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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전에는 집안일을 고민해 본 적 없었다. 결혼을 하고 내 집이 생기면서 수고로움이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느꼈지만 곧 아이가 태어났고, 아이를 먹이고 재우고 함께 있어주는 것만으로 나의 모든 에너지가 소진되었다.

당시 아이를 위해 휴직을 하던 나는 '육아' 휴직을 한 것이지 집안일을 하려고 휴직한 게 아니라며 남편에게 집안일의 많은 부분을 요구했다. 이후에도 집안일은 서로 반씩 나누어야한다며 매일 각자가 한 일의 목록을 작성하며 평등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그렇게 함께 해 주어도 힘겨울 때가 있다. 엄마라는 이름으로 짊어져야 하는 많은 책임, 온전히 나만을 위해 쓸 수 없는 시간, 육아라는 이름으로 사라져버린 나라는 존재. 이러한 답답함의 화살은 결국 가장 편한 남편에게 돌아가기 일쑤였다. 마치 당신이 도와주지 않아 내가 힘들다는 듯이.

은유 산문집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은유 산문집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 서해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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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에서 은유 작가는 이러한 답답함을 시로 이겨낸다. '어디가 아픈지만 정확히 알아도 한결 수월한 게 삶이란 것을, 내일의 불확실한 희망보다 오늘의 확실한 절망을 믿는 게 낫다는 것을, 시는 귀띔해 주었다(p.8)'고 말한다.

결혼 후 일을 하면서도 집안일은 온전히 제 몫이 되어야 했던 순간, 출산 후 나는 사라지고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하는 순간, 엄마 역할로 주어지는 과다한 몫들로 그저 밥순이가 되어버린 것만 같은 순간, 작가는 서글픈 마음을 고민하고 써내려 간다. 무엇이 문제인지.

작가는 '능력이든 랜덤이든 운명이든 여성 일부가 좋은 남자를 만나는 건 우연이겠으나 전체로서 여성은 가부장 질서와 규범에 이미 속해(p.29)'있고 '대개 본분이란 약자의 동의 없이 정해진 의무(p.48)'이기에 여성의 본분은 동의 없이 남성들에 의해 규정된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 굴레에서 여전히 우리가 허덕이고 있다고.

'전통적으로 성과 사랑의 주체는 남성이지만 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노동은 여성이 담당한다. 여성이 노동을 그만두는 순간 대부분의 관계도 끝난다(p.44)'는 여성학자 정희진의 말처럼 시대가 많이 바뀌었어도 끝없는 가사 노동은 여전히 여성들이 감내해야 할 몫일뿐이라고 작가는 이야기한다.

책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답을 알려주지 않는다. 그저 여성이 느끼는 어려움이 개인이 아닌 사회의 문제, 공공의 문제임을 알고 논의하여 우리 사회가 조금 더 진전할 수 있게 하는 한 걸음을 제시한다. 물론 그 한 걸음이 언제 이루어질지 몰라, 친절한 작가는 우리에게 위안을 주기도 한다.

삶은 그 자체가 낭비다. 책 한 권을 어렵사리 읽어도 돌아서면 내용을 까먹지 않던가. (중략) 사는 게 총체적 낭비라는 걸 인지하지 못할 때는 살림만 미워했다. 살림이, 정확히 가사노동이 지겹고 하찮게 느껴져서 제발 집안일 좀 안 하고 살길 간절히 염원했다. 지금은 아니다. (중략) 땅에서 난 그것들을 만지면 마음이 순해지고 위로를 얻는다. 바닥 구석구석에 어질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담으며 헝클어진 번뇌를 같이 모아버린다. (중략) 날 괴롭히는 것이 날 철들게 한다더니 살림이 그렇다(p.258).


책을 읽으며 작가와 비슷한 내 상황이 답답해 홀가분하던 시절을 그리워하기도 하였지만 반복되는 일상에 매몰되어 목표나 삶의 가치는 없고 그저 하루하루 시간만 보낸다는 생각이 문득문득 드는 엄마의 자리가, 엄마의 역할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보게끔 했다.

시는 삶을 위로하지도 치유하지도 않았다는 작가와는 달리 나는 작가의 글을 읽고 마음이 편안해졌다. 작가의 사유와 고민은 여성성에 그치지 않고 세상으로 향한다.

집안일에서 시작된 나의 울컥은 세상일로 번졌고, 울컥이라는 존재의 딸꾹질을 글로 써서 진정시키곤 했다. 싸움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싸움하는 사람이 되었고, 인간의 불행을 사회 구조 속에서 보는 시선을 얻었다. (저자의 말 중에서).


작가는 '손님이 짜다면 짠 거다'라고 적힌 알바생의 유니폼을 보며 '무분별한 갑질을 승인하고 순치된 개인을 기르는 나쁜 말'이라 여길 줄 알고, 용산 참사를 지켜보며 봄날만 기다릴 것이 아니라 함께 체온을 나누며 겨울을 나야한다고 이야기한다.

직업이 인격을 담보하지 않는데 우리는 사회적 무지로 직업의 귀천을 만들고 이는 다시 구조적 불평등을 낳는다고 말한다. 뒤처지고 싶지 않아 자신을 남성과 동일시하며 명예 남성으로 활약하고자 했던 젊은 시절을 반성하기도 한다. 이러한 작가의 생각은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 여러 관습들로 닫혀 있음을 느끼게 했다.

삶 속에서 글을 쓰고, 쌓아온 것들로 글쓰기 강좌도 진행하는 작가는 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선 뿐 아니라 우리도 다 하는 평범한 생각들을 특별하게 표현하는 능력을 가졌다.

결혼도 이혼도 인연을 쓰는 한 방편일 뿐이다. (중략) 비열한 이혼도 아름다운 이혼도 있다. 그러니 권장할 일도 배척할 일도 아니다. 삶 전체를 위한 합리적인 골격을 짜는 하나의 과정으로 아픈 선택일 뿐이다. 삶의 어느 국면에서 생을 담은 물이 심하게 흔들리는 것. 단지 그것뿐이다(p.24).


어떤 사람이 잘 산다고 말할 때 그 기준은 보통 돈이다. 직업을 정할 때도 연봉의 유혹은 크다. 월급 많이 주는 곳이 가장 좋은 회사다. 그런데 그런 직장이 나의 좋은 삶을 지속적으로 보장하지는 않는다. 원래 돈은 속삭인다. 나를 줄 테니 너의 모든 것을 달라고(p.237).


그날 기분은 아침부터 흐림이었다. 이유는 그냥이다. 존재를 둘러싼 제반 조건이 그러하도록 총체적으로 응결된 상태, 그냥(p.258).


이렇게 써놓고 보니 문맥이 제거되고 문장만 제시되어 평범하게 느껴질 수 있다. 작가가 '서른다섯부터 마흔다섯을 경유하는 한 여자의 투쟁의 기록'이라 칭한 이 책에는 여성뿐 아니라 존재, 사랑, 일에 관한 작가의 생각을 솔직하게 살펴볼 수 있다. 글 전체를 보며 자신의 특별한 문장을 찾아보길 바란다.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은유 지음, 서해문집(2016)


태그:#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은유, #페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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