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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이소 I '추수감사절 이후 박모의 단신' 종이출력 297×210cm 1984. 개인소장
 박이소 I '추수감사절 이후 박모의 단신' 종이출력 297×210cm 1984. 개인소장
ⓒ 박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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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MMCA)은 과천관 제1전시실에서 오는 12월 16일까지 한국미술의 비전을 제시한 작가를 재조명하는 대규모 회고전인 '박이소(1957-2004): 기록과 기억' 전을 연다. 2006년 '로댕갤러리'에서 2011년과 2014년도에 '아트선재센터'에서 개인전이 열린 적이 있었지만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처음 열리는 대규모 회고전이다.

이번 전시는 약 50여 점의 작품 및 도큐먼트, 드로잉, 비디오 등 특히 유족이 기증한 200여점의 아카이브를 통해 작가 생애와 작품을 입체적으로 조명할 수 있게 되었다. 이번에 재편집한 '한국예술종합학교' 재직 시절 그에 대한 제자들 기억을 인터뷰 형식으로 들을 수 있다.

제1전시장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강한 인상을 주는 사진 하나가 보인다. 제목은 '단식 퍼포먼스(1984)' 박이소가 뉴욕에 유학하면서 가장 배고프고 고단한 시절의 밥솥을 어깨에 메고 쓸쓸히 걷는 뒷모습이다. '이영철' 비평가의 아래 글을 읽어보면 그 정황이 더 선명해진다.
"박이소는 11월 말의 추수감사절 때, 사흘간의 단식행위를 통한 공복 속에서 밥솥을 밧줄에 이어 목에 매단 채, 단식 마지막 날 빈 속으로 정오에 집을 나서 강을 잇는 뉴욕 브루클린 교를 건너간다. 20대 말에 이런 걸 결행했다는 건 결코 간단히 넘길 일이 아니다. 그는 미술에서의 퍼포먼스가 1차적인 목적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거기에는 아무런 관객도 없었고 단지 친구가 있었을 뿐, 당시 가까이 지내던 강익중이 사진으로 남겼다."

80년대 순수미술과 참여미술이 첨예하게 대립하던 국내 상황에서 박이소는 어느 유파에도 속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번 전시를 기획한 '임대근' 학예연구관 말대로 그가 한국미술의 '역사(Legend)'가 되었다는 건 아마도 그가 작가로서 한국현대미술의 허상과 실상을 파헤치며 담론생산자로, 미래를 꿰뚫어보는 영민한 비평가 역할을 했기 때문이리라.

박이소는 홍익대와 뉴욕의 명문인 '플랫 인스티튜트' 미술대에서 공부했지만 얼핏 보면 벽이 없는 미술관을 지향하는 거리미술가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2011년 '김달진연구소' 10주년에 한국의 미술평론가 큐레이터 등 전문가 100명을 대상으로 "2천년 이후 작고한 미술인 중 한국미술발전에 공로자가 누구냐"라는 질문에 백남준에 이어 2위에 올랐다.

그는 한국미술의 '북두팔성'

박이소 I '북두팔성' 스펀지, 벽돌, 알루미늄, 스티커 등 210×117×39cm 1997-1999. 개인소장
 박이소 I '북두팔성' 스펀지, 벽돌, 알루미늄, 스티커 등 210×117×39cm 1997-1999. 개인소장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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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이소에 대한 한국미술계 평가는 아주 높다. 먼저 강수미 비평가의 평을 들어보자.

"20세기에서 21세기 한국 문화예술의 하늘에 난데없이 나타나 너무 일찍 스러진 '한국 문화예술의 별'이었다. 우리가 헤아리지 못한 가운데 여전히 담담하게 떠 있는 북두팔성이었다. 한 번도 속물로 떨어지지 않은 '정신의 예술'이었다. 그는 미술사의 누구로부터도 영향 받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현대미술뿐만 아니라 미술일반의 영역에서 유일무이한 세계를 구축했다. 그는 철저하게 몸이 겪은 문화적 경험과 느린 호흡의 지적 사유를 바탕으로 했기에 우리가 그의 미술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박이소의 친구인 이영철도 그를 추켜세운다. '푸코'의 키워드 '파르헤지아'로 그를 비유한다. '파르헤지나'는 두려움 없이 진실을 말하는 용기라는 뜻으로 푸코의 개념어다. 이영철이 박이소를 이런 인물로 비유한 건, 비판의식과 창조성이 결여된 똑똑한 바보를 생산해내는 사회에서 지식인(예술인)이라고 자처하는 자들의 근시안적 안목을 발가벗기면서, 동시에 그런 엄격한 도덕적 잣대와 기준을 자신에게도 들이대는 인물로 봤기 때문이리라.

