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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면서도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해설

오산리 '사람 얼굴 흙인형'에 대한 설명글을 찾아보았다. 간단히 설명하는 글뿐이었는데, 그 공통점은 모두 신석기 시대 종교나 신앙과 관련지어 말하고 있었다.
 
1개의 점토제 안면상(顔面像)은 신석기인의 사유(思惟)와 종교관을 탐구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두산백과

 
오산리 유적의 신석기시대층에서 출토된 사람 얼굴의 조각상이다. 사람 얼굴의 조각품은 동삼동 조개더미 출토 국자가리비, 서포항의 뼈 조각품에서도 나타나는데 신앙적인 의식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미의 재발견 첫째 권 《선사 유물과 유적》(솔출판사, 2003) 72쪽

 
 
얇은 점토판을 손가락으로 눌러서 두 눈과 코, 입 및 광대뼈 등을 표현했으며, 단순하지만 얼굴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선사시대에 이처럼 사람 얼굴이나 몸을 조각하는 것은 예술품보다는 신앙과 관련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죽은 사람을 위한 의식, 즉 종교의 의미로 풀이된다. 흙으로 빚은 얼굴은 신석기 시대 사람들의 정신세계의 일면을 보여 주는 것으로 중요한 자료이다.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품 도록

 
 
광주 씨튼어린이집 예닐곱 살 반 아이들과 같이 흙인형을 빚어 보았다.
 광주 씨튼어린이집 예닐곱 살 반 아이들과 같이 흙인형을 빚어 보았다.
ⓒ 김찬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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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백과에서는 "신석기인의 사유와 종교관"을 탐구할 수 있는 자료라 하지만 정작 왜 그러한지는 말하지 않는다. <선사 유물과 유적>의 글쓴이는 이 흙인형을 자꾸 '조각상' '조각품'이라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흙으로 빚어 구운 흙인형이지 돌을 조각한 조각상이 아니다. 더구나 글쓴이는 "신앙적인 의식에 사용"되었다고까지 한다. 5센티미터밖에 안 되는 작은 상을 어떻게 제의 때 썼다는 말인지 나로서는 도무지 상상할 수 없다. 서울대학교박물관 도록에서는 '광대뼈'를 표현했다고 하지만 실제 흙인형을 보면 그러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광대뼈는 콧대를 세우다 보니 자연스럽게 나타난 것뿐이다. 또 이런 흙인형을 빚는 행위를 "죽은 사람을 위한 의식, 즉 종교 의미"로 보고, 신석기인들의 "정신세계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라고까지 한다. 하지만 그 '일면'이 뭔지는 말하지 않는다. 아직까지 우리나라 신석기인의 종교가 어떤 종교였는지 알려진 바는 없다. 또 종교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유물도 나오지 않았다.

보는 만큼 보인다

나는 이런 해석을 볼 때마다 '꿈보다 해몽'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저번 글 〈빌렌도르프 비너스의 중심은 배꼽이다〉에서도 말했듯이, 어떤 지식에 기대어 미술 작품을 보는 것은 아주 안 좋은 공부 방법이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아는 만큼 안 보인다. 화가 김환영은 빌렌도르프 비너스 분석 글을 읽고 이런 메시지를 보내 왔다. "보는 만큼 보인다. 그러니 호랭이 눈을 뜨고 절박하게 보고 보고 또 보라. 미술은 '본다'는 것에서 시작하고 그 끝 또한 '본다'의 문제일 테니." 그의 말처럼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는 만큼 보이는 것이다. 위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들은 옛 유물을 자기 눈으로 보면서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지식이나 관념에 사로잡혀 보고 있다. 그러니 흙인형을 '조각상'이라고 하고 신상(神像)이라고까지 하는 것이다.
 
