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트맨과 와스프>의 두 한 장면.

<앤트맨과 와스프>의 두 한 장면. ⓒ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사회를 떠들썩하게 한 범죄자나 유명인 혹은 공인도 아닌 한 개인의 이름이 청와대 청원게시판에 거론됐다. 마블 스튜디오 인기시리즈를 번역해 온 박지훈 번역가의 작품 참여를 반대한다는 청원 글이 올라온 것.

최근 개봉한 <앤트맨과 와스프>(<앤트맨2>)를 두고도 때 아닌 '박지훈 찾기'가 이어졌다. 관객들은 번역 투와 몇몇 단어 사용을 근거로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디스패치>는 '정말, '그분'이 아닌가요?"…'앤트맨과 와스프', 자막 논란' 이라는 기사로 사실상 <앤트맨2>의 번역가가 박지훈이라고 확정하기도 했다.

박지훈 번역가의 이전 필모그래피를 훑으며 '오역의 역사'를 논하는 각종 커뮤니티 글과 그것을 그대로 옮기는 일부 매체들의 기사는 곧 특정인의 '퇴출'을 목표로 한다. 의도했든 아니든 말이다.

이게 과연 올바른 흐름일까. <오마이뉴스>는 수입사, 배급사 등 번역 관계자들을 두루 접촉했다. 취재원 보호를 위해 영화관계자로 통칭한다.

<오마이뉴스> 취재에 응한 이들이 공통적으로 가장 먼저 지적한 것은 '번역가는 을 중에 을'이라는 것이다. 수입사 혹은 직배사(디즈니, 폭스, 워너브러더스 같이 세계 시장에 직접 영화를 배급하는 글로벌 회사)와 작업하는 영화 번역 작가는 도서 번역 작가와 달리 작업을 맡는 순간 자막의 권리 일체를 갑에게 넘기게 된다. 즉, 수입사나 직배사 측에서 자막에 대한 권리와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이다. 실제 영화 번역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살펴봤다.

질문1. 번역가의 이름은 꼭 공개되어야 하나

누리꾼을 위시한 여러 매체에선 번역가의 이름을 공개하지 않는 <앤트맨2> 관계사들을 지적했다. 이 불똥이 곧 개봉 예정인 <미션 임파서블: 폴아웃>(아래 <미션 임파서블6>)에까지 튀었다. 두 작품 모두 박지훈 번역가가 작업한 게 아니냐는 '의심'을 받았기 때문.

<미션 임파서블6>의 국내 배급을 맡은 롯데엔터테인먼트 측은 "영화 개봉 전에 번역가 논란에 편승해서 이슈화 되는 건 곤란하지만 박지훈 작가가 아니라는 것만 확인드린다"며 "개봉되는 영화 엔딩크레디트에 공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대표: 캐롤 초이) 측 역시 홍보대행사를 통해 "마블 시리즈 등 디즈니 작품은 번역가가 따로 요청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그간 번역가의 이름을 엔딩크레디트에 넣거나 따로 공개한 적이 없다"고 밝혀왔다.

일부 관객들은 알권리를 근거로 공개를 외치고 있지만 해외에서도 번역가 공개 문제는 영화사 측의 선택의 문제로 받아들이는 게 일반적이다. (참고글: Subtitlers Are The Unsung Heroes of Filmmaking, https://c11.kr/2kgi) 국내에서도 비슷하다. 공익 영역이 아닌 이상 수입사나 배급사의 결정이 절대적인 것.

영화 관계자 A는 "관습적으로 번역가 이름을 엔딩크레디트에 넣긴 하지만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법은 없다"며 "유명 번역가가 참여하는 등 영화 홍보 과정에서 도움이 될 것 같으면 적극 넣는 경우도 있다"고 답했다. 다만 이 관계자는 "직배사나 해외 세일즈사에서 빼는 걸 요구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경우를 제외하면 번역가 이름을 공개하는 편"이라고 덧붙였다.

또 다른 관계자 B 역시 "직배사 영화가 아닐지라도 번역가 이름을 넣지 않는 경우도 많다"며 "번역가가 자신의 이름을 알리려 한다고 그러면 넣고, 닉네임이나 팀 이름을 넣기도 하는데 이젠 디지털 방식이라 (기술적으로는) 이름을 자유롭게 넣을 수 있다"고 전했다.

참고로 국내 개봉작 중 중소수입사가 들여온 작품 상당수는 번역가의 이름을 엔딩크레디트 전후로 넣는 편이다. 직배사의 경우엔 회사마다 다르다. 폭스와 워너브러더스는 대체로 번역가의 이름을 넣지만, 디즈니 영화 중 마블 시리즈는 앞서 언급한 대로 공개하지 않는 흐름이었다.

