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만든 '카잔의 기적' 27일(현지시간) 러시아 카잔 아레나에서 열린 2018 러시아 월드컵 F조 조별리그 3차전 한국과 독일의 경기. 김영권의 슛이 골로 인정되자 손흥민, 김영권, 장현수 등이 환호하고 있다.

▲ 한국이 만든 '카잔의 기적' 27일(현지시간) 러시아 카잔 아레나에서 열린 2018 러시아 월드컵 F조 조별리그 3차전 한국과 독일의 경기. 김영권의 슛이 골로 인정되자 손흥민, 김영권, 장현수 등이 환호하고 있다. ⓒ 연합뉴스


어쩌면 한국축구의 월드컵 도전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하고 감동적인 승리였다. 비록 16강 진출이라는 목표는 이루지 못했지만 한국 축구팬들은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 기적을 만날수 있었다.

신태용 감독이 이끄는 한국 축구 대표팀은 27일 오후 11시(이하 한국시간) 러시아 카잔에 위치한 카잔 아레나에서 열린 독일과의 2018 국제축구연맹(FIFA) 러시아 월드컵 F조 조별리그 3차전 경기에서 후반 추가시간에 터진 김영권과 손흥민의 연속골에 힘입어 2-0으로 승리했다. 이날 승리로 한국은 2연패 뒤 이번 대회 첫 승을 올리며 유종의 미를 거뒀고, 디펜딩 챔피언 독일은 최하위로 사상 첫 조별리그 탈락의 불명예를 안았다.

이미 스웨덴과 멕시코전 2연패로 벼랑 끝에 몰려있던 한국은 독일전을 앞두고 분위기가 어두웠다. 상대가 월드컵 우승국 독일인 데다 박주호와 기성용 등 주력 선수들을 잇달아 부상으로 잃는 악재까지 겹쳤다. 독일도 1승 1패로 한국을 이겨야만 자력으로 16강행을 노릴 수 있는 처지였다. 1.5군에 가까운 한국이 최정예멤버가 나선 독일과 진검승부를 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거의 모두가 한국의 패배를 예상했고 실제로 국내 전문가와 팬들의 분위기도 '그저 망신은 당하지 말자' 정도의 반응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한국은 이날 최강 독일을 상대로 이번 월드컵 들어 최상의 경기력을 선보이며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반전을 만들어냈다. 한국은 이날 익숙한 4-4-2를 가동했지만 선수 구성에서는 또다시 변화를 줬다. 공격진에서 손흥민의 최전방 파트너로 구자철이 호흡을 맞췄다. 중원에는 주장 기성용이 부상으로 결장하면서 정우영이 선발출전했고 중앙수비를 보던 장현수가 미드필더로 전진배치됐다. 좌우 측면에서는 문선민과 이재성이 자리했다. 4백은 홍철, 김영권, 윤영선, 이용이 지켰으며, 골키퍼는 이번에도 조현우가 맡았다.

기적의 원동력이 된 '무실점' 수비, 조현우의 선방 빛났다

기적의 원동력은 수비에서부터 시작됐다. 공교롭게도 신태용호 출범 이후 최고의 수비 조직력을 보여준 경기가 마지막에 나왔다. 지속적으로 수비 불안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녔던 신태용호가 최종전에서 하필 독일을 상대로 무실점을 이뤄낼 것이라 기대했던 팬들이 얼마나 될까.

한국 선수들은 이날 초반부터 몸을 사리지 않는 투지와 활동량을 보여주며 독일을 강하게 압박했다. 경기 내내 점유율은 독일이 압도적으로 높았지만 한국은 최전방에서 후방까지 수비라인이 촘촘한 간격을 유지하며 독일 선수들이 침투할 수 있는 공간을 많이 내주지 않았다. 처음으로 가동된 김영권-윤영선의 센터백 조합이 기대 이상의 안정된 수비를 보여줬고 지난 2경기에서 부진했던 장현수와 정우영, 이재성 등이 적극적으로 수비에 가담하며 힘을 보탰다.

