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킥 올려주는데요. 슛! 아, 들어갔어요! 파나마의 역사적인 순간입니다!"

지난 24일 2018 러시아 월드컵 G조 조별리그 2차전. 후반 33분 펠리페 발로이가 날아오는 공을 향해 미끄러지며 발을 쭉 뻗었다. 골문 안으로 공이 빨려 들어갔다. 파나마의 역사적인 '월드컵 본선 첫 골'의 순간이었다.

관중석에서 난리가 났다. 붉은 옷을 입은 파마나 응원단은 서로 얼싸안고 기쁨을 만끽했다. 마치 2002 한일 월드컵 당시 대한민국의 4강 진출을 온몸으로 기뻐하던 붉은악마 응원단의 모습 같았다. 만일 TV 채널을 돌리다 이 장면만 본 시청자가 있다면 파나마가 잉글랜드를 6:1로 침몰시킨 줄 알았을 것이다.

이번 러시아 월드컵을 통해 '역사상 첫 월드컵 본선 진출'이라는 쾌거를 이뤄낸 파나마는 이날 잉글랜드에게 대패했다. 그것도 6-1이라는 아주 굴욕적인 패배였다. 경기 결과는 분명 잉글랜드가 이긴 것이 확실했지만 파나마 응원단은 물론, 선수들과 감독까지도 행복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들은 전 세계인의 축제인 월드컵을 그 누구보다 가장 멋지게 즐기고 있었다.

파나마 응원단의 환호... 한동안 어안이 벙벙했다

TV를 통해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한참동안 어안이 벙벙했다. 6-1로 대패해도 저렇게 즐거울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같은 날 있었던 F조 대한민국과 멕시코의 경기를 회상했다. 2차전인 멕시코전에서 대한민국 선수들은 1차전인 스웨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보는 이도 이를 악물고 손에 힘을 주며 관전할 정도로 선수들은 죽을 힘을 다해 뛰고 또 뛰었다. 결과는 1-2 패배. 스웨덴전과 똑같이 1골 차이로 패배했지만 이번엔 분노가 아닌 납득이 가능했다. 과정이 아름다웠다.

손흥민은 멋진 중거리 슛으로 1골을 넣고도 인터뷰 내내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죄송하다"고 말했다. 반면에 파나마는 펠리페 발로이의 1골에 열광했다. 파나마 대표팀 펠리페 발로이는 6-1로 대패했지만 환하게 웃었고 누구보다 당당했다. 손흥민의 눈물과 펠리페 발로이의 미소가 머릿속에서 교차되었다.

멕시코전 패배 이후 수비수 장현수에 대한 마녀사냥이 시작됐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태클로 상대에게 패널티킥을 내준 장현수. 그를 향한 각종 악플들이 관련 기사들마다 줄줄이 달렸다. 방송 3사의 안정환, 이영표, 박지성 해설위원도 전 국가대표 선배로서 따끔한 일침을 놓았다.

누구보다 당사자의 마음이 가장 힘들 것이다. 그래도 장현수는 의연하게 대처하며 다음 경기에 집중하려는 의지를 보였다. 다행이었다. 그는 최근 한 인터뷰에서 "그동안 플레이를 보면 비난을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월드컵이다. 월드컵에서 반전을 일으키고 싶다"고 밝혔다.

잠도 안 자고 응원하는 국민이자 팬으로서 경기 과정에서 일어난 실수에 대해 분노하는 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선수의 실수에 대한 마녀사냥과 분풀이성 비난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남은 경기에서 실수를 만회하고 더 좋은 모습으로 보답할 수 있도록 격려하는 것이 마땅하다. 우리 인생도 실수 투성이가 아니던가.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일어난 안타까운 일

장현수 위로하는 손흥민 23일(현지시간) 러시아 로스토프나노두 로스토프아레나에서 열린 2018 러시아 월드컵 F조 조별리그 2차전 대한민국과 멕시코의 경기. 1-2로 경기가 종료되자 손흥민이 장현수를 위로하며 안아주고 있다. 2018.6.24

▲ 장현수 위로하는 손흥민 23일(현지시간) 러시아 로스토프나노두 로스토프아레나에서 열린 2018 러시아 월드컵 F조 조별리그 2차전 대한민국과 멕시코의 경기. 1-2로 경기가 종료되자 손흥민이 장현수를 위로하며 안아주고 있다. 2018.6.24 ⓒ 연합뉴스


1994년 미국 월드컵이 떠올랐다. 당시 콜롬비아는 강력한 우승후보로 꼽히며 국민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 그러나 조별예선에서 탈락하자 콜롬비아 팬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특히 자책골을 넣은 콜롬비아 선수 에스코바르에게 비난이 쏟아졌고 마녀사냥이 시작됐다. 결국 에스코바르는 월드컵 경기를 마치고 귀국한 지 열흘 만에 총격을 받아 사망했다.

지난 19일 2018 러시아월드컵 H조 조별리그 일본전에서 콜롬비아 선수 산체스가 경기 시작 3분 만에 반칙을 범해 퇴장 당했다. 현재 산체스는 살해 협박을 받고 있다. 그와 그의 가족을 살해하겠다는 협박글이 올라왔다. 제발 1994년의 비극이 재현되지 않기를 바란다.

