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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신암리에서 나온 신석기 시대 '비너스'가 있다. 보통 이 비너스를 오스트리아 빌렌도르프 비너스와 견주어 설명하고, '풍요와 다산'의 상징으로 본다. 그런데 빌렌도르프 비너스를 '풍요와 다산'의 상징으로 보는 것은 처음부터 잘못된 가설일 수 있다. 그것은 풍요와 다산을 상징한다기보다는 '구석기인의 생명관'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것을 풀기 위해 빌렌도르프 비너스, 프랑스 로셀의 비너스, 러시아 코스텐키 비너스, 울산 신암리 여인상 해석을 3회에 걸쳐 싣는다.  아래 글은 그 세 번째 글이다.- [편집자 말]
 
신석기 시대 중기. 울산시 울주군 서생면 신암리 유적 제2지구에서 나옴. 높이 3.6cm. 고은강 시인은 그의 시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에서 “벗겨봐, 파닥파닥 발아하는 내 아름다운 각질을” 하고 노래한다. 그는 빌렌도르프 여인상에서 생명의 역동성을 본 것이다.
▲ 여자상 흙인형(왼쪽)과 빌렌도르프 비너스 신석기 시대 중기. 울산시 울주군 서생면 신암리 유적 제2지구에서 나옴. 높이 3.6cm. 고은강 시인은 그의 시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에서 “벗겨봐, 파닥파닥 발아하는 내 아름다운 각질을” 하고 노래한다. 그는 빌렌도르프 여인상에서 생명의 역동성을 본 것이다.
ⓒ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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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에도 선사 시대 비너스 상이 있다. 신석기 중기 기원전 3500년에서 2500년에 흙으로 빚은 상이다. 위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머리와 팔다리가 없다. 마치 토르소(torso) 같은 상이다. 이 여인상은 빌렌도르프 비너스하고는 그 첫 느낌부터 다르다. 우선 여자 몸의 특징을 잘 붙잡아 아주 사실적으로 빚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젖가슴, 잘록한 허리, 어깨보다 조금 넓은 골반과 엉덩이를 보면 현대 여성의 몸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런데도 학자들은 이 여인상을 두고 빌렌도르프 비너스와 마찬가지로 다산과 풍요를 바라면서 빚은 것으로 본다.
 
여성 토우는 아마도 신석기 시대 모계 씨족사회에서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의미로 만들어졌던 것으로 해석된다. 특히 가슴과 엉덩이를 과장해서 표현하고 있는 것은 오스트리아 구석기시대 빌렌도르프 비너스처럼 생식과 출산을 상징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한국미의 재발견 첫 번째 권 <선사 유물과 유적>(이건무·조현종 글, 솔) 96쪽

나는 이런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 생김새부터 판이하게 다른데 왜 이렇게 보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 글쓴이는 "특히 가슴과 엉덩이를 과장해서 표현하고" 있다고 하는데, 맨눈으로 봐도 전혀 그렇지 않다. 과장한 것이 아니라 아주 '사실적'으로 표현했다고 하는 게 맞는 게 아닐까. 골반이 넓게 보이기는 하지만 이는 일부러 그랬다기보다는 특징을 잡아 빚다 보니 이렇게 된 것이다.



아마도 글쓴이는 빌렌도르프 비너스의 관점으로 우리나라 신석기 여인상을 보고 있는 것 같다. 또 이런 여인상은 대개 '생식과 출산을 상징'한다는, 어떤 지식(또는 관념이나 선입관)에 기대어 보고 있다. 미술 공부를 할 때 이런 태도는 좋지 않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안 보이고, 어떤 때는 못 보게까지 한다. 그래서 위 사례와 같이 엉뚱한 얘기를 할 때가 많다. 미술 공부를 할 때는 자기 눈을 믿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 눈으로 보는 만큼, 보이는 만큼 새롭게 알아가는 것이다.



 
2006년부터 발행하여 쓰고 있는 십 원짜리 동전 지름은 18밀리미터다. 이 동전 두 개를 이어놓으면 정확히 신암리 비너스 크기다. 이렇게 작게 빚어 나뭇가지 위에 놓고 굽는다는 것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아마 다른 그릇 속에 넣어 구웠을 것이다.
▲ 울산 신암리 비너스의 실제 크기 2006년부터 발행하여 쓰고 있는 십 원짜리 동전 지름은 18밀리미터다. 이 동전 두 개를 이어놓으면 정확히 신암리 비너스 크기다. 이렇게 작게 빚어 나뭇가지 위에 놓고 굽는다는 것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아마 다른 그릇 속에 넣어 구웠을 것이다.
ⓒ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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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와 팔다리를 붙여 구운다 하더라도 8cm