조현우와 김영권의 활약은 특히 군계일학이었다. 이번 대회 명실상부한 한국대표팀의 MVP라고 할 만한 조현우는 독일전에서도 연이어 눈부신 선방으로 한국의 골문을 든든하게 지켰다. 조현우는 이날 경기에서도 무려 6개의 세이브를 기록하며 독일전 최우수선수로 선정되기도 했다. 조현우의 동물적인 반사신경과 빠른 상황 판단에 의한 선방이 없었다면 한국은 이번에도 일찍 선제골을 내주고 무너졌을 것이다. 독일전에 한정하면 현재 세계 최고의 골키퍼로 꼽히는 마누엘 노이어보다도 조현우의 활약이 더 빛난 하루였다.

[월드컵] 김영권, 결정적인 골! (카잔=연합뉴스) 진성철 기자 = 27일(현지시간) 러시아 카잔 아레나에서 열린 2018 러시아 월드컵 F조 조별리그 3차전 한국과 독일의 경기에서 김영권이 골을 넣고 환호하고 있다.

▲ [월드컵] 김영권, 결정적인 골! (카잔=연합뉴스) 진성철 기자 = 27일(현지시간) 러시아 카잔 아레나에서 열린 2018 러시아 월드컵 F조 조별리그 3차전 한국과 독일의 경기에서 김영권이 골을 넣고 환호하고 있다. ⓒ 연합뉴스


김영권의 안정감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사실 월드컵 개막 전까지만 해도 불안한 수비로 장현수와 함께 비난의 중심에 놓여있었던 김영권은 이번 러시아월드컵을 통하여 가장 명예회복에 성공한 선수로 꼽힌다. 독일의 공세가 있는 곳에는 늘 김영권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적극적인 몸싸움과 정확한 위치선정을 통하여 독일의 슈팅을 여러 차례 몸을 날려막아냈다. 특히 후반 추가시간에는 세트피스에 가담하여 값진 선제 결승골까지 뽑아내며 명실상부한 승리의 히어로가 됐다.

월드컵 내내 한국에 불리했던 심판 판정은 이날도 계속되는 듯했다. 심판은 이날도 독일의 거친 플레이에 대해서는 비교적 관대했지만 한국 선수들의 파울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경고 카드를 꺼내들었다. 김영권의 선제골도 처음엔 부심의 오프사이드 판정을 받으며 무산될뻔했다. 하지만 VAR 판독을 거쳐 판정이 뒤집히며 득점이 인정됐다. 앞선 경기에서 VAR 때문에 페널티킥을 허용하는 등 여러 차례 손해를 봤던 한국이 마지막 경기에서 수혜자로 거듭나는 기묘한 순간이었다.

'내가 오늘의 MOM'  27일(현지시간) 러시아 카잔 아레나에서 열린 2018 러시아 월드컵 F조 조별리그 3차전 한국과 독일의 경기. 2-0으로 대한민국이 승리하자 조현우가 환호하고 있다.

▲ '내가 오늘의 MOM' 27일(현지시간) 러시아 카잔 아레나에서 열린 2018 러시아 월드컵 F조 조별리그 3차전 한국과 독일의 경기. 2-0으로 대한민국이 승리하자 조현우가 환호하고 있다. ⓒ 연합뉴스


경기 후반은 사실상 정신력의 승리였다. 한국과 독일 선수들 모두 체력이 고갈된 가운데 반드시 이겨야만 16강진출을 노릴 수 있었던 독일은 골이 터지지 않는 초조함에 라인을 끌어올리고 무리한 공격을 하려다가 패스 실수를 연발했다. 경기 초반부터 독일보다 더 많이 뛰어다녔던 한국 선수들도 이미 지친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집중력을 유지했다.

한국은 이날 독일에 점유율을 내주면서도 기회가 되면 롱패스에 이은 측면 역습으로 여러 차례 독일의 문전을 위협했다. 후반 독일의 체력이 떨어지면서 빈 공간이 많아지자 중원에서 한국의 패스 연결 성공도도 높아졌다. 신태용 감독은 후반 교체카드로 주세종과 고요한을 투입하면서 끊임없이 빠른 스피드를 활용한 역습을 노린 것이 적중했다. 손흥민의 두 번째 추가골은 독일이 골키퍼 노이어까지 전방으로 올라가 극단적인 공격을 시도하다가 패스가 차단당한 틈을 놓치지 않고 역습에 성공하며 만들어낸 골이었다. 이번 월드컵 내내 유독 터지지 않았던 세트피스와 역습 상황에서의 득점찬스가 모두 독일전에서 나오며 골로 이어졌다는 것도 아이러니한 반전이다.

