드야 말로 대기만성, 영화 장인이라는 수식어에 들어맞는 영화 감독일 것이다. 

1971년 영화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를 연출하기 전까지 이스트우드는 스파게티 웨스턴(이탈리아 자본으로 스페인에서 주로 촬영된 카우보이 영화를 일컫는다.) 영화를 대표하는 배우로 할리우드에서의 입지는 미미했다. 1970년대 영화 <더티 해리> 시리즈를 만나고, 여러 편의 영화를 연출하면서 그는 자신의 입지를 다져가기 시작했고, 1988년 <버드>를 통해 배우보다 감독으로서의 존재감이 우위를 차지하게 된다.

아름다운 여성이 보여주는 섬뜩한 광기

 영화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의 한 장면.

영화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의 한 장면. ⓒ 유니버설픽처스


캘리포니아에서 라디오 DJ로 일하고 있는 데이브 가버(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단골 바에서 여성 팬 에블린(제시카 월터)을 만나 하룻밤을 함께 보내게 된다. 바람둥이 데이브에게 에블린은 스쳐지나가는 여자에 불과하지만 에블린은 데이브에게 집착하기 시작하고 그녀의 집착은 광기로 치닫는다.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는 전형적인 스릴러 영화로 장르의 문법에 충실하다.

뒤틀린 애정과 폭력성을 지닌 아름다운 여성이 보여주는 광기는 섬뜩하지만 충격적이지는 않다. 그가 하는 행동들이 뉴스에서 흔히 보는 데이트폭력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데이브의 여자 문제로 그를 떠났던 토비(도나 밀스)가 다시 돌아오고 데이브는 토비의 소중함을 진정으로 깨닫고 토비는 그의 진심을 받아들인다. 그들의 관계가 확고해질수록 데이브를 향한 에블린의 집착은 강해지고 데이브를 스토커처럼 쫓아다니며 폭언을 내뱉고는 이내 사랑해서 그런 거라고 눈물로 사죄한다. 에블린의 폭언은 자해와 폭행으로 이어지고 그녀의 폭력이 결국은 데이브의 연인 토비에게 이어질 것이라는 긴장감이 영화를 끌고 간다. 

 영화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의 한 장면.

영화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의 한 장면. ⓒ 유니버설 픽처스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는 제작 후 47년이 지났지만 지금 봐도 거슬리는 점 없이 재밌게 볼 수 있는 영화다. 그럼에도 숲속에서의 애정 신(뜬금없기는 해도 당시 관객들을 끌어 모으는 데는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과 에블린의 허무한 죽음, 밀도가 떨어지는 대사들은 아쉬움이 남는다. 많은 스릴러 영화가 그러하듯 이 영화 또한 저예산으로 제작되었고 북미에서만 제작비의 15배가 넘는 수익을 남겼다. 이러한 흥행 성적은 그가 감독으로 계속해서 영화를 연출 할 수 있는 명분을 만들어 주었다.

이스트우드는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서부영화에 출연하며 배우로서 존재감을 처음 드러냈다. 차갑고 강인한 외모와 무겁게 갈라지는 목소리는 그가 맡았던 마초적인 캐릭터와 잘 어울리는데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에서도 그는 자신의 이미지를 그대로 가져온다. 190cm가 넘는 키에 누구의 유혹에도 끄떡없을 것 같은 그가 바람둥이에 여자로 인해 위협을 당하는 캐릭터를 연기한 것은 의외이기도 하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아니었다면 잊혔을 영화

 영화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의 한 장면.

영화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의 한 장면. ⓒ 유니버설 픽처스


1971년 첫 연출작을 내놓은 이후로 그는 계속해서 영화를 만들었지만 그의 경력에 있어 그리 중요한 영화들은 아니었다. 재즈광으로 유명한 그가 전설적인 색소폰 연주자 찰리 파커의 일대기를 그린 <버드>를 10년간의 준비기간 끝에 1988년 완성하면서 그의 경력은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고 1993년 <용서받지 못한 자>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하면서 정점을 찍게 된다. 영화는 평단과 대중 모두에게서 호평을 받았다. 영화를 관통하는 묵직한 주제 의식을 드라마 속에 녹여내는 능력은 그의 나이와 함께 노련해졌고 2005년 <밀리언 달러 베이비>로 다시 한번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하면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거장의 반열에 올라선다.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는 지금의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아니었다면 잊혔을 것이다. 그의 이름과 영화에서 계속해서 등장하는 재즈 명곡 'misty'를 제외하고는 영화의 결정적 장면과 대사가 이 영화를 기억하기엔 힘이 약하기 때문이다. 하룻밤의 정사로 위험에 처하는 남자들이 등장하고 광기어린 집착의 스토커를 다룬 영화들은 꽤 많다. 마이클 더글라스와 글렌 글로즈가 출연한 <위험한 정사> 캐시 베이츠의 연기가 돋보였던, 스토커를 전면에 내세운 <미저리>가 그 대표적인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두 영화 모두 이상 집착 증세를 보이는 여자 캐릭터가 등장하는데 캐릭터에 대한 묘사가 보다 구체적이어서 이들의 집착은 공포스러울 만큼 섬뜩하게 느껴지고 영화는 그만큼 강렬해진다. 그런 점에서 연기는 훌륭했지만 더 빛날 수도 있었던 에블린이라는 캐릭터가 아쉽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자칫 신파로 빠지기 쉬운 이야기를 감동적인 드라마로 완성하는 탁월한 능력을 가진 감독이다. 그의 영화는 잘 만들어진 고급 세단 자동차처럼 안정적이고, 그는 아이디어가 아닌 이야기로 영화를 끌고 간다. 타고난 재능보다 수십 년 세월의 연마를 통해 무르익어가는 그의 커리어는 잠깐 반짝하고 사라지기 쉬운 영화계에서 더 소중하고  있게 다가온다.

추신.

에블린이 라디오에 매번 신청하는 'misty'. 영화서는 연주곡만 나오지만 개인적으로 엘라 피츠제랄드가 부른 미스티가 가장 미스티 답지 않나 생각한다. 그녀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로맨틱한 선율, 가사와 정말 잘 어울린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강지원 시민기자의 브런치 계정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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