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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페미니스트입니까?' 누군가 물어온다면, 나는 뒷머리를 긁적일 것 같다. 그게 말이죠, 간단하지가 않아서요. 당신은 정의롭습니까, 하는 질문과 내겐 크게 다르지 않다. 내 나름은 정의에 어긋나지 않게 살려고 노력하지만(또 다시 뒷머리를 긁적긁적) 가끔은 저기 그게... 그렇다고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규정지어진다면, 난 또 그의 팔을 붙들 것 같다. 저기, 꼭 그렇지는 않거든요.

내겐 이도 저도 어려운데, 페미니스트와의 의절을 당당히 선언하는 책이 있다. 제사 크리스핀의 <그래서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혹시나 안티페미니즘을 기대하는 분이 있을까 하여 미리 밝히자면, 반어법이다. 부제는 '색다르고 과감한 페미니스트 선언'이다. 제목만큼 내용도 도발적이다.
<그래서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책표지
 <그래서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책표지
ⓒ 북인더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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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페미니즘 비영리단체에서 수년간 일했고 수십 년 동안 페미니즘을 지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제 페미니즘이라는 꼬리표와 결별하고자 한다. 내게 페미니스트냐고 묻는다면 코웃음치며 아니라고 할 것이다."(p9)


그녀는 보편적 페미니즘에 반기를 든다.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도록 페미니즘을 포장하는 것은 변화를 이끌어 내기엔 진부하고 비효율적인 방법일 뿐이며, 약간의 수정에 그칠 뿐 현상 유지에 머무르는 페미니즘은 완전히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그녀는 지금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점진적 변화가 아니라, 급진적 혁명으로서의 페미니즘을 지지한다고 선언한다.

"가부장제는 체제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들을 종속시키고 통제하고 파괴해버리는 세계를 고안해냈다. 태생적으로 부패한 그 세상에 그대로 여성의 참여를 단순히 허용하는 게 아니라 여성이 능동적으로 세상을 재건할 수 있는 그런 혁명을 나는 지지한다. 여성이 교회, 정부, 자본 시장의 문을 두드리며 예의 바르게 끼워달라고 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종교, 정부, 경제 체제를 창조하는 그런 혁명 말이다." (pp11-12)


페미니즘의 목적 자체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었건만, 보편적 페미니즘은 더 많은 사람을 포섭하기 위해 본연의 의미를 상실하고 공허함을 택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페미니즘 철학과 새로운 관념들을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새로운 관념이란 윤리적인 것, 세상에 참여하는 것, 새로운 무언가를 창조하는 것 등에 관한 질문들이다.

저자는 페미니즘의 한계를 지적한다. 그녀에 따르면, 페미니즘 역사의 대부분은 동일 임금, 고학력 장벽 철폐, 피임이나 불임 치료처럼 고학력 중산층 백인 여성의 삶을 개선하는데 초점을 맞췄다고 한다. 즉, 페미니스트들이 의사, 변호사가 되어 일할 권리를 위해 싸울 때, 가난하고 혜택 받지 못한 여성들은 늘 저임금 혹은 무임금의 고된 노동에 시달려왔다는 것이다.

독립과 자유를 칭송한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 파산, 고립, 일생동안 노동할 자유라면, 이를 거부하는 것이 과연 시대착오적이거나 어리석은 선택일까. 전통적인 삶의 안락함을 버리고 오직 투쟁과 절망, 불안정의 신세계로 들어오라는 것은 허무맹랑한 구호로 들릴지도 모른다. 저자는 페미니스트이길 거부하는 이들의 바람과 욕구에도 귀 기울여야 할 것을 설득한다.

저자는 페미니즘이 사회 모든 위치의 여성과 남성을 위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있는지 스스로 질문할 것을 제안한다. 문제 제기는 이어진다. 전통적으로 남성의 영역이었던 곳에 여성의 자리를 만든 만큼, 여성의 영역이었던 곳에도 남성의 자리가 마련되었는가? 페미니즘의 현재 목표와 사상은 여성을 위한 더 나은 세계를 만들 가망성이 있는가?

책은 페미니즘이 '가부장제의 시녀'가 되었음을 개탄한다. 인종과 성별이라는 구분이 돈과 권력으로 대체되었고, 자본주의와 권력의 달콤함을 맛본 사람들은 시스템을 해체하길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시스템 안에 들어가기 위한 싸움은 시스템을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스스로를 혜택 받는 이의 반열에 올릴 뿐이라는 것이다.

저자가 말하는 시스템이란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를 포괄하는 보다 크고 복잡한 세계 전체를 말한다. 애초에 일부는 포용하고 일부는 배제하도록, 일부는 혜택 받고 일부는 착취하도록 조작되어 있기에 악으로 규정된다. 저자는 여성들이 강자와 약자 역학의 양쪽이라는 독특한 위치에 놓여 있는 지금, 이 시스템을 붕괴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함께 연대하여 탐욕에 기반을 둔 이 사회, 빈곤과 폭력, 착취로 수많은 사람을 죽이는 이 사회 전체가 종식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기만 한다면 우리는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p84)


저자는 하나로 뭉쳐야 한다는 이유로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을 막는 것을 거부한다. 이는 당장의 승리감 때문에 더 나은 미래라는 비전을 희생시킬 뿐이며, 비판을 공격으로 본다면 서로를 돌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어떤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견해 차이와 비판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러니까 이 책 역시 그녀의 페미니즘에 대한 애정 가득한 비판이고, 새로운 구상일 것이다.

책 전체에 걸쳐 우리는 새로운 세상을 상상해야만 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우선 상상할 수 있어야 실현 가능한 인프라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세상 모두를 위한 바람직한 미래상을 함께 꿈꿔야 하고, 우리 모두가 이에 참여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것으로 책은 마무리 된다. 페미니스트라 선언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페미니즘 말이다.

"우리는 문화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고 문화를 점령해야 한다. 이 세상이 지금 같으리라는 법은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착취행위에 상을 주어선 안 되고, 우리 지구와 우리 몸과 영혼의 타락을 거들 필요도 없다. 우리는 저항할 수 있다. 더 큰 사고를 해야만 한다." (p187)


새로운 세계를 상상하고, 모두가 페미니즘을 실천해야 한다는 결론은 어쩌면 새롭지 않은지도 모르겠다. 새롭거나 말거나, 많은 이들과 공유하고 싶은 책이다. 특히 페미니스트임을 자처하지만 날씬한 몸매와 완벽한 제모에 연연하고, '센 여자'로 보일까 싶어 때때로 페미니즘을 부정하는 이들과 함께 읽고 싶다. 그게 꼭 잘못됐다는 게 아니다. 나는 잘 모르겠다. 단지 끊임없는 사고와 상상이 필요하다는 데 적극 동의할 뿐. 

"나는 해답보다는 질문이 더 많다. 이 모든 게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도 알지 못한다. 그래도 괜찮다. 모든 걸 다 알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말은 절대 들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당신에게서 무언가를 원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p156)

덧붙이는 글 | 개인 블로그에 게재합니다.



그래서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 색다르고 과감한 페미니스트 선언

제사 크리스핀 지음, 유지윤 옮김, 북인더갭(2018)


태그:#그래서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제사 크리스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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