흙인형은 오산리선사유적박물관의 대표 이미지이다. 박물관 들머리뿐만 아니라 박물관 안 곳곳에서 이 흙인형 이미지를 써서 만든 물건을 볼 수 있다.
▲ 양양 오산리선사유적박물관의 대표 이미지 흙인형 흙인형은 오산리선사유적박물관의 대표 이미지이다. 박물관 들머리뿐만 아니라 박물관 안 곳곳에서 이 흙인형 이미지를 써서 만든 물건을 볼 수 있다.
ⓒ 김찬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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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 손가락으로는 결코 이 흙인형처럼

이 흙인형을 분석할 때는 직접 빚어 보는 것, 이 방법이 가장 좋다. 진흙을 사와 살짝 말린 다음 위아래로 5.1센티미터, 너비 4.3센티미터로 해서 빚어 봤다. 크기가 너무 작다. 엄지로 찍으면 도무지 오산리 흙인형처럼 안 나올 것 같았다. 그래서 검지로 했다. 눈을 양 검지로 찍어 보니 위로 살짝 밀려났다. 입을 오른손 검지로 찍어 보니 아래로 늘어났다. 검지로 눌렀는데도 오산리 흙인형처럼 눈이 깊지 않고, 옆으로 살짝 길지도 않고 둥그렇게 찍혔다. 입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빚은 흙인형과 오산리 신석기 흙인형에서 눈과 입을 견주어 보면 차이가 난다. 나는 집게손가락 끝으로 했는데도 눈과 입이 깊지 않다.
▲ 내가 빚은 흙인형과 오산리 흙인형 내가 빚은 흙인형과 오산리 신석기 흙인형에서 눈과 입을 견주어 보면 차이가 난다. 나는 집게손가락 끝으로 했는데도 눈과 입이 깊지 않다.
ⓒ 김찬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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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 놓친 것이 있다. 진흙에 눈코입을 찍은 다음 그늘에 말렸을 때도, 또 불 속에 들어가서도 조금 준다는 점, 이것을 놓쳤다. 나는 줄어드는 비율을 보통 헐렁하게 20퍼센트로 잡는다. 그렇다면 신석기 시대 원판은 위아래 6센티미터, 너비는 5.3센티미터쯤이었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작기는 마찬가지다. 내가 빚은 것과 오산리 흙인형을 견주어 보면 확연히 차이가 난다. 어른 손가락으로는 오산리 흙인형처럼 이렇게 깊게 눈과 입이 나올 수 없다. 이 흙인형은 신석기 어린이가 빚은 것이 분명하다.


나는 우리 두 딸이 다녔던 씨튼어린이집에 전화를 걸어 선생님께 부탁을 드렸다. 예닐곱 살 반 아이들과 같이 흙인형을 빚어 보겠다고 했다. 선생님은 20분쯤 시간을 낼 수 있다고 했다. 약속을 잡고 그 다음 날 어린이집에 갔다. 가기 전에는 위로 6센티미터, 가로로 5센티미터쯤 빚어서 해 보려 했다. 하지만 이것은 여럿 아이들과 애당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이들에게 노트북 모니터로 오산리 흙인형을 보여 주고, 이렇게 한번 빚어 보자 했다. 눈코입은 엄지로 눌러서 찍자고 했다. 아래 사진이 그날 빚은 것이다.

 
아이들에게 오산리 흙인형을 노트북 모니터로 보여줬더니 모두들 ‘돌사람’이라 했다. 아이들은 어떤 물건에 이름을 붙일 때 어른보다 훨씬 직관이 살아 있다. 거북선을 처음 본 아이가 ‘거북배’라 하듯 오산리 흙인형을 처음 보고는 모두들 ‘돌사람’이라 한 것이다.
▲ 예닐곱 살 아이들이 빚은 흙인형 아이들에게 오산리 흙인형을 노트북 모니터로 보여줬더니 모두들 ‘돌사람’이라 했다. 아이들은 어떤 물건에 이름을 붙일 때 어른보다 훨씬 직관이 살아 있다. 거북선을 처음 본 아이가 ‘거북배’라 하듯 오산리 흙인형을 처음 보고는 모두들 ‘돌사람’이라 한 것이다.
ⓒ 김찬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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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예상했던 것만큼은 나오지 않았다. ⓵, ⓶번 흙인형은 일곱 살 아이가 빚었고, 나머지는 여섯 살 아이가 빚었다. ⓵, ⓶번을 내가 검지로 누른 것과 견주어 보면 확실히 구멍이 깊다. 아이들은 직관으로 꾹꾹 눌렀는데, 내가 누른 구멍은 손끝을 아주 조심해서 누른, 그런 '마음결'이 읽혀진다. 여섯 살 아이가 빚은 ⓷번은 그야말로 아이들의 직관, 어떤 계산도 없는 그러한 마음과 몸짓이 손끝과 구멍에 그대로 살아 있다.

