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한 편으로 인생이 바뀐 배우들이 있다. 기회가 왔을 때 그 기회를 자기 것으로 만든 배우들의 결정적 영화를 살펴보면서 작품과 배우의 궁합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 기자 말

 <양들의 침묵> 영화 포스터

<양들의 침묵> 영화 포스터 ⓒ 오리온 픽쳐스


한니발 렉터. 작가 토마스 해리스의 작품에 등장하는 그는 관객과 독자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악역 중 하나이자 다른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는 캐릭터로, 배우에게는 도전의식을 불러일으키는 인물이기도 하다. 성공했을 때에는 작품과 함께 대중들에게 영원히 기억되는 불멸의 영광을 누릴 수 있지만 그만큼 소화하기 어렵다.

한니발 시리즈의 첫 번째 영화 <양들의 침묵>(소설발매 순으로는 두 번째, 내용상으로는 세 번째에 위치하는 이야기)은 전 세계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며 한니발이라는 캐릭터는 물론이고 영화에 출연한 안소니 홉킨스와 조디 포스터를 스타로 만들었다. 

FBI 수습요원 클라리스 스털링(조디 포스터)은 FBI국장 잭 크로포드로부터 연쇄살인사건 수사에 참여하라는 통보를 받는다. 그녀의 역할은 교도소에 수감 중인 정신과 의사 한니발 렉터(안소니 홉킨스)를 만나 여성들을 죽이고 그들의 피부를 벗겨낸 연쇄살인범 버팔로 빌의 프로파일링에 도움을 받는 것이다.

저명한 정신과 의사 한니발은 자신의 환자를 9명이나 살해하고 그들의 인육을 먹은 엽기적인 살인마인 동시에 상대방의 생각과 욕망을 꿰뚫어보는 지적이고 세련된 매너의 인물이기도 하다. 크로포드는 '한니발에게 절대 속마음을 들키지 말라'고 클라리스에게 경고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클라리스는 한니발에게 자신의 어린 시절 아픔을 고백하며 그와 미묘한 우정을 나누게 된다.

꽤나 노골적인 영화 <양들의 침묵>의 구조

 영화<양들의 침묵>의 한 장면

영화<양들의 침묵>의 한 장면 ⓒ 오리온 픽쳐스


<양들의 침묵>이 인물을 묘사하고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은 좀 다르다. 특히 인물의 정면 클로즈업을 자주 사용하고, 범죄 스릴러에서 흔히 사용하는 반전의 구조가 아니라 처음부터 범인을 공개하고 범죄와 수사를 평행하게 끌고 가는 구조를 선택했다는 점에서 꽤나 노골적이지만 관객들은 거기에 진부함을 느끼는 대신 더욱 몰입하게 된다.

아무도 없는 고요한 숲속, 안개를 가르며 홀로 달리고 있는 클라리스의 모습에서 영화는 시작된다(이 장면은 미국 범죄 스릴러 드라마 <더 킬링1>의 시작과 흡사하다). 땀에 흠뻑 젖어 달기기에 집중한 그녀가 크로포드의 부름을 받고 그의 사무실로 가는 동안 그녀는 남자 수습요원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지만 그녀는 거기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인다.

매력적인 외모를 세련되게 가꿀 줄 모르는 사회 초년생으로서의 미숙함과 촌스러움. 외적인 것에 무심한 듯 보이지만 관객이 의식을 하는 만큼 그녀 자신도 의식을 하고 있음을 그녀와의 첫 만남, 단 몇 분 만에 간파한 한니발은 그녀의 자존심에 상처를 내며 클라리스를 애송이 취급한다. 첫 만남에서 클라리스의 차림새와 말투만으로 그녀의 성격과 과거를 분석하는 한니발의 모습은 그녀뿐 아니라 스크린 밖 관객까지 사로잡는다.

여러 개의 거대한 철문을 지나 최악질 범죄자들만 수감된 지하실에 도달하면 그곳에서도 가장 끝에 한니발의 방이 있다. 머리는 깔끔하게 빗어 넘기고 죄수복은 다림질이라도 한 듯 단정하다. 마치 조금 전에 몸단장을 마치고 클라리스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반듯하게 서서 그녀를 맞이하는 한니발의 모습은 그가 '사람을 죽이고 그 인육을 먹으면서도 심박수 85를 유지하는 살인마'라는 정보를 들은 후 더욱 섬뜩하게 다가온다.

소름끼치도록 차분하고 여유로운 그와 몹시 긴장한 듯한 클라리스의 모습은 유리벽을 마주한 이들의 관계가 어떻게 진행 될지, 사건을 풀어가는 과정과 함께 관객의 궁금증을 자아낸다. 한니발은 아직 정식 FBI가 아니지만 솔직하고 강단있는 클라리스에게 흥미를 느끼고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대가로 버팔로 빌 수사에 협조하겠다고 약속한다.

