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장의 시간이 10분 이상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엉덩이를 뒤로 빼고 공을 돌리기만 했다. 이런 경기 태도를 질타하는 야유가 관중석으로부터 그라운드를 향해 쏟아져 내렸다. 같은 시각 사마라 아레나에서 열린 콜롬비아와 세네갈 경기 결과가 콜롬비아의 1-0 승리 분위기로 굳어질 것이라는 정보가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일본과 세네갈은 승점(4점), 골 득실차(0), 득점 수(4득점), 상대 전적(2-2) 모두가 같아서 '페어 플레이 점수'로 최종 순위가 갈렸는데 2점 차이(일본 -4점, 세네갈 -6점)로 일본이 2위가 된 것이다. 하지만 그 페어 플레이 점수의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 공을 허무하게 돌리기만 한 얼굴 화끈거린 시간들은 페어 플레이 점수에 반영할 수 없는 문제점처럼 보였다. 다른 곳 경기가 그대로 끝났다는 소식이 알려진 순간 그들이 얼싸안고 기뻐하기에도 쑥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니시노 아키라 감독이 이끌고 있는 일본 남자축구대표팀이 한국 시각으로 28일 오후 11시 러시아 볼고그라드 아레나에서 벌어진 2018 FIFA(국제축구연맹) 월드컵 H조 폴란드와의 경기에서 0-1로 패했지만 아슬아슬하게 2위 자격을 얻어 아시아 국가 중 유일하게 16강에 오르는 영광을 누렸다.

어쩌면 축구는 '자존심'을 위한 스포츠

 25일 오전 0시(한국 시각) 러시아 월드컵 조별리그 H조 세네갈과의 경기에서 승리한 일본 대표팀 선수들이 기뻐하고 있다.

25일 오전 0시(한국 시각) 러시아 월드컵 조별리그 H조 세네갈과의 경기에서 승리한 일본 대표팀 선수들이 기뻐하고 있다. ⓒ 연합뉴스/AFP


콜롬비아와의 첫 경기에서 귀중한 2-1 승리를 거둔 일본은 세네갈과의 두 번째 경기에서 1-2로 끌려가다가 교체 선수 혼다 케이스케의 극적인 동점골 덕분에 2-2로 비겨 폴란드와의 이 경기를 비교적 홀가분하게 치를 수 있게 됐다. 심지어 지더라도 많은 골을 내주지 않으면 그리 어렵지 않게 16강에 올라갈 수 있었다.

경우의 수를 비교적 복잡하게 따지지 않아도 될 정도로 벌어놓은 승점 4점이 두둑한 일본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상대 팀 폴란드는 이미 2경기 모두를 패한 상태로 나서는 것이어서 이 경기에서 아무리 많은 골을 일본 골문에 퍼부어도 러시아에서 비교적 가까운 폴란드로 돌아가는 일정은 절대 바뀌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도 축구는 '자존심이 살아있는 스포츠'라고 생각했나 보다. 폴란드 선수들이 이번 월드컵 시드 배정 팀 중 가장 먼저 조별리그에서 미끄러진 사실을 조금이라도 덜어버리기 위해 끈질기게 일본을 상대했다.

그리고는 결국 59분에 프리킥 세트 피스 기회에서 멋진 결승골을 뽑아냈다. 미드필더 라팔 쿠자바의 왼발 감아차기 프리킥이 일본 골문 앞으로 날아들었을 때 공격에 가담한 수비수 얀 베드나레크가 멋진 오른발 발리 슛을 꽂아넣었다.

이번 월드컵에서 폴란드가 아무리 형편 없는 경기력을 드러냈다고 해도 일본에게까지 끌려갈 수는 없다는 자존심이 작동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이후에도 폴란드는 세계적인 골잡이 로베르트 레반도프스키가 자신의 커리어에 월드컵 골을 쌓아올리고자 부지런히 공간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일본은 더이상 골을 내줘서는 안 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요시다 마야가 중심에 선 일본 수비 라인은 간격을 더 좁혀가면서 더이상 골을 내주지는 않았다.