이 여인상을 다산과 풍요를 바라면서 빚었다고 보는 것은 어쩌면 너무 단순하게, 아니 그 반대로 너무 심오하게 보는, 그런 억지해석에 가깝다. 한 글자로 하면 "헐!"이다. 이 여인상은 3.6센티미터밖에 안 된다. 십 원짜리 동전 두 개를 붙여놓았을 때 크기다. 이렇게 작은 상에 머리와 팔다리를 붙여 구운다 하더라도 8cm를 넘지 않을 것이고, 또 팔다리가 온전히 붙은 채 나오기도 힘들다. 불 속에서 갈라지고 떨어질 가능성이 아주 높다. 어쩌면 처음부터 목과 팔다리 없이 빚었을지도 모른다. 또 어느 신석기 사기장이, 아니 사기장의 자식이 곁에 있다가 장난삼아 흙으로 쪼물딱쪼물딱 빚어 그릇을 구울 때 같이 놓지 않았을까. 사실 이 여인상은 너무 작아 어른 손가락으로 빚기 힘들다.


물론 학자들 짐작처럼 다산과 풍요를 바라면서 빚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적어도 3.6, 8센티미터보다는 더 크게 빚어야 하지 않을까. 당시 뾰족밑 빗살무늬 그릇도 40cm가 넘고, 어떤 것은 90cm도 넘게 빚었던 신석기 사기장이다. 그런 사기장이 풍요와 다산을 바라면서, 그렇게 '심오한 뜻'을 담아 여성의 몸을 빚었다면 더 크고 섬세하게 빚어야 하지 않는가 싶어서 하는 말이다.

신석기 아이가 장난삼아 빚은 여인상

이 여인상을 빚은 흙도 정밀하게 분석해 봐야 한다. 직접 눈으로 볼 수 없어 단정할 수는 없지만 왼쪽 가슴을 보면 작은 돌을 볼 수 있다. 흙을 제대로 고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몸도 쩍쩍 갈라져 있다.


 
왼쪽 가슴을 보면 작은 돌을 볼 수 있다. 흙을 반죽할 때 돌을 잘 고르지 않은 것이다.
▲ 울산 신암리 비너스 가슴 왼쪽 가슴을 보면 작은 돌을 볼 수 있다. 흙을 반죽할 때 돌을 잘 고르지 않은 것이다.
ⓒ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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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기 사기장들은 그릇을 구우면서 수없이 시행착오를 거쳤다. 처음에는 찰흙으로 빚어 구웠을 것이다. (찰흙은 그릇을 빚기 수월하니까!) 먼저 찰흙 속에서 돌멩이나 나무뿌리 같은 것을 골라낸다. 그런 다음 물로 반죽하여 차지게 발로 밟아 가며 다진다. 그런데 이렇게 해도 불에 구우면 쩍쩍 갈라지는 것이 아닌가! 그러다 우연히 모래가 좀 섞인 찰흙으로 그릇을 굽게 되었다.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그릇이 갈라지지도 않고 전보다 더 단단했다.



그 뒤로 신석기 사기장들은 찰흙에 곱돌을 가루 내어 섞어 반죽했다. 그도 없으면 석면, 운모(모래에 많이 들어 있다), 돌가루, 조가비 가루, 흑연 같은 것을 조금 넣어 반죽했다. 주로 운모와 곱돌을 많이 썼다. 이렇게 하니까 더 이상 그릇이 갈라지지 않고 단단하게 나왔다. 그때는 가마에 굽지 않았다. 땅을 조금 파고 그 안에 나뭇가지나 장작을 쌓고 그 위에 그릇을 놓고 불을 땠다. 이때 불 온도는 약 600~700도(℃) 정도였다.


신암리 여인상의 상태를 봤을 때 이것은 처음부터 여인상을 구우려고 마음먹고 구운 것이 아니다. 그릇을 구을 때 불구덩이 옆에 있는 흙을 대충 반죽하여 구웠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래서 돌을 제대로 골라내지 못했고 곱돌이나 운모도 섞지 않았다. 몸이 쩍쩍 갈라진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광주드림에도 보냅니다.


태그:#김찬곤, #울산신암리여인상, #신암리비너스, #빌렌도르프의비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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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 말에는 저마다 결이 있다. 그 결을 붙잡아 쓰려 한다. 이와 더불어 말의 계급성, 말과 기억, 기억과 반기억, 우리말과 서양말, 말(또는 글)과 세상, 한국미술사, 기원과 전도 같은 것도 다룰 생각이다. 호서대학교에서 글쓰기와 커뮤니케이션을 가르치고, 또 배우고 있다. https://www.facebook.com/childk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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