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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는 졸업하지 않는다' 이전 기사]

①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날 성추행한 선배가 말했다
② 성추행 당한 여성 교수는 왜 대학을 나와야 했나

③ 친했던 동기의 성추행, 피해자는 '잊기로 했다'

④ 원치 않던 스킨십, 왜 가만히 있었냐고요?

"잠깐만. 얘기하지 말아 봐."

다현(가명)은 후배의 말을 막았다. 그녀는 후배의 말을 더이상 들을 자신이 없었다.

찬 바람이 불던 2017년 어느 겨울 밤. 다현은 휴학생인 K후배와 오랜만에 술잔을 기울였다. 서로의 안부를 묻다 자연스레 학교 이야기까지 나왔다. 학과 교수님들의 근황도 전달하던 참이었다.

우연히 A교수 이야기까지 나왔다. 그 순간, K후배의 표정은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A교수의 근황을 듣기 싫어 하는 기색이었다. 평소와 다른 K후배의 모습에 다현은 의아했다. 그녀는 이렇게까지 질색하는 K후배를 본 적이 없었다.

"A교수님이 그렇게 나쁜 분은 아니잖아."

다현의 말에 K후배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K후배는 고민끝에 입을 열었다.

"성추행이 있었어요."

당황스러웠다.

"잠깐만. 얘기하지 말아 봐."

다현은 어렵게 입을 뗀 K후배의 말을 막았다.

두 얼굴의 교수

2016년 성신여대 사학과 학생회장을 할 정도로 다현은 학교에 대한 애정이 많았다. 역사학을 공부하는 것도 재미있었지만, 무엇보다도 학과 교수님들을 존경했다. 다현은 시간이 필요했다. '우리 과 교수가 성추행을 했다니.' 술이 목에 턱 걸려 넘어가질 않았다.

K후배는 오늘만큼은 꼭 말을 해야겠다는 심산이었다. 단호한 표정으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K후배의 대학 친구가 A교수한테 성추행을 당했다고 했다. 그는 성신여대 동양사학회 지도교수였고 피해자는 학회 학생이었다.

다현도 A교수의 수업을 수강했었다. 평소에 여성 인권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학과 내에서 평판이 좋았다. 학회 학생들과 종종 페미니즘을 주제로 열띤 토론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K후배의 입을 통해 들은 A교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후배는 그가 2017년 2월 수차례 성추행을 저질렀다고 했다.

그가 몸담은 동양사학회에서도 미심쩍은 행동을 했다는 증언이 이어졌다. A교수는 한 학기에 두 번 정도 학생과 일대일 면담하는 시간을 가졌다. 연구실이 아닌 성북동, 대학로와 같은 번화가로 데려가 식사하는 자리를 만들었다. 대화의 주제는 학생의 개인적 고민이나 가정사 등 사생활이었고, A교수는 학생들에 대해 깊게 알고자 했다. 식사를 마친 후에는 개인 차로 집에 데려다 주곤 했다.

"적지 않은 경우, 대학은 도제적 성격을 띈다. 학생의 학문 및 일상 영역에 교수의 개입은 사생활 침해라기보다는 가르침, 관심, 애정 등으로 통용된다. 그 안에서 발생하는 성희롱·성폭력을 폭력으로 인식하지 못하게 할뿐만 아니라, 인식했다 하더라도 학생이 감히 저항하지 못하게 한다."

나윤경·노주희 <대학 내 성폭력 가해자 연구>중에서


믿을 수 없는 이야기에 다현은 어떻게 해야할 지 몰랐다. K후배는 피해자가 누군지 알려주지 않았다. 피해자가 심적 고통이 커 피해 사실을 밝히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전했다.

다현은 피해자에 자신이 아끼는 후배들의 얼굴이 겹쳐졌다. 다현이 학생회장이었던 2016학년 당시, 여러 신입생들이 동양사학회에 가입했던 사실이 떠올랐다. 그 중에 피해자가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아찔했다. 성추행 피해를 당하고도 아무 말도 못할 후배들의 모습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다현과 K후배는 A교수와의 싸움을 결심했다.