긴장감 유지하며 감정 변화 표현한 배우들에 박수를

 영화 <양들의 침묵> 의 한 장면

영화 <양들의 침묵> 의 한 장면 ⓒ 오리온 픽쳐스


두 사람이 함께 있는 장면은 얼마 되지 않지만(한니발이 등장하는 장면 자체가 얼마 안 된다) 둘의 관계가 점차 가까워지면서 관객은 자연스럽게 설득된다. 관객은 클라리스의 눈을 빌려 한니발을 보고 그녀가 그에게 매료되는 만큼 관객도 그에게 매료된다. 두 사람의 관계는 마치 스승과 제자처럼 진전된다.

앞서 얘기했듯이 <양들의 침묵>에는 유독 얼굴 클로즈업이 많은 데다가 한 테이크의 길이도 꽤 길다. 한니발이 인간의 심리를 꿰뚫어보듯, 관객은 클로즈업을 통해 인물들의 심리와 극적 긴장을 보다 가깝게 느낄 수 있는데 오직 표정연기로 탱탱한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미묘한 감정변화를 표현해낸 배우들의 집중력과 캐릭터 해석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대개 범죄 스릴러물에선 한 명의 천재가 등장하면 다른 수사관들을 무능해 보이게 만들기 마련이지만 <양들의 침묵>에서 한니발과 클라리스는 한니발이 수수께끼를 던지면 클라리스가 그의 수수께끼를 풀어내는 식으로 서로 균형을 이룬다. 한니발이 준 정보에 전적으로 의지한 FBI와 한니발이 던진 함정에 빠지지 않고 차근차근 수사의 기본에 충실하는 클라리스.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용의자에 접근하고 결국 클라리스가 옳았다는 것이 증명되는 장면에선 교차편집이 사용되는데, 이미 영화를 본 관객이라 할지라도 손에 땀이 날 만큼 긴장감이 극대화된다.

안소니 홉킨스와 조디 포스터는 1992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양들의 침묵>으로 각각 남우주연상과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안소니 홉킨스는 이전부터 연기 잘하는 배우로 정평이 나 있었지만 캐스팅 순위에서 선두를 달리는 배우는 아니었다.

<양들의 침묵>에서 그는 우아하고 귀족적인 취향을 가진 식인 살인마의 섬뜩함을 완벽하게 소화했고, 흥행까지 책임질 수 있는 배우가 되었다. 한니발과 클라리스의 첫 만남에서 안소니 홉킨스가 대본에 없는 대사로 클라리스를 모욕하는 즉흥연기를 하며 조디 포스터의 실감나는 연기를 이끌어냈다는 것은 이미 유명한 일화다. 이것은 그가 자신의 배역뿐만이 아니라 영화 전체의 흐름을 꿰뚫고 있는 배우라는 것을 말해준다.

<피고인> 후 3년 만에 여우주연상 또 탄 조디 포스터

 영화 <양들의 침묵>의 한 장면

영화 <양들의 침묵>의 한 장면 ⓒ 오리온 픽처스


3살에 광고 모델로 연예계 생활을 시작한 조디 포스터는 8살 때부터 연기를 했으며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영화(특히, <택시 드라이버>에서의 10대 성매매 여성 연기)에 출연하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예일대 진학도 화제였지만, 그녀에게 관심을 받기 위해 범죄를 저지르는 스토커 팬들 때문에 곤욕을 치른 것으로도 유명하다.

<택시 드라이버>이후로 작품으로는 별 다른 인상을 남기지 못하다가 1988년 성폭행 피해자를 연기한 <피고인>이라는 영화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고 3년 만에 <양들의 침묵>으로 두 번째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다(서른이 되기 전에 이룬 성과라니 어떻게 보면 운이 좋은 배우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녀의 연기는 두 영화 모두에서 훌륭하지만 <피고인>이 폭발하는 연기를 보여줄 수 있는 주인공을 빛내는 영화라면 <양들의 침묵>은 강인함과 연약함, 냉철함과 미숙함을 함께 보여주면서 안소니 홉킨스와 같이 카리스마 강한 배우와 밸런스를 이루어야 하는 등 연기하기가 보다 까다로운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양들의 침묵>은 1991년 가장 성공한 영화일 뿐 아니라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두 주연 배우 뿐 아니라) 감독상, 작품상, 각본상을 수상했고, 제작비의 10배가 넘는 수익을 남겼다. 이후 한니발 렉터 시리즈의 소설은 모두 영화화 되고, 드라마 시리즈까지 제작 되었다. 장르 영화, 특히 범죄물의 경우 한 번 보고 두 번째 볼 때 그 재미가 반감되는데 <양들의 침묵>은 2018년인 지금 보아도 흠 잡을 데 없이 재미있고 긴장 넘치며 그 안에서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배우들의 연기에 감탄하게 되는 영화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강지원 시민기자의 브런치 계정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양들의 침묵 조디 포스터 안소니 홉킨스 조나단 드미 범죄 스릴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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