일본의 노골적인 공 돌리기, '페어 플레이 점수' 무색하게 만든 야유

 28일(한국시각) 러시아 볼고그라드에서 진행된 일본과 폴란드의 조별리그 최종전에서 폴란드의 라팔 쿠르자와(오른쪽)와 일본 히로키 사카이(가운데)가 경기에 임하고 있다.

28일(한국시각) 러시아 볼고그라드에서 진행된 일본과 폴란드의 조별리그 최종전에서 폴란드의 라팔 쿠르자와(오른쪽)와 일본 히로키 사카이(가운데)가 경기에 임하고 있다. ⓒ 연합뉴스/EPA


일본이 실점한 이후 후반전 시간은 묘하게 흘러갔다. 이대로 끝났다가는 경기 전 1위 자리에서 경기 후 3위 자리로 미끄러질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이에 일본 벤치에서는 65분에 우사미 다카시를 빼고 날카로운 오른발 킥 실력을 자랑하는 이누이 다카시를 들여보내 보다 공격적인 경기 운영을 지시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른 경기장 골 소식이 들려왔다. 74분, 콜롬비아 수비수 예리 미나가 시원한 스파이크 헤더 슛을 세네갈 골문에 성공시켰다는 것이다. 이 반전은 다시 일본에게 희소식으로 다가왔다.

이어서 일본 벤치에서는 82분, 골잡이 무토 요시노리를 빼고 수비형 미드필더 하세베 마코토를 들여보내 마지막 잠그기 전술을 지시했다. 이미 일본은 하세베가 들어오기 몇 분 전부터 노골적으로 공 돌리기를 시작했기에 관중석에서는 야유 소리가 흘러넘치고 있었다.

일본은 이미 이러한 상황까지 예상하여 치밀하게 시뮬레이션을 실시한 듯 보였다. 수비 라인부터 공격 라인까지 간격을 최대한 좁히고 그 위치를 뒤로 잔뜩 내려서 안전하게 공만 돌리는 축구를 펼친 것이다.

월드컵 16강이라는 성과가 아시아 축구 팀에게는 놀라운 업적이기에 그 선택도 이해 못 할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세계 최고 수준의 축구 축제 프로그램에서 이렇게 얼굴 화끈거리는 꼭지는 없어야 한다.

더 우스운 꼴이 세네갈에 비해 일본이 페어 플레이 점수에서 2점 높기(경고나 퇴장에 해당하는 징계를 덜 받음) 때문에 나머지 모든 조건이 같은 세네갈을 3위로 밀어버렸다는 것이다. 이렇게 얼굴 화끈거리는 축구를 10분이 넘도록 펼치고도 '페어 플레이' 점수로 다음 라운드에 안착한 것은 실로 아이러니다.

'침대 축구'에 '노골적인 공 돌리기', 예방법 없을까?

 28일(한국 시각) 러시아 볼보그라드에서 진행된 2018 러시아 월드컵 H조 조별리그 최종전에서 16강 진출을 확정한 일본 대표팀 선수들이 자축하고 있다.

28일(한국 시각) 러시아 볼보그라드에서 진행된 2018 러시아 월드컵 H조 조별리그 최종전에서 16강 진출을 확정한 일본 대표팀 선수들이 자축하고 있다. ⓒ 연합뉴스/AP


월드컵과 축구가 앞으로도 지금 만큼 사랑을 받기 위해서 적어도 이렇게 얼굴이 화끈거리는 게임 풍토는 점점 사라져야 한다. 아름다운 기술과 아찔한 스피드가 넘치는 초록 그라운드, 박진감 넘치는 공 다툼이 후반전 추가 시간이 끝날 때까지 이어지려면 제도와 규정을 바꿔서라도 고쳐야 한다.

딱 하루 전 월드컵 우승 팀 독일을 상대로 후반전 추가 시간에 기적의 승리를 이끌어낸 한국 선수들처럼 모든 선수가 온몸 부서져라 뛰어달라는 것도 아니다. 관중석이나 생중계 TV 앞에 앉아서 축구를 통해 미래를 꿈꾸는 어린이들을 위해서라도 더 이상 부끄러운 게임이 진행되는 것을 최소화 해보자는 뜻이다.