성신여대 포스트잇 운동
 성신여대 포스트잇 운동
ⓒ 이소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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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신원 보호가 가장 우선이었다. 피해자는 정신과 치료를 받을 정도로 성폭력 피해 사실에 공포를 느꼈다. 이 때문에 피해자는 2017년 2월에 입은 피해 사실을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야 K후배에게 간신히 털어놓았다. 1년 가까이 시간이 지난 성폭력 피해 사건을 제3자가 증명해내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K후배는 성폭력피해자를 돕는 해바라기센터에 조언을 구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증거가 필요하다는 말뿐이었다. 피해자가 원치 않는 상황에서 무턱대고 학교에 제보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세 달 간 이어진 노력은 계란으로 바위치기였다. 학생인 그들이 가해 교수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학과의 다른 교수들도 혹시 한통속일까 의심스러운 마음에 선뜻 도움을 청하지 못했다. 교수로서 그가 가진 부, 권력, 인맥 등을 생각할 수록 다현은 무력감을 느꼈다.

'미투' 덕분에... 싸움을 시작하다

하루아침에 분위기가 반전됐다. 2018년 1월 29일, 한국에도 서지현 검사의 첫 미투(#MeToo)가 터졌다. 2월 6일에는 시인 고은의 성추행을 폭로하는 미투가 있었다. 다현은 다시 한 번 도움의 손길을 내밀 용기를 얻었다.

바로 다음 날, 다현은 수업을 마치고 동기들과 함께 학과장과 면담 시간을 가졌다. 자연스레 이야기는 시인 고은의 성추행 미투로 이어졌다. 한 동기는 "설마 우리 학과에는 이런 일이 없겠죠"라 말했다. 다현은 응어리에 맺힌 말을 쉽게 꺼내지 못했다. 멋쩍은 웃음과 함께 동기의 이야기에 맞장구만 칠 뿐이었다.

하지만 또 다른 동기는 학과 내에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A교수의 성추행이 있었다고 했다. 방금까지 즐겁게 대화를 나누던 학과장의 표정은 급격히 굳어졌다. 우리 과에 그런 일이 생긴다면 엄중하게 처리하겠다며 분노하는 그의 모습을 다현은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다.

한참을 망설이던 끝에 다현은 학과장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A교수의 성추행' 사실을 털어놓았다. 학과장은 분노했다. 그는 다현의 말을 믿어줬고 적극적으로 피해자를 도울 의사를 보였다. 그 자리에서 바로 친분 있는 변호사에게 연락해 피해 사실에 대한 자문을 구했다. 피해자에게 전문 심리상담사를 소개해줄 수 있다 말할 정도였다. 다현은 피해자가 학과장의 도움을 받아 학교에 이 사실을 고발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다.

다현과 K후배, 학과장은 힘을 모았다. 학교에 A교수의 성폭력을 고발하기 전에 학과장은 사법 처리 절차를 알아보고 준비했다. 이후에 그는 A교수를 제외한 나머지 사학과 교수들에게 이 사건을 알렸다.

교수들의 전폭적인 지지로 올해 3월 초, 피해자는 교내 성폭력상담소에 실명으로 진술 신고서를 제출했다. 피해자가 피해 사실 이후 신고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1년이었다.

학생처장(성윤리위원장)은 성폭력상담소에 신고가 들어오자마자 성윤리위원회를 열었다. 7명의 교수 위원으로 구성된 성윤리위원회는 사안의 심각성을 판단하고 바로 조사를 개시했다. 남녀 총 2명으로 이뤄진 조사위원이 피해자와 가해 교수를 조사했다. 성윤리위원회는 피해자 보호를 위해 피해자와 가해 교수를 격리시켰다.

1. 위원회는 위원장 1인, 부위원장 1인을 포함한 7인 이내의 위원으로 구성하되, 위원장을 포함한 위원은 남성 또는 여성의 비율이 전체 위원의 60%를 초과 하여서는 아니 된다.
2. 위원장은 학생처장, 부위원장은 상담실장으로 하며, 위원은 위원장의 제청으로 교직원 중에서 총장이 위촉한다.