 오역 논란과 함께 또 다른 마블 영화 <데드풀>은 상대적으로 좋은 번역이라고 평가 받으며 번역가에 대한 일부 팬층이 생기기도 했다.

오역 논란과 함께 또 다른 마블 영화 <데드풀>은 상대적으로 좋은 번역이라고 평가 받으며 번역가에 대한 일부 팬층이 생기기도 했다. ⓒ 20세기 폭스 코리아


질문2. "자질 의심" 받는 번역가, 왜 교체되지 않나

두 번째 질문이다. 잦은 오역 등 팬들의 말대로라면 '자질이 의심되는데'도 왜 같은 번역가를 쓰는 걸까. 팬들의 주장대로 핵심 대사에서의 오역은 자칫 영화 감상을 크게 방해하거나 엉뚱한 방향으로 내용을 유도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관계자 A는 "작품의 특성에 따라 여러 번역가를 쓰는 편이라 반드시 한 사람만을 고집하진 않지만 팀워크가 생기면 해당 번역가와 계속 관계를 유지하는 편"이라면서 "사실 번역가를 고용할 때 이전 필모그래피를 보는 등 처음 업계에 발을 디디기까지 번역가들 입장에선 진입의 장벽이 높은 편"이라 말했다.

관계자 B도 비슷했다. "첫 단추가 중요하지 한 번 작업해서 잘 맞는다면 굳이 바꾸진 않는다"며 "돈이 없는 수입사는 경력이 없는 번역가를 쓰거나 불법 웹하드 업체에서 연습 삼아 자막을 넣는 이들을 쓰는 경우도 있다"고 귀띔했다.

"결국 갑을 관계다. 하지만 계약서를 반드시 쓰진 않는다. 수입사에 따라 구두로 작업을 맡기는 경우도 많다. 직배사라면 수입사보다 더욱 작가를 바꾸기 쉽지 않을 것이다. 작품 마다 계약을 새로 하기 쉽지 않고 미국 본사에서도 잦은 계약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걸로 알고 있다. 그래서 군소 수입사는 직배사와 작업하는 번역가를 섭외하기 어렵다." (관계자 B)

관계자 C는 본질적인 부분을 언급했다. 앞서 언급한 책임의 문제였다. 그는 "어떤 번역가를 쓰든 자막은 결국 수입사나 직배사의 것이고 오역 등의 문제가 생기는 건 그만큼 검수 시스템이 없다는 뜻"이라고 지적했다. 

질문3. 영화 번역 프로세스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

마지막 세 번째 질문이 남았다. 그렇다면 번역가가 작업하는 과정은 과연 합리적이고 정상적일까. 복수의 관계자들이 말한 '신뢰 관계', '팀워크'라는 건 곧 해당 수입사와 배급사가 요구하는 조건들을 번역가가 얼마나 잘 들어주며 맞춰주느냐의 문제였다. 관계자 B가 말을 보탰다. "디즈니 같은 직배사들의 요구가 굉장히 까다롭고 작업 환경 또한 열악하다고 알고 있다"며 "박지훈 번역가는 그런 악조건을 상대적으로 잘 받아줬기 때문에 작업을 계속 할 수 있었던 것 아닐까"라고 전했다. 박지훈 작가는 워너브러더스, 폭스, 디즈니(주로 마블스튜디오 작품)가 배급하는 작품을 두루 해오다가 최근엔 주로 디즈니 작품을 맡고 있다.

번역가의 작업방식은 대사가 담긴 스크립트와 영상을 통해 이뤄진다. 제공받은 두 가지 자료를 비교하면서 번역가가 작업을 해서 보내고, 완성된 번역을 수입사나 직배사에서 검수한 뒤 수정할 게 있으면 번역가에게 피드백을 보낸다. 이 과정이 몇 차례 반복된 후 최종 번역 결과물이 확정된다. 기간의 차이가 있을 뿐 대개는 위와 같은 방식으로 이뤄진다.

관계자들 말을 종합하면 오역 문제는 1차적으로 작업 환경의 영향을 받기 마련이고, 곧 검수의 문제로 직결된다. 관계자 B는 "어떤 영화는 워터마크(보통 저작권을 뜻하는데 이런 워터마크를 사용해 영상의 주요 부분을 가리기도 한다-기자 주)로 도배가 된 영상이 오는 경우도 있고, 배우들이 아예 가려져 오는 경우도 있다"며 "개봉 전까지 여러 담당자가 적어도 수차례 이상 작품을 확인할 텐데 도장 찍고 결정한 사람은 뒤에 있고, 번역가에게만 비난의 화살이 쏠리는 건 부당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관계자 D와 E는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미국 본사에도 보고를 해야 하기에 직배사들이 검수를 굉장히 철저히 하는데 (심각한 오역이 나온다는 건) 분명 검수 과정이 없었거나 번역가가 작업하는 환경이 상당히 어려웠을 것임을 의미한다"며 그는 "여러 직배사 중 디즈니 영화와 같은 경우 환경이 좋지 않은 걸로 알려졌는데 박지훈 번역가가 그런 요구를 잘 받아줘서 일을 맡은 것으로 알고 있다. 아마 오역 논란이 불거졌던 <어벤져스3>도 제대로 된 영상을 받은 건 아니었을 것"이라 전했다.

