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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청주의 난민수용소에 교회를 짓고, 그 교회는 난민들의 급식소 역할을 하였다. 교회는 이웃을 위한 교회일 때에만 교회이다.
▲ 난민수용소에 교회를 개척한 아버지 1955년 청주의 난민수용소에 교회를 짓고, 그 교회는 난민들의 급식소 역할을 하였다. 교회는 이웃을 위한 교회일 때에만 교회이다.
ⓒ 홍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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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책상위에는 한 장의 사진이 놓여있다. 아버지 사진이다. 1955년 청주의 변두리 난민수용소에 교회를 벽돌 한 장 한 장 쌓아 세우던 현장감 있는 사진이다. 질통지고 못질하고 기초를 다지는 작업은 물론 교인들이 함께 했다. 전쟁의 상흔이 다 가시기 전에 교회가 가장 필요한 것은 급식소였다. 특히 난민으로 북에서 내려온 사람들에게 밥 한그릇이 하늘이기에 아버지에게 교회는 여러 구호물품을 조달받아 전해주는 전달자가 된 것이다.  

유엔 난민기구는 한국전쟁중인 1951년 이 전쟁으로 인한 난민들을 위기에서 탈출시키고, 그들을 구조하기 위해 구성된 국제조직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종전 초반 무상원조가 없었다면 적게는 수백만명 많게는 인구 절반이 극심한 기아상태에 시달렸을 것이라는 예측도 있다.

한국전쟁 당시 발생한 난민 규모는 600만 여명으로 미국, 캐나다, 유럽, 호주, 남미, 인도로 흩어졌고, 가까운 일본으로도 갔다. 기네스북에 가장 많은 난민을 실은 수송선은 미국의 메러디스 빅토리호인데 1950년 12월 22일, 1만 4000 여명의 난민을 수송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 배에 탔던 사람 중에 문재인 대통령 부모님도 있었다. 현재 해외거주 800만 여명의 한인들은 1960년대 미국, 캐나다, 유럽, 호주로간 이민자들을 제외하고 거의 난민 출신들이다.

제주에 500명의 예멘 난민들이 들어와서 나라가 온통 난리다. 우리나라 인구의 10만분의 1정도가 들어왔다고 호들갑을 떠는 것이다. 2016년 겨울쯤 독일 교회 관계자들의 한국의 교회 관계자들과 간담회를 연 적이 있었다. 당시 독일에서는 이슬람 난민 문제가 사회적 이슈였다. 거기 참석했던 한국 교회 관계자들은 "왜 독일은 120만 명 정도의 이슬람 난민을 수용하는가라면서 이해할 수 없다"고 하며 이슬람의 호전성과 문란함 등 부정적인 이야기를 비추었다.

그러자 독일인은 이렇게 이야기했다. 독일 인구가 8000만명인데 120만정도 난민이 들어온 것을 다음에 비유했다. 한 교실에 80명의 학생들이 있는데, 1명이 새로 들어오면 큰 영향이 있는가 하며 반문했다. 그리고 "이슬람도 평화를 존중하는 종교이기에 그들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면서 성경 출애굽기에 나오는 여호수아의 말, 두려워하지 말라고 한 격려의 말을 전했다.

그리고 독일 교회 관계자들은 "독일은 난민이 들어와서 오히려 사회적 문화, 연대의 기운이 더 활성화되었다"고 설명했다. 특히 독일 교회는 디아코니아( 독일의 개신교 단체로 사회적 약자에 대한 지원을 해주는 전국적인 네크워크)가 직접 개입을 해서 난민을 섬기다보니 교회를 다니다가 안 나왔던 이들도 다시 교회에 출석하는 기이한 현상도 벌어진단다. 더 나아가 이슬람인 난민들이 자기나라 주변의 이슬람국가들은 자신들을 받아주지 않는데, 기독교 국가인 독일에서 흔쾌히 자신들을 받아 주는 것으로 인해 기독교로 개종하는 사례도 나타난다고 설명했다.

그들이 온 목적은 다 하나, 생존을 위한 것
 
예멘 난민 신청자들이 29일 오후 제주시 일도1동 제주이주민센터에서 국가인권위 순회 인권상담을 위해 대기하고 있다.
▲ 순서 기다리는 예멘 난민신청자들 예멘 난민 신청자들이 29일 오후 제주시 일도1동 제주이주민센터에서 국가인권위 순회 인권상담을 위해 대기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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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보면 나는 한국전쟁이후 세계의 수많은 나라들이 보내온 소중한 생명의 후사들로 인해 연명해온 사람이다. 어렸을 때 교회가 급식소였으니 늘 거기에는 구호물자가 있었고 가난하지만 배를 채울 수 있는 최소한의 먹거리는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얼마 전 제주도에서 만난 예멘 친구들은 대부분 세월호 세대들이었다. 20-28세의 이들은 마치 나의 아들과도 같게 느껴졌다. 나의 어린 시절과 나의 아들들의 얼굴들이 오버랩되어 가슴이 미어졌다. 나의 아들이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즐긴다고 하니, 눈이 동그랗게 되면서 자기도 노래를 좋아한다고 스마트폰의 영상을 보여준다. 이들이 가짜일까? 아니다.

이 친구들이 온 목적은 단 하나이다. 생존을 위해서다. 물론 이들은 난민심사를 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1994년 이래 3만 4000명이 난민신청을 하였으나 결국 난민지위를 획득한 사람들은 826명에 불과하다.

결국 얼마 안있으면 그들 중 일부는 난민지위를 획득하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과거 사례를 보면 2.4%에 불과하다. 아니면 인도적 체류자로 분류될 것이다. 이도저도 아니면 본국송환 내지 타국으로 송출되어질 것이다.

500년 전 스위스 제네바에는 장 칼뱅이라는 프랑스출신 개혁가가 난민신세로 개혁운동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가 임종을 얼마 앞두고 획득한 국적은 서러움과 회한의 결과물이었다. 그래서 칼뱅은 그 도시에 이주민과 난민을 위한 안전장치를 만들어, 당시 전 세계에서 외국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도시로 만들었다. 그 결과, 오늘날 국제기구 200여개가 제네바에 존치하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제주도가 평화의 섬으로 남길 원하는가. 먼저 배척과 혐오의 눈길을 거두었으면 한다. 한국, 아시아와 세계의 평화의 심장부로 역할을 하기를 바라는가. 사선을 넘고 이 땅에까지 찾아온 난민들을 따뜻하게 맞이하면 어떨까? 평화는 바로 거기에서 시작된다.
 
사과드립니다
이 글 내용 가운데 일부는 캐나다 동포 자유기고가 강현(sarnia)씨의 글 '배은망덕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을 보면서'에서 인용했습니다.

애초 글을 인용하면서 원 저자에게 허락을 받지 않았고, 인용표기를 누락했습니다. 이 점 저자와 독자여러분께 사과드립니다.

덧붙이는 글 | 필자는 한국디아코니아 상임이사입니다.


태그:#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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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대 신학대학원 독일 하이델베르크대 개신교 신학부 박사 한신대 강사 한국연구재단 연구교수 한국디아코니아 대표이사 수원에서 난민사회적 기업으로 YD케밥하우스를 운영하며 난민쉼터와 노숙인 도움행동을 하고있다. 식탁에서 시중을 든다는 의미의 디아코니아를 실천하고 이론화하는 것을 직무로 여기며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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