우리 미술의 큰 특징 '익살과 생명력'
 
남자가 비파를 연주하고 여자는 손을 맞잡고 노래를 부른다. 오른쪽 분청자 문양을 보면 마치 아이가 그린 것처럼 쓱쓱 그렸다. 정확히 무엇을 그린지는 알 수 없다.
▲ 신라흙인형(왼쪽)과 조선 분청자 문양 남자가 비파를 연주하고 여자는 손을 맞잡고 노래를 부른다. 오른쪽 분청자 문양을 보면 마치 아이가 그린 것처럼 쓱쓱 그렸다. 정확히 무엇을 그린지는 알 수 없다.
ⓒ 국립경주박물관·동아대학교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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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리 사람 얼굴 흙인형을 볼 때 우리는 이런 풍경을 상상할 수 있다. 한 신석기 장인이 그릇을 빚고 있었다. 그 옆에서 그의 자식이 흙을 한 줌 떼어 와 아버지처럼 쓱쓱 빚었다. 아버지가 가만히 보니 사람 얼굴이었다. 아버지는 빙긋 웃으며 묻는다.


"아이고 우리 아들, 곧잘 빚는구나. 그런데 흥수야, 대체 무얼 빚은 거냐?"
흥수가 눈을 뚱그렇게 뜨고 대답한다.
"아버지는 이게 뭔지 모르세요?"
내가 볼 때 오산리 흙인형은 아이가 어떤 계산도 없이, 직관으로 쓱쓱 빚은 것이다. 그래서 이 흙인형은 '씨족 수호의 신상'도 아니고, '신앙 의식'에 쓴 것도 아니고, '신석기의 정신세계'를 보여주는 것도 아니다.


나는 오산리 흙인형에서 '신의 형상'보다는 어린이의 '직관', 어린이에게 찰흙을 쥐어줬을 때 순식간에 빚는, 그러한 어린이의 직관을 읽을 수 있었다. 아이들은 눈과 입 양볼을 엄지로 누를 때 어른처럼 머뭇거리지 않고, 어떤 계산도 하지 않는다. 이 직관의 예술, 순간의 미술은 신라 흙인형으로 이어지고, 다시 분청자 문양으로 이어진다. 한국미술의 독특한 특징 가운데 하나인 '익살과 생명력'은 흔히 통일신라 시대 흙인형에서 찾는다. 그런데 나는 그 기원과 시작을 그로부터 한참 더 내려잡아 신석기 시대 양양 오산리(기원전 6∼5천 년 전) 흙인형에서부터 잡고 싶다. 이 흙인형에서 우리 미술의 '익살과 장난기'가 시작된 것이다.

▶이전 기사 :
오산리 흙인형, 과연 이것이 신의 형상일까1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광주드림에도 보냅니다.


태그:#오산리 흙인형, #오산리 토제인면상, #김찬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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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 말에는 저마다 결이 있다. 그 결을 붙잡아 쓰려 한다. 이와 더불어 말의 계급성, 말과 기억, 기억과 반기억, 우리말과 서양말, 말(또는 글)과 세상, 한국미술사, 기원과 전도 같은 것도 다룰 생각이다. 호서대학교에서 글쓰기와 커뮤니케이션을 가르치고, 또 배우고 있다. https://www.facebook.com/childk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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