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링 무비는 영화 작품을 단순히 별점이나 평점으로 평가하는 것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넘버링 번호 순서대로 제시된 요소들을 통해 영화를 조금 더 깊이, 다양한 시각에서 느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편집자말]
 영화 <더 스퀘어> 메인 포스터

영화 <더 스퀘어> 메인 포스터 ⓒ 찬란


*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01.

스웨덴 태생의 루벤 외스틀룬드 감독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인물이었다. 올해가 아니라, 작년에 있었던 70회 칸 영화제의 이야기다. 영화제 내내 황금종려상의 후보로 강력하게 거론되던 작품은 안드레이 즈비아긴체프 감독의 <러브리스>와 로뱅 캉피요 감독의 < 120 BPM >이었으나, 그는 다른 모든 작품을 제치고 이 영화 <더 스퀘어>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다. 하물며, 처음부터 칸의 초대를 받은 것이 아니라 뒤늦게 추가로 초청된 작품이었다. 영화가 공개된 직후, 이 작품의 수상 가능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만한 분위기는 전혀 없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크게 화제가 된 것 또한 아니었다. 하지만 이 작품의 세련된 은유와 풍자는 심사위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영화 <더 스퀘어>의 루벤 외스틀룬드 감독은 전작인 <포스마쥬어 : 화이트 베케이션>로 2014년 칸 영화제의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 심사위원상을 수상하며 주목 받기 시작했다. 어마어마한 눈사태가 일어난 리조트를 배경으로 가족들을 모두 버리고 홀로 도망치는 아버지를 주목하는 이 영화는 가족이라는 집단 내에서 기존에 부여되었던 아버지의 역할을 붕괴시킴과 동시에 관객들에게 많은 물음을 선사했다. 가장의 책임과 개인의 생존 본능 가운데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혹은 그런 아버지를 마주했을 때 가족 구성원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에 대해 말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우리가 평소에 갖고 살아가는 상식이라고 불리는 것들은 과연 진짜 옳은 것인가에 대한 물음까지.

 영화 <더 스퀘어> 스틸컷

영화 <더 스퀘어> 스틸컷 ⓒ 찬란


02.

감독이 지난 작품에서 보여 준 위선과 허영에 대한 반어적 의미를 담은 은유와 풍자는 이번 작품 <더 스퀘어>에서도 또렷한 빛을 발한다. 한 가지 상황에 놓인 인물의 모습을 통해 기존의 것을 혁파하고자 하는 감독의 시도는 이번 작품으로 넘어와 다양한 상황에 놓이는 것으로 변모하는데, 이러한 변화는 사고의 폭을 넓히게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게끔 만들어 작품의 깊이를 더한다. 또한, 유사한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작품의 중심이 되는 집단을 가족에서 사회로 확장하며 작품이 닿을 수 있는 면의 다양화를 시도한다.

영화 <더 스퀘어>는 '더 스퀘어'라는 전시를 앞둔 스톡홀롬 현대 미술관의 수석 큐레이터 크리스티안(클라에스 방 역)에 대한 이야기다. 감독은 전시를 앞두고 크리스티안이 겪게 되는 다양한 사건들을 통해 사회적 지위와 평판을 상실해 가는 모습을 그려낸다. 블랙코미디의 형식을 따르고 있는 이 작품은 내용의 무게와는 무관하게 전체적으로 밝은 느낌을 갖고 있지만, 그 안에 숨겨진 인간의 나약하고 저열한 모습들은 본성과 위선의 경계를 첨예하게 드러내며 전작과 동일하게 관객들에게 많은 질문을 던진다. 특히 극의 중심을 지지하는 듯 보이면서도 크리스티안을 끊임없이 흔드는 두 가지 사건인 소매치기 사건과 유튜브 영상 사건은 단순히 이 사회의 부조리함을 드러내는 부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구성원 모두의 역할과 책임, 공동체 의식을 뒤집어 건드린다.

03.

