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너 혹시, 저거 땜에 러시아 가는 거야?"

주말에 집에 들렀더니, 텔레비전을 보시던 엄마가 잠깐 지나가는 러시아 월드컵 광고 화면을 보시다가 '유레카'를 조용히 외치십니다. 딸내미가 분명히 회사에 휴가를 내가 러시아에 간다고는 했는데, 이유를 얘기하지는 않았으니 궁금하셨나 봐요. 게다가, 요즘에 '이니와 으니'의 브로맨스와 트럼프 형님의 밀당으로 뉴스에서 '월드컵'은 사라져 버렸잖아요. 오죽했으면 한 시사프로그램에서는 '아, 맞다. 월드컵이지?' 하는 코너까지 만들었겠어요. 오늘도 뉴스는 온통 싱가포르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러시아 여행책을 사고, 박노자 교수의 <러시아 혁명사 강의>와 막심 고리키의 <가난한 사람들>을 읽었습니다. 여기에, 감동적이었던 영화 <에너미 앳 더 게이트>까지 다시 한 번 돌려보니, 마음은 이미 러시아에 있습니다.

장기 휴가를 써야 하기 때문에 바쁘게 현장 업무를 마무리하려다 보니 몸은 천근만근으로 피곤하지만, 출발 비행 편은 벌써 인천공항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습니다. 아직 준비한 것이 없어서 겁도 나고 마음은 두근거립니다. 일단, 일정표를 확정하면서 만났던 몇 개의 작품들을 통해 상상하는 여행을 그려봅니다.

[장면①] '레닌그라드'의 추억과 러시아 혁명, <러시아 혁명사 강의>

준비했습니다, 유니폼! 앗, 메시님을 보기 위해 유니폼에 이름까지 넣었는데, 정작 아르헨티나의 표는 한 장도 구하지를 못했습니다. 역시, 아르헨티나와 메시만은 '잊혀진 월드컵'에서도 결코 잊혀지지 않네요.

▲ 준비했습니다, 유니폼! 앗, 메시님을 보기 위해 유니폼에 이름까지 넣었는데, 정작 아르헨티나의 표는 한 장도 구하지를 못했습니다. 역시, 아르헨티나와 메시만은 '잊혀진 월드컵'에서도 결코 잊혀지지 않네요. ⓒ 이창희


<러시아 혁명사 강의>(박노자, 나무연필)는 러시아 여행책을 집어 들기도 전에 맨 처음 읽었던 책이었습니다. 인터넷 서점의 장바구니는 계속 '네가 옛날에 샀던 책'이라는데, 이미 난장판인 온 집안을 다시 뒤져도 붉은 별의 표지는 보이질 않습니다. 결국은 책을 다시 샀고, 레닌과 러시아 혁명의 역사의 개요라도 따라갈 수 있었습니다. 혁명의 주요 무대였고, 레닌을 기념하며 '레닌그라드'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대해서도 왠지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했어요.

여행책은 수많은 로마노프 왕조의 아름다운 미술관과 교회당, 공원들을 안내하고 있던데, 화려함 이면의 쓸쓸함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대한민국은 이 도시에 베이스캠프를 열었어요. 축구 잡지의 안내서를 읽다 보니, 아름다운 도시에는 미술관만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이곳은 축구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어 많은 나라들이 베이스캠프로 선택한 도시였어요.

저는 이곳에서 여행의 첫 경기인 모로코와 이란의 일전을 보게 됩니다. 도시만큼이나 아름다운 경기장도 기대됩니다. 물론, 그동안 외면당했던 레닌의 공산주의 혁명에 대해서도 한 번은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아 기대가 되고요.

'레닌은 근대 자본주의의 모순에 대해 탁월한 분석을 한 급진적 혁명가이자 사상가입니다. 자본가와 전쟁의 관계, 평화운동의 모순, 전쟁과 식민지 문제에 있어서 온건 사민주의자의 위선 등에 대한 그의 분석은 지금도 참조할 만하지요. 하지만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그가 선택한 '프롤레타리아 독재국가 건설' 논리에 대해서는 재론의 여지가 많아요. 당시의 러시아는 충분히 혁명이 일어날 만한 나라였고, 레닌에게는 이를 조직해낼 지도력이 있었습니다. 그는 동물적이라고 할 법한 정치 감각으로 이런 선택을 했고, 이는 당대 러시아의 현실에 부합하는 측면이 있었어요. 하지만 혁명기를 거쳐 시작된 새로운 국가 건설 사업은, 분명 근대적 총동원 전쟁의 혁명적 연장이었습니다.' - <러시아 혁명사 강의> p.70

[장면②] '러시아 사람'을 짐작하게 하는 책, <가난한 사람들> 속의 '고리키'

여러분은 '고리키'하면 무엇이 떠오르세요? 아마, 러시아의 대문호이자 레닌 혁명의 든든한 지원군이었던 '막심 고리키'를 떠올리시겠죠. 그런데, 1990년까지는 대한민국의 첫 번째 경기인 스웨덴전이 열리는 니즈니 노브고로드의 이름이 '고리키' 였다고 해요. 출장으로 들렀던 군산의 작고 예쁜 동네 서점에 이 책을 발견했을 때, 저를 끌어들인 것은 고리키가 '내가 곧 가야하는' 러시아 작가라는 것이 첫 번째 이유였지만 책의 뒤쪽에 쓰여있던 이 문장의 인력도 무시할 수 없었어요. 