성신여자대학교 성폭력 예방 및 처리에 관한 규정 제8조


진상 조사에 일주일이 걸렸다. 사건은 다현이 짐작한 성추행 정도의 수위가 아니었다. 성윤리위원회의 내부 조사에서 피해자는 성추행과 성폭행이 있었다고 진술했다. 가해 교수는 '성관계 사실'은 인정했지만 강제성이 없다고 주장했다. 3월 중순, 학교 본부는 사건의 심각성을 고려해 가해 교수를 서울 북부지방검찰청에 신고했다. 서울 성북경찰서가 4월 6일 해당 사건을 맡아 현재까지 수사가 진행 중이다.

조사 과정에서 나온 진술을 토대로 성윤리위원회는 관련 자료와 징계요구의결서를 인사위원회에 제출했다. 인사위원회는 가해 교수의 수업 배제 공문을 내렸다. 진술 신고서가 들어간 지 2주 만이었다.

하지만 A교수는 계속해서 학교에 나타났다. 수업 배제 공문이 내려온 이후에도 학교에서 그를 봤다는 제보가 들어왔다. 심지어 가해 교수의 연락을 받은 학생도 있었다.

4월 19일, 다현은 공식적으로 학생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를 설립했다. 학생들을 보호하고 가해 교수를 파면시키기 위해 자체적으로 만들어진 기구였다. 대책위는 가장 먼저 동양사학회와 사학과를 대상으로 추가 피해자 확보를 위한 전수조사를 시작했다. 예상대로 추가 피해자가 존재했다.

반성 없는 가해자, 늘어나는 피해자

학내 커뮤니티에서 진행된 전수조사(좌) 사학과 학생대책위원회 성명문(우)?
 학내 커뮤니티에서 진행된 전수조사(좌) 사학과 학생대책위원회 성명문(우)?
ⓒ 이소림, 성신여대 사학과 학생대책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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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 교수의 파면을 촉구하는 서명운동도 진행했다. 이외에도 학교와 경찰 측에 신속하고 공정한 조사를 요구하는 공동 행동을 준비했다. 공동행동을 홍보하는 보도자료도 직접 제작해 언론사에 제보했다. '사학과 졸업생 동문회'는 호소문과 재정적 지원으로 대책위에 힘을 보탰다.

"A교수는 반성하기는커녕, 이 일을 피해학생과 합의하에 이루어진 것이라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교수-학생의 권력관계에서 강압적으로 발생한 사건입니다. 그는 1남 1녀를 둔 유부남인데 어찌 합의의 당사자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

2018년 4월 24일 성신여자대학교 사학동문일동 호소문 중에서



재학생 서명서(좌) 사학과 졸업생 동문회 호소문(우)?
 재학생 서명서(좌) 사학과 졸업생 동문회 호소문(우)?
ⓒ 서진경, 사학과 졸업생 동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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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30일, 70여 명의 재학생이 성신여대 정문 앞에 모였다. 그들은 정문에서부터 성북경찰서까지 구호를 외치며 행진했다. 학교 본부와 수사기관이 가해 교수를 엄중히 처벌해 주길 바라는 외침이 학교 일대에 울려 퍼졌다.

"당신이 돌아올 자리는 없다"

성신여대 사학과 공동행동
 성신여대 사학과 공동행동
ⓒ 이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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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현 : "피해자가 사실 공동 행동하는 걸 멀리서 보고 있었대요. 그 멀리까지 우리가 노래 부르고, 입장서를 읽고, 구호 외치는 소리가 다 들렸다고 해요. (피해자가) 너무 고마웠고, (피해 사실을) 말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대요. 그래서 그때 용기를 얻어서 JTBC 보도까지 하게 된 거예요."

5월 2일, JTBC 뉴스룸은 "성신여대 사학과 A교수의 성폭행 의혹"을 보도했다. 하지만 다현도 그동안 알지 못했던 사실이 덧붙었다. A교수의 '가학행위 의혹'이었다. 피해자가 교내 성폭력상담소에 진술한 이후 발견된 사실이었다.