"지금의 논란은 결국 한 사람에게 죽으라고 떠미는 꼴이다. 번역가도 사람인 이상 실수를 한다. 시스템으로 그걸 걸러내야지. 사실 이런 문제엔 디즈니가 더 창피해 해야 한다. 자막에 대한 권리 자체가 그들에게 있지 않나. 관리 감독하는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이다. 번역가들은 이런 논란에 자괴감을 느끼는 분위기다." (관계자D)

"번역가가 일하는 기간이 얼마나 되는지가 핵심이다. 도서 번역처럼 수개월 시간을 주는 게 아니다. 스크립트와 영상을 번역가에게 넘겨준 때부터 작업을 시작할 수 있는데 통상 길어야 일주일 정도다. 스크립트만 주는 경우도 많진 않지만 가끔 있다. 영상 자체도 배급사나 수입사마다 제공 방식이 다른데 워터마크가 가득하거나, 배우들의 모습을 까맣게 처리한 채 소리만 들리는 영상 등 여러 사례가 있다. 사실상 오역은 언제든 나올 수 있고, 모든 작품에 있다고 봐야 한다. 티가 안 났을 뿐이지." (관계자E)

 영화 <배트맨 대 슈퍼맨 : 저스티스의 시작>의 작품 포스터

영화 <배트맨 대 슈퍼맨 : 저스티스의 시작>의 작품 포스터 ⓒ 워너 브라더스 코리아


더 나은 번역을 위해

이번 사태를 바라보는 관계자들의 심경은 복잡해 보였다. 20년 가까이 영화를 수입해 온 관계자 B는 "의역이 아닌 중대한 오역이 불거진 사안인데 사실 내부 시사, 언론배급 시사, 개봉 전까지도 수정할 기회는 충분했다"며 "사람마다 다르게 느낄 수 있지만 디즈니가 번역가를 보호해 주지 않는 느낌이 든다"고 아쉬움을 전했다.

물론 모든 직배사가 다 그런 건 아니다. 번역가의 작업물을 다른 전문 번역가가 검수해서 피드백 주는 시스템을 마련한 곳도 있었다. 취재에 응한 관계자들은 "폭스나 워너브러더스에 비해 디즈니가 검수 시스템이 빈약해 보인다" 혹은 "검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고 들었다"고 입을 모았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지난 9일과 10일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를 접촉했다. 수차례 전화와 문자를 했지만 현재까지 응대하지 않고 있다. 다만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측은 홍보대행사를 통해 "더 나은 번역 시스템 마련을 위해 고민하고 있다"는 말만 전했다.

다양한 팬 층만큼 영화 관련 다양한 영역에 대한 비평이 존재하는 요즘이다. 번역도 이젠 예외가 아니게 됐다. 이런 고민에 관계자 A는 "영화 번역이 번역가 혼자만 독단적으로 결정해 나오는 결과물이 아닌, 직배사와 수입사 간 협의로 나온 결과물임을 알아주셨으면 좋겠다"며 "여러 제약 조건이 있을 수 있는 만큼 그런 지점을 이해하며 바라봐주셨으면 한다"고 말했다.

정말 좋은 번역이란 무엇일까. 여러 번역가들은 직역과 의역 사이 어느 지점에 존재한다고들 말한다. 영화 번역가는 아니지만 영미권 문학 번역의 대가로 알려진 정영목 번역가는 저서 <완전한 번역에서 완전한 언어로>를 통해 번역 비평과 번역의 질에 대해 말한 바 있다.

"기본이 안 되는 번역을 가려낼 필요는 있지만, 오역 없는 번역이 좋은 것이라는 식의 논의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중략) 번역가의 과제는 완전한 '번역'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언어'에 이르는 것이다." (정영목 번역가)


취재에 응한 몇 관계자들은 "오역인지 아닌지는 사실 1차적 문제이고, 앞으로는 원작의 의도와 해당 문화를 얼마나 잘 살렸는지를 봐주는 식으로 번역의 질을 논하는 때가 왔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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