김수영의 죽음을 닮은 '박이소'
박이소 프로필 사진
 박이소 프로필 사진
ⓒ 박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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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이소는 다소 시니컬했지만 정직한 사람이었다. 작가 사진을 보면 눈빛이 초롱초롱 빛난다. 지조 있는 선비 같다. 그는 정직성을 터무니없이 중요한 보편적 가치라고 말했다. 정직이 사실은 진보보다 더 상위의 미덕이다. 정직이란 말엔 순교자의 냄새가 난다. 박이소는 그래서 '빌리 조엘'이 부른 너무 외로운 그 말 '어니스티(Honesty 정직성)' 가사를 좋아했다.

그런 면에서 그는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사람이었다. 그가 선동성을 가지는 것은 거기에 바로 정직성과 윤리적 엄격함이 동반되기 때문이리라. 물론 그의 선동성은 타협성이 없어 곧고 바르기에 해 충돌의 소지를 보인다. 심지어는 사회적 통념을 깨는 것처럼 보인다.

박이소는 정직성이라는 면에서 60년대 온몸으로 시를 밀고 나가다 47세에 버스에 치여 죽은 시인 김수영을 닮았다. 박이소도 90년대 한국미술을 온몸으로 밀고 나가다 47세 요절했다. 그의 주검을 사람들이 찾았을 때 그는 이미 죽은 지 한 달이 넘었다. 그는 예술을 '양호실'로 비유할 정도로 허약체질이었던 모양이다. 그해 나온 기사를 여기에 옮겨본다.
"작년에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작가로 출품하며 입지를 다진 듯했던 그가 지난 4월 26일 새벽 심장마비로 외롭게 숨졌다는 사실이 한 달여 지난 주말에야 전해졌다. [...] 유족의 말을 들어보면 고인은 서울 청담동 누나네 2층 작업실에서 평소 좋아하던 재즈음반과 와인이 놓인 탁자 옆 소파에 잠자듯 숨을 거두었단다. 주검을 화장했으나, 유골은 장지를 구하지 못해 지난 6월 2일에야 경기도 파주 기독교묘지에 안장됐다. 고인이 평소 유족에게 미술계 쪽 얘기를 안 해 메일을 정리하다 뒤늦게 미술계 주소를 보고 연락했다. 비보를 접한 지인들은 6일 낮 파주에 있는 고인의 묘를 찾아 비석을 세우는 예의를 차렸다."

뉴욕 브루클린에서 '대안미술' 시작
박이소가 ‘마이너 인저리(Minor Injury)’ 관장으로 이 미술 공간을 운영할 때 1988년 3월 '재키 배튼필드'와 한 인터뷰 내용이 담긴 글.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연구소 소장.
 박이소가 ‘마이너 인저리(Minor Injury)’ 관장으로 이 미술 공간을 운영할 때 1988년 3월 '재키 배튼필드'와 한 인터뷰 내용이 담긴 글.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연구소 소장.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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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이소는 1984년 뉴욕 플랫을 졸업 후 브루클린의 한 창고를 빌려 실험적 대안공간인 '마이너 인저리(Minor Injury)'를 운영했다. 그는 이렇게 작가이면서도 미술계 소수자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기획자가 되었다. 이렇게 다문화사회에서 비제도권 시각의 미술운동을 펼쳤다. 그는 새로운 건 언제나 밑바닥에서 나온다는 생각한 것 같다. 또한 미술 스터디모임도 주도했다.