어떤 지점에서 해석하느냐에 따라 이 작품에 대한 다양한 시각이 존재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이 작품의 중심에는 역시 미술관 한가운데 위치하게 될 '더 스퀘어'라는 전시물의 경계가 위치한다. 지난 2014년 스웨덴 남부에 위치한 반달로럼 미술관에서 실제로 있었던 전시를 모티브로 한 영화 속 전시물은, 개인의 믿음과 실제 사회적 반응의 충돌을 통해 개인이 갖고 있는 원칙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준 현대 예술이었다고 한다.

감독은 이 작품으로부터 개인의 믿음과 사회적 반응의 충돌을 꺼내 의미화하는 작업을 시작했고, 이는 이번 작품 속 스톡홀롬 현대 미술관 정면에 놓인 '더 스퀘어'의 경계, '선의 경계'로 표현된다. – 영화 속에서는 크리스티안이 자신의 두 딸에게 실제 전시와 동일한 경험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모습이 그려지지만, 실제로 더 상징성을 부여 받는 것은 영화의 시작과 함께 설치되는 '더 스퀘어'의 사각 경계다. – 한 마디로, 이 영화는 도시화된 삶 속에서 개인의 경계와 타인의 경계가 부딪히며 중첩될 때 우리가 각자의 경계를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물음인 셈이다.

 영화 <더 스퀘어> 스틸컷

영화 <더 스퀘어> 스틸컷 ⓒ 찬란


04.

여기에서 말하는 경계 혹은 선이라는 것은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집단이나 사회의 상식을 포함하는 광의의 의미를 내포한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주인공이 당하게 되는 소매치기나 중반부의 대담회장에서 틱 장애가 있는 관객을 두고 벌어지는 설전, 중앙역 편의점에서 만나게 되는 노숙자와의 에피소드 또한 마찬가지다. 특히, 주인공이 소매치기를 당하는 장면에서는 위기에 처한 여성을 보고도 도움을 주지 않는 대중의 모습은 물론, 그것이 소매치기였다는 것을 알고 난 뒤에 소지품을 모두 분실한 크리스티안이 요청하는 도움에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감독은 이 표현들을 통해 우리가 갖고 있는 관념적 상식이 우리의 삶에 실존하는가에 대해 날카롭게 찌르고 들어온다. 관객들은 이 영화가 상영되고 있는 그 순간에, 그 동안 자신이 알아왔던, 혹은 배워왔던 '경계' 내의 상식으로 이 장면들에 대해 어떤 가치 판단을 내리고 – 아마도 거의 대부분 동일한 반응, 장면들에 대해 거부감을 드러내는 것으로 표현되겠지만 –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겠지만, 정말 그것이 옳은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물음이 이 영화 속에 담겨있는 것이다. 이는 앞서 설명했던 감독의 전작 <포스마쥬어 : 화이트 베케이션>에서 주어진 상식과 관련한 의문들과도 관련이 있다.

간단히, 크리스티안이 중앙역 편의점에서 만나게 되는 노숙자와의 에피소드를 들여다보자. 그녀는 우편물을 찾으러 편의점을 찾은 크리스티안에게 샌드위치를 하나 사달라고 한다. 지역의 현대 미술관 수석 큐레이터로 평소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평판에 크게 신경을 쓰는 그는 그녀의 요구를 받아들이지만, 아무 이유도 없이 구걸을 하는 것도 모자라 특정 샌드위치를 요구하고 양파까지 빼달라며 추가 주문을 하는 노숙자의 태도에 불편한 감정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그러니까 이 사회에 통용되는 상식으로 보자면, 공짜를 구걸하는 이가 도움을 주는 이에게 그것만으로도 감사해하기는커녕 추가적인 요구를 하는 것이 불편해 보일지도 모른다.

허나, 여기에 대해 감독은 이렇게 묻는 것이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때는 그저 입을 닫고 감사하다고만 하는 것이 상식인가? 이 때에 비용적인 부분에 큰 차이가 없다고 해도, 개인의 취향이나 욕구를 반영하는 것은 정말 무례한 일인가? 반대로, '받는 주제에 무슨 말이 많아?' 라고 여기면 누군가를 돕는 자신에게 전에 없던 권력이 생기거나 내 안에 우월한 의식이 자리잡게 되는 것일까? 하는 물음. 그것으로 우리의 '더 스퀘어'의 경계는 충분한가? 라고 말이다.