JTBC 보도에 따르면 가해 과정에서 A교수는 고개가 돌아갈 정도로 피해자의 뺨을 여러 차례 때렸다. 목을 조르거나 얼굴에 가래침을 뱉는 등 가학적인 행동도 일삼았다. A교수는 "넌 내 노예가 되는 거다"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A교수의 가학 행위가 세상에 알려진 이후, 많은 이들의 공분을 샀다. 2200명이 넘는 재학생 서명이 모였다. 대책위가 포스트잇 시위를 전개하자 가해 교수 연구실을 포함한 학교 곳곳에 색색의 포스트잇이 채워졌다. 5월 9일, 대책위는 재학생 서명서와 대책위 공동성명서, 피해자 입장문, 동문회 호소문 등을 모아 학교와 성북경찰서에 제출했다.

성신여대 사학과 포스트잇 운동
 성신여대 사학과 포스트잇 운동
ⓒ 이소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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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5월 31일, 가해 교수는 가장 높은 징계인 파면을 당했다. 학교 차원의 조사에서 가해 교수가 피해자와의 성관계를 인정했다는 사실 자체로 파면이 가능했다.

① 교원이 다음 각 호의 1에 해당하는 경우에 교원 임면권자는 징계의결의 요구를 하여야 하고, 징계의결 결과에 따라 징계처분을 하여야 한다.
3. 직무의 내외를 불문하고 교원으로서의 품위를 손상하는 행위를 한 때

② 징계는 파면·해임·정직·감봉·견책으로 한다.
5. 파면은 그 직에서 즉시 파면한다.

성신여자대학교 교원징계위원회 규정 제4조 (징계의 사유 및 종류)



연대 : 피해자를 기꺼이 지지하는 힘

다현은 아직까지 피해자가 누군지 모른다.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공동행동에 참가한 학생들 중 그 누구도 피해자에 대해 궁금해 하지 않았다. 그들이 그 자리에 나온 이유는 하나였다. 피해자의 이야기가 곧 자신들의 이야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흔히 미투 운동에서는 피해자가 신원을 밝히는 것을 '떳떳함'의 증거로 삼는다. 그러나 성신여대 사건은 공론화 과정에서 피해자의 신상공개 없이도, 학내 성폭력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실제 성폭력특례법에서도 추가 피해를 막기 위해 '피해자의 신원보호'를 보장하고 있다.

'법원 또는 수사기관이 성폭력범죄의 피해자, 성폭력범죄를 신고(고소·고발을 포함한다)한 사람을 증인으로 신문하거나 조사하는 경우에는 「특정범죄신고자 등 보호법」 제5조 및 제7조부터 제13조까지의 규정을 준용한다. 이 경우 「특정범죄신고자 등 보호법」 제9조와 제13조를 제외하고는 보복을 당할 우려가 없어도 조치가 가능하다.'

성폭력 범죄의 처벌등에 관한 특례법 제23조(피해자, 신고인 등에 대한 보호조치)



권력형 성폭력 구조에서 피해자와 가해자는 동등한 위치에 있지 않다. 피해자는 신상 공개로 발생하는 2차 피해가 두려워 익명을 내세운다. 폭로 자체가 어려운 권력형 성폭력 피해자에게 신상을 요구하는 건 '기울어진 운동장'을 더 불균형하게 만드는 일이다.

성신여대 사학과 공동행동
 성신여대 사학과 공동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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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이든 실명이든 간에 미투 폭로에 공감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져야 한다. 두려움에 떨던 피해자 역시 대책위, 사학과 교수진이 기꺼이 연대하였기에 용기낼 수 있었다.

오늘 여기 계신 여러분들이
저의 힘이자 용기입니다.

공동행동 피해자 입장문 中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다음카카오 스토리펀딩 <미투는 졸업하지 않는다> https://storyfunding.kakao.com/project/19633 5화 연재 기사로 올라간 바 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본인이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미투, #미투운동 , #대학 내 미투, #성신여대 사학과, #사학과 미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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