그 공간에서는 단 한반도 자신의 작품을 전시한 적은 없었다니 진짜 프로다. '박이소(Bahc Yiso)'의 본명은 '박철호'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박모'라고 썼다. 그는 1988년 9월 29일부터 11월 5일까지 뉴욕 워커스트리트 '아티스트스페이스'에서 한국의 민중미술전(MIN JOONG ART, A new cultural movement from Korea 1988/ Artists Space 55 Walker Street New York NY 10013. September 29–November 5, 1988)을 기획해 한미양국 사이의 최신동향과 알려주고 미술경향을 이어주는 가교역할도 했다.
뉴욕 워커스트리트 '아티스트스페이스'에서 1988년 9월 29일부터 11월 5일까지 열린 한국의 '민중미술(Min Joong Art)전' 포스터 중 하나
 뉴욕 워커스트리트 '아티스트스페이스'에서 1988년 9월 29일부터 11월 5일까지 열린 한국의 '민중미술(Min Joong Art)전' 포스터 중 하나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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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1993년 10월 15일부터 1994년 1월 9일까지 뉴욕 '퀸즈 미술관'에서 '태평양을 건너서(Across the Pacific: Contemporary Korean Art and Korean American Art at the Queens Musuem of Art New York NY 11368 October 15, 1993-January 9, 1994)이 열렸다. 양국에서 이영철과 '제인 파퍼'가 기획했다. 박이소는 작가 및 코디네이터로 참가했다. 한국과 미국·캐나다에서 활동하는 한국작가 작품을 소개한 전시로 미국에서는 한국미술이 최초로 소개되는 야심찬 기획전이었다.

박이소는 이 전시 후 리뷰를 썼다. 거기에서 '"제한된 주제에도 내용이 놀랍도록 다양하고 정치적이라고 하기엔 상당한 유연한 전시였다"는 당시 <뉴욕타임스>에 나온 기사 평도 소개하면서 "이 전시는 결론적으로 그 내용에서 뿐만 아니라 조직방법에 있어서도 한국미술이 해외에 소개하는데 있어 아주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라고 평가했다.

이 전시에는 손장섭, 김봉준, 박불똥, 이종구, 김홍주, 이수경, 최정화, 윤석남, 김호식, 김봉준, 최진욱, 안규철 등 한국작가 12명이 참가했고 박이소, 최성호, 마이클 주, 이진, 김영, 김형수, 김진수, 민영순 윤진미 등 미국에서 활동하는 한국작가 24명도 참가했다.

박이소는 이뿐만 아니라 한국에 당시에 필요한 미술전문서적인 <문화연구와 문화이론> 등의 번역가로서도 전혀 손색이 없었다. 특히 2006년에 나온 <이것은 그림이 아니다>라는 책은 미술인이라면 누구나 읽어야 하는 필독서였기에 매우 유익한 하나의 사건이었다.

제도화된 당대미술에 '일침'을
박이소 I '인간적-비인간적' 캔버스에 아크릴 180×180cm 1987 개인소장
 박이소 I '인간적-비인간적' 캔버스에 아크릴 180×180cm 1987 개인소장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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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전시를 기획한 임 연구관이 해설 중에 "뒤샹도 그렇지만 작가라면 자고로 기존의 사고에 대해 일침을 가하는 자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했는데, 박이소는 그런 면에서 충실한 작가였다. 상업주의와 관료주의에 빠진 한국미술의 경직성이 낳은 '무사안일'과 '날림성' 등에 대해 그냥 넘어가지 못했으리라. 그는 이런 것에 대해 '결벽증'이 있었던 사람이다.

그림에서 그에게 더 고상하고 더 훌륭하고 더 숭고한 그 어떤 개념은 없었다. 다만 그는 '무엇을, 어떻게'보다 '누가' 현대미술을 규정하고 '왜' 그런 서열이 나오는지를 묻는다. 사실 그의 창작물을 보면 작품인지 폐품인지 구별이 어렵다. 그는 "내 작품이 별 의미가 없어 보일 수도 있으나 그래도 사람들 기분을 좋게 하는 그런 작품이 되면 좋겠다"고 술회했다.