도대체 축구가 뭐기에 선수들은 생사를 넘나들어야 할까? 전 세계는 축구가 선사하는 예측불가의 짜릿함에 열광한다. 승부를 가려야 하기에 경기는 더욱 박진감 넘치고 치열하다. 그러나 서로를 죽일 듯이 때리는 격투기장에서도 경기가 끝남을 알리는 공이 울리면 서로를 끌어안고 격려한다. 패자는 승자를 축하하고 승자는 패자를 다독인다. 스포츠 정신은 이런 것이다. 축구는 이겨야만 즐길 수 있는 스포츠가 되어버린 것은 아닌지 씁쓸하다.

사실 냉정하게 보면 피파랭킹 57위인 대한민국이 32개국 본선에 든 것만으로도 대단한 성과다. 게다가 대한민국의 9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은 아시아 국가 중에는 유일하다. 211개국으로 이뤄진 FIFA(국제축구연맹)에서 대한민국보다 월드컵 본선에 많이 진출한 나라는 단 5곳(브라질, 아르헨티나,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에 불과하다. 2018 러시아 월드컵 본선에서 네덜란드, 이탈리아, 칠레, 코트디부아르 등의 강팀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우리는 지금 기적을 경험하고 있다.

파나마를 통해 결과에 상관 없이 역사적 첫 순간을 마음껏 누리고 즐기는 모습을 본다. 파나마를 향한 국민들의 사랑이 느껴진다. 5골 차이로 패배해도 파나마 감독은 행복해 보인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네덜란드에 5:0으로 대패하고 그 즉시 경질 당한 차범근 전 감독의 모습과는 대조적이다. 

축구는 인생과 닮았다

손 잡고 군사분계선 넘는 남-북 정상 2018남북정상회담이 열리는 27일 오전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손을 잡고 건너고 있다.

▲ 손 잡고 군사분계선 넘는 남-북 정상 2018남북정상회담이 열리는 4월 27일 오전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손을 잡고 건너고 있다. ⓒ 한국공동사진기자단


축구에는 수많은 변수가 있기에 예측할 수 없다. 그래서 축구는 인생과 닮았다. '나의 인생'이라는 무대에 '나의 역사'라는 시간이 흐르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저마다 인생의 역사가 쓰여지고 있다. 우리가 사는 오늘은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새로운 날이다. 새로운 날들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인생에서 매순간 우리는 '역사적 첫 순간'을 맞이한다.

대한민국도 역사적 첫 순간을 맞이하고 있다. 대한민국 역사상 첫 촛불 대통령이 탄생했다. 촛불 대통령은 지난 4월 27일 북한 정상과 손을 꼭 잡고 군사분계선을 오가며 남북 땅을 함께 밟았다. 우리 국민뿐 아니라 전 세계를 울린 역사적 첫 순간이었다. 12초간 계속된 악수. 불과 2주전 싱가포르에서 70년간 단절됐던 북미 간의 대화가 시작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70년의 냉기가 12초의 온기로 바뀌었다. 북미 정상회담을 마칠 때까지도 온기는 지속되었다.

또 하나의 역사적 첫 순간. 대한민국 대통령이 타국에서 열리는 월드컵에서 대한민국 경기를 직접 관람하고 선수들을 격려했다. 월드컵 본선에 진출해서도, 골을 넣고도 스스로 죄인이라 생각하는 선수들에게 이보다 더 큰 힘이 되는 역사적 순간이 있었을까. 

부모는 자녀의 역사적 첫 순간에 열광한다. 나는 작년 임신 테스트기에 두 줄이 생긴 그때를 잊을 수 없다. 첫 임신이었다. 태아의 건강을 위해 기도했던 순간들이 지나고 올해 1월 아들이 태어났다. 출산이라는 역사적 첫 순간의 감동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얼마 전 5개월 된 아들이 첫 뒤집기에 성공했다. 이게 뭐라고 나는 파나마 응원단처럼 기뻐했다. 아들의 역사적 첫 순간을 남기고 싶어 동영상 촬영을 했다. 나는 아들의 역사적 첫 순간을 잊지 않을 수 있을까? 자녀가 성장할수록 부모는 왜 자녀의 역사적 첫 순간을 잊어가는 것일까? 나는 다짐한다. '아들의 조건'이 아닌 '아들의 존재'를 변함없이 사랑할 것이다. 아니, 사랑해야만 한다. 지금 내가 아들의 존재감 하나로 충분히 기뻐하고 있듯이. 아들이 어리다고 해서, 또 컸다고 해서 부모의 사랑이 조건적으로 변한다면 그것이 진정한 사랑인가.

나는 매일 인생의 역사적 첫 순간을 맞이하면서 그것이 첫 순간임을 잊는다. 내가 맞이하는 오늘, 지금의 역사적 첫 순간을 어떤 의미로 가치있게 만들 것인가? 그것은 나의 선택에 달려있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에 연연하지 말고 지금, 인생의 역사적 첫순간과 첫사랑에 빠지고 싶다.

국가대표는 말 그대로 국가를 대표하기에 어떤 경기에서든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러나 결과는 되돌릴 수 없다. 과정에 대한 분노는 처절한 반성을 통해 더 나은 미래로 승화시켜야 한다. 매 순간 역사적 첫 순간을 맞이하는 우리의 올바른 선택이 의미있는 역사를 만들어 갈 수 있다. 우리는 선택의 국가대표다. 우리의 선택으로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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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파나마 역사적 첫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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