이미 다른 스포츠 종목에서도 '월드컵'이라는 원조 축구 용어를 빌려다 쓰고 있을 정도로 이 대회의 가치는 상상 그 이상이다. 바로 거기에서만이라도 부끄러운 축구를 예방했으면 좋겠다. 이것은 최근 몇 년 사이에 수많은 축구팬들도 공감하는 고의적인 시간 끌기 '침대 축구' 퇴치 방법을 고민하는 것과 연계시키는 것이 좋겠다.

오랜 고민 끝에 VAR(비디오 판독 심판) 시스템을 월드컵까지 들여왔으니 그 기술과 노하우를 이런 부끄러운 축구를 몰아내는 도구로도 충분히 활용하자는 것이다. 드러 누워서 시간을 끄는 듯한 혐의점이 보이면 다른 각도나 느린 화면을 꼼꼼히 돌려서라도 엄살꾼들을 일정 시간 경기장 밖에 두어야 한다. 이는 아이스하키의 마이너 페널티 규칙을 빌려다 써도 좋을 듯하다.

일본이 경기 끝무렵 그랬던 것처럼 노골적으로 공을 수비 지역으로만 돌리는 경우는 농구의 24초룰이나 핸드볼에서 시간을 지연시킬 때 팀에게 주는 페널티 규정을 빌려와서 축구에 어울리는 새 규정으로 정착시킬 수 있을 것이다. 중앙선 아래로 백 패스했을 경우에는 그 공을 받은 지점에서 상대 팀에게 간접 프리킥 기회를 부여하는 것처럼 말이다. 또는 노골적으로 시간 끌기를 위해 백 패스를 보낸 선수를 일정 시간 이상 경기장 밖으로 내보내는 규정을 둘 필요도 있다.

존중이라는 말을 경기장 곳곳에 써 놓거나 '뷰티풀 게임'이라는 수식어로 포장한다고 해서 축구가 정말로 그렇게 바뀌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FIFA는 주심의 종료 휘슬이 울리기 훨씬 전부터 값비싼 관중석을 떠난 사람들의 목소리를 이제라도 귀담아 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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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2018 러시아 월드컵 H조 결과(28일 오후 11시, 볼고그라드 아레나)

★ 일본 0-1 폴란드 [득점 : 얀 베드나레크(59분,도움-라팔 쿠자바)]

◇ H조 최종 순위표
콜롬비아 6점 2승 1패 5득점 2실점 +3 ***** 16강 진출!
일본 4점 1승 1무 1패 4득점 4실점 0 ***** 16강 진출!
세네갈 4점 1승 1무 1패 4득점 4실점 0 (페어 플레이 점수에서 점 뒤져 16강 탈락)
폴란드 3점 1승 2패 2득점 5실점 -3

◇ 16강 대진표 확정판
☆ 프랑스 - 아르헨티나(6월 30일 토요일 오후 11시, 카잔 아레나)
☆ 우루과이 - 포르투갈(7월 1일 일요일 오전 3시, 소치 피쉬트 스타디움)
☆ 스페인 - 러시아(7월 1일 일요일 오후 11시, 모스크바 루즈니키 스타디움)
☆ 크로아티아 - 덴마크(7월 2일 월요일 오전 3시, 니즈니 노브고로드 스타디움)
☆ 브라질 - 멕시코(7월 2일 월요일 오후 11시, 사마라 아레나)
☆ 스웨덴 - 스위스(7월 3일 화요일 오후 11시, 상트페테르부르크 스타디움)
☆ 일본 - 벨기에(7월 3일 화요일 오전 3시, 로스토프 아레나)
☆ 콜롬비아 - 잉글랜드(7월 4일 수요일 오전 3시, 스파르타크 스타디움)
축구 월드컵 일본 폴란드 콜롬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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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대인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일합니다. 축구 이야기, 교육 현장의 이야기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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