같은 시각 열린 스웨덴과 멕시코의 경기는 스웨덴이 3-0으로 완승했다. 16강 진출은 스웨덴과 멕시코의 몫이 됐다. 만일 멕시코가 승리했다면 한국이 16강 진출도 가능했던 상황이었기에 다소 아쉬운 결과였다. 결과론적이 이야기지만 진작 스웨덴이나 멕시코를 상대로 진작한 이러한 전술이나 경기력을 보여줬다면 어땠을까 싶은 회한도 남는 순간이었다.

비록 16강 티켓은 잡지 못했지만 마지막 순간에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었다는 것은 충분히 큰 성과다. 당초 3전 전패를 당하고 올 것이란 비관적인 전망이 득세했던 것에 비하면 한국축구는 선전했다. 스웨덴-멕시코와 한 골 차 패배를 당했지만 막상 붙어보니 생각보다 전력차는 크지 않았다.

하지만 수비진의 거듭된 실수, 판정 불운, 벤치의 아쉬운 용병술 등이 겹치며 우리가 준비했던 대로 경기를 풀어가지 못했고, 선수들은 여론의 비난과 부담감에 위축됐다. 첫 경기부터 김민우, 장현수, 손흥민 등 어느 때보다 선수들의 눈물이 많았던 대회이기도 했다. 하지만 마지막 경기에서나마 선수들은 회한의 눈물을 기쁨과 감동의 눈물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

[월드컵] 손흥민 1%의 기적 (카잔=연합뉴스) 진성철 기자 = 27일(현지시간) 러시아 카잔 아레나에서 열린 2018 러시아 월드컵 F조 조별리그 3차전 한국과 독일의 경기에서 손흥민이 골을 넣고 있다. 이날 경기에서 한국은 독일에 2-0으로 승리했다.

▲ [월드컵] 손흥민 1%의 기적 (카잔=연합뉴스) 진성철 기자 = 27일(현지시간) 러시아 카잔 아레나에서 열린 2018 러시아 월드컵 F조 조별리그 3차전 한국과 독일의 경기에서 손흥민이 골을 넣고 있다. 이날 경기에서 한국은 독일에 2-0으로 승리했다. ⓒ 연합뉴스


대회는 끝났지만... 아직 숙제는 남았다

선수들은 가장 힘들었을 독일전에서 부담감을 이겨내고 모처럼 '국가대표다운' 모습을 보여줬다. 그 어느 때보다 선수들이 똘똘 뭉쳐서 승리를 염원하고 있다는 것이 팬들에게도 전해질 정도였다. 실력차는 상대보다 한발이라도 더 뛰려는 열정과 부지런함으로 만회했다. 팬들이 그동안 태극전사들에게 간절히 원했던 모습도 바로 이렇게 "질 때 지더라도 우리의 색깔과 자존심을 보여주는 경기를 하자"는 요구였다. 이날 경기를 뛴 모든 선수들, 그리고 지켜본 모든 축구팬들에게 독일전이 한국축구사에 오래 남을 '인생경기'가 되었을 이유다.

다만 한편으로 독일전 깜짝 승리가 그동안 대표팀을 둘러싼 모든 논란에 면죄부가 되는 것은 경계해야 할 대목이다. 일단 최선을 다한 선수들, 감독을 비롯했다는 모든 코칭스태프들에 대해서는 그동안 수고했다는 박수와 격려도 필요하다. 하지만 한국축구가 지난 4년간 겪었던 각종 시행착오와 실수들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숙제로 남아있다.

냉정하게 말하면 지금보다 더 좋은 성과, 더 좋은 내용을 보여줄 기회가 충분히 있었음에도 한국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단명하는 감독의 리더십, 선수들의 고질적인 기본기 부족, 몇몇 스타플레이어에만 의존하는 빈약한 선수층, 특색 없는 축구스타일과 전술 등 급변하는 세계축구의 흐름에 맞추어 한국축구만의 새로운 방향성을 수립하는 것은 더 이상 미룰수 없는 시급한 과제가 됐다.

한국축구는 러시아월드컵에서 아픔을 딛고 미래를 향한 한 줄기 희망을 남겼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국이 이번 월드컵에서 결코 성공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독일전의 승리가 한국축구계에 실망한 여론을 달래는 방패막이로 그쳐서는 안된다. 4년 뒤 카타르 월드컵에서 또다른 위기를 겪지 않으려면 지금부터 다시 완전히 원점에서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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