물론, 이 상황에 대한 물음은 이 영화가 보여주는 수 많은 질문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05.

개인의 시점인 협의적인 지점에서도 영화 속, 이 경계에 대한 해석은 가능하다. 경계 내부의 반응에 대해 초점을 맞추면, 개인을 둘러싸고 있는 경계를 스스로 얼마나 허물고 나와 타인에게 다가갈 수 있는가? 하는 물음으로 바꿔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의 '경계'는 앞서의 의미와는 조금 다르다. 이 경계는 개인이 쌓아 올린 그 경계 위의 우월의식과 허례허식, 그리고 무관심과 같은 것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크리스티안이 소매치기를 당한 후  거리에 있던 누구도 그를 도와주려 하지 않는다거나, 올레그(테리 노터리 역)로 인해 파티가 난장판이 되는 장면에서 한 여성이 그에게 공격을 당하고 있는데도 선뜻 나서 도와주는 사람이 없다는 설정은 그런 맥락 위에 놓여있다.

오히려, 타인을 돕는 행위는 주인공이 쇼핑몰 안에서 딸들을 잃어버리고 도움을 청한 걸인으로부터 보이는데, 이 장면에서조차 쇼핑몰 안의 다른 사람들은 그의 외침을 외면해버리고 만다. 결국 이 사회의 구성원들이 서로를 향해 쌓아 올리는 것은 긍정적인 의미의 '더 스퀘어'가 아니라, 부정적인 의미의 '더 스퀘어'라는 것. 서로를 받아들이기 위한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단순히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진 쇼윈도형 '더 스퀘어'일 뿐이라는 것이 그런 장면들을 통해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영화 <더 스퀘어> 스틸컷

영화 <더 스퀘어> 스틸컷 ⓒ 찬란


06.

영화는 크리스티안이 소매치기를 당한 자신의 소지품을 되찾기 위해 뿌린 편지로 인해 피해를 입은 한 소년의 등장과 함께 그 동안의 모든 질문들에 대한 갈무리를 시작한다.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평판이 무너질세라 자신을 찾아와 따지고 묻던 소년을 매몰차게 대하던 크리스티안. 감독은 그의 변화하는 모습을 통해 비로소 우리가 '경계'를 올바로 구축하고 함께 나아가는 일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여러 사건을 통해 결국 그는 사회적으로 무력해지고 모두 잃어버리게 된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그 자신이 부서져버린 것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오히려 자신의 옷을 내려놓으면서 – 이 표현은 이중적 표현이다. 그는 실제로도 쓰레기통을 뒤지며 자신의 양복 상의를 내던진다. – 자신의 '더 스퀘어'를 더욱 진하고 밝게 그릴 수 있게 된다.

홍보 영상 파문으로 인해 공식적인 자리에 서게 된 그의 모습 또한 마찬가지다. 그 일이 단순히 홍보 부서와 협력업체의 전적인 잘못으로 벌어진 일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지역 현대 미술관의 수석 큐레이터로서 기자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거나 현재 전시중인 작품에 발생한 사고에도 매뉴얼대로 대처하지 않는 등의 모습들이 낳은 하나의 결과물일 뿐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모든 것들을 제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그는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된다. 인정하는 것만이 비도덕성이 쌓아 올린 경계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더 스퀘어'를 지향할 수 있음이 냉소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07.

이 작품이 칸 영화제의 정점에 서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고, 또 최근 칸 영화제에 출품되는 작품의 힘이 다소 부족하고 정체되어 있다는 평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루벤 외스틀룬드 감독의 <더 스퀘어>는 올해의 황금 종려상을 수상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어느 가족>과는 상당히 다른 지점에서 수상할 만한 가치가 있었음을 스스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다소 늦은 국내 개봉이 아쉬울 정도의 무게와 해학을 느끼게 될 것이다.


영화 무비 더스퀘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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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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