'스스로의 힘에 대한 믿음을 잃게 되면 우리 바깥의 무엇인가에 믿음을 두게 된다.'


어쩌면, 지금의 제게 가장 필요한 문장이었거든요. 자꾸만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며 어딘가에 의지하고 싶어졌었는데 이 문장과 함께 책까지 챙겨 넣었더니, 이번 러시아 여행에 대해서도 조금은 '안심'하게 되었다고 할까요? 고리키가 관찰한 러시아인들은 '바보들조차 자기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어리석고, 게으름뱅이조차 무언가 쓸 만한 자기만의 재능을 갖고 있다'라고 했는데, 어쩌면 이런 식의 '인간에 대한 애정'이야말로 인류 역사상 가장 단절적이었던 '혁명 실험'에 무한한 응원을 포기하지 않았던 '고리키의 신념'이 아니었을까요?

저는 신 없이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가엾게 여기는 것은 그들이 버림받았기 때문이지요. 제게는 사는 일이 지루합니다만... - p.105
신 좋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어째서 인간은 그토록 허약한 것입니까? 신부님, 제가 어떻게 하면 그런 부추김을 당하지 않을지 가르쳐 주십시오. 저는 짐승도 아니고 짐승이 제 안에 사는 것도 아닙니다. 제 영혼이 스스로 두려움을 느끼고 있을 뿐입니다.  - p.109
자신을 최우선으로 보살피게. 그래야 자네가 사람들에게 해 줄 수 있은 것이 많이 생기는 법일세. - p.155
오늘이 내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날이네. 내 영혼이 기쁨에 넘치듯 자네도 기쁨이 넘치기를 바라네. 특별히 자네에게 말일세! 자네는 아주 좋은 사람이야, 아주! - p.157


이제 러시아의 '사람'에 대해서도 힌트를 얻었으니, <가난한 사람들>이 그려내는 러시아 사람들에 대한 고리키의 애정과 함께 '니즈니 노브고로드'에서 열리는 스웨덴전을 즐겨 볼게요. 게다가, 저는 축구종가 잉글랜드의 경기를 보기 위해, 이 도시를 한 번 더 들를 예정이랍니다.

[장면③] 냉전 이전의 '우방'으로서의 역사, <에너미 앳 더 게이트>

러시아 혁명은 레닌이 시작했지만, 혁명의 실패는 스탈린의 관료주의에 의한 것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결국, '혁명세력' 내의 민주적인 의사 결정 절차를 망가뜨린 스탈린의 고집은, 소련을 2차 세계대전의 중심으로 끌어들였고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어요. 하지만 이 장면의 역설이라면, 이 전쟁 이후 오랜 시간 집요하게 이어졌던 동서 냉전의 주요 적대국이었던 '소련'에게 서방 세계의 미래가 걸려있었다는 거예요.

히틀러의 광기를 막아낼 최후의 보루가 바로 소련이었고, 그 최전선이 '스탈린그라드'였거든요. 당시 소련을 강권으로 통치하던 스탈린에 의해 이름을 빼앗겼던 도시, 제 세 번째 경기인 나이지리아와 아이슬란드의 경기가 열리는 '볼고그라드'입니다. <에너미 앳 더 게이트>는 전설적인 저격수였던 바실리 자이체프의 영웅담이기도 하지만, 볼고강가에서 나치 독일과 처절하게 대치했던 수많은 러시아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해요. 

영화에서 내내 보였던 처절한 잿빛은 절대 이길 수 없을 것만 같은 전쟁의 무거움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만 같았어요. 하지만, 그 잿빛의 도시는 전쟁을 승리와 함께 빛을 되찾았고, 혁명의 실패를 이겨내며 도시의 이름을 되찾았어요. 저는, 스탈린의 이름을 벗어나 예전의 빛나는 이름을 되찾은 '볼고그라드'에서의 아이슬란드 얼음소년과 나이지리아 표범들의 일전을 즐겨볼 생각입니다. 비록, 리오넬 메시의 마지막 월드컵을 기념하기 위해, 그토록 구하고 싶었던 아르헨티나 팀의 경기를 대신하는 '같은 조 다른 팀'의 경기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아직은 짐을 다 챙기지도 못했고, 러시아어를 한 문장도 제대로 읽을 수가 없지만, 저는 이제 곧 러시아로 떠납니다.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의 전망이 그리 밝지만은 않고, 우리에겐 지방 선거마저 집어삼킨 '세기의 담판'과 그 이후의 장밋빛 전망이 설레긴 하지만, 월드컵은 분명히 전 세계의 축제가 분명하니 일단은 마음껏 즐겨볼 생각입니다. 게다가, 여행을 준비하며 떠올려본 러시아의 장면들을 현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끌리고 있거든요. 앗, 보드카때문이라구요? 네, 조심하겠습니다. 전, 월드컵을 보러 러시아에 가는 것이니까요! 아, 맞네요. 저 이제 곧 출국이에요. 얼른 짐부터 싸야겠습니다.

기억해주세요. 이제 곧, 러시아에서 월드컵이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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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맞다. 월드컵이지! 러시아 월드컵 2018 에너미 앳 더 게이트 러시아혁명 막심고리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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