그는 아무 것도 아닌 그 어떤 걸 그렸다. '인간적-비인간적'이라는 작품도 그렇다. 도덕이나 종교에 기대지 않고 자유인으로 살아가는 '니체'적 인간상을 연상시킨다. 이 작품 한가운데 '김근태'가 80년대 교도소에서 쓴 <고문일기>의 일부가 적혀 있었다. 김근태가 그런 인물이었기 때문인가. 그 당시 뉴욕에 있었지만 한국 민중운동에도 그 연대의 끈을 놓지 않은 것 같다.

터무니없는 '2003년 베니스' 출품작
박이소 작고 1년 전 2003 베니스비엔날레 출품작. 각목, 자갈, 대야, 물, 타일, 콘크리트. 이 작품을 보면 각목 한 부분에 베니스비엔날레 26개국 '국가관'과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국제관' 전시모형이 새겨져 있다. 멋쩍은 유머가 풍기는 설치미술이다
 박이소 작고 1년 전 2003 베니스비엔날레 출품작. 각목, 자갈, 대야, 물, 타일, 콘크리트. 이 작품을 보면 각목 한 부분에 베니스비엔날레 26개국 '국가관'과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국제관' 전시모형이 새겨져 있다. 멋쩍은 유머가 풍기는 설치미술이다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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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그의 작품을 좀 더 살펴보자. 위 작품은 박이소 작고 1년 전인 '2003년 베니스비엔날레 출품작'이다. 터무니없이 썰렁하고 허접하기 이를 데 없다. 너털웃음이 절로 난다. 임 연구관 말에 따르면 작품 설치하는 사람들이 어느 것이 작품인지 구별하기 힘들었단다.

이럴 듯 그의 작품은 고급미술을 반대하는 '아르테포베라'를 연상시킨다. 이들은 볼품없는 것으로 손질을 최소화해 자신의 사유를 구현하는 작가 그룹이다. 싸구려 스티로폼, 각목, 투명비닐 등 박이소가 쓰는 재료가 그들과 유사하다. 박이소는 작업에서 관객에게 아부하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그렸기 때문이리라. 기존의 미적 허세와 과장을 비꼰 것인가.

이 베니스비엔날레 출품작에 대해 강수미 비평가는 이렇게 평한다.
"박이소의 이 작품은 허접한 물건과 속화된 언어를 외양으로 했지만 그런 것의 힘을 빌려 합리성의 논리로만 움직이는 우리네 평범한 사람의 인식에 즐거운 바람을 불어넣는다. 그때 그의 작품은 '허무하고 썰렁한 개그' 같다. 허나 '신적인 유머'의 경지에까지 도달하게 된다."

유머를 최고의 지성으로 봤던 박이소는 "인간이 가장 고귀해지는 순간이 고차원의 유머를 구사할 때가 아닌가 싶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 유머가 우스갯소리나 단어의 조합으로 이뤄진다고 믿는 듯하다. 그냥 물건이나 미술작품도 시각적 면에서 엄청나게 웃길 수 있다는 것을 별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면서 그의 작업에서 유머가 중요함을 피력했다.

하긴 그의 경향은 그 어느 구획에 속하지 않는다. 커피, 콜라, 간장으로 그린 '쓰리 스타 쇼'은 다문화적이고, '밥솥'은 민중적이고, 부적을 사용해 '남북평화'를 기원한 작품은 민족적이고, 정선의 '산수화'를 초단순형으로 바꾼 작품은 선비적이고, 추사의 '사군자'를 흉내 낸 '그냥 풀'은 서예적이고, 수치가 들어간 '1평'이나 '팔방미인'은 문화인류학적이다.

또한 그는 '요셉 보이스'의 '문화=자본력'을 패러디한 작품 '자본=창의력'도 있다. 박이소는 "내가 그의 작품을 번역했다"라고 작품 하단에 적을 정도로 그와 통했다. 보이스는 토끼에게 현대미술을 설명하는 퍼포먼스를 통해 20세기 전쟁의 학살자가 바로 우리임을 폭로해 유명해졌다. 이런 개념미술은 지금 우리가 뭘 위해서 살고 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작가의 혼이 담긴 21권 '작가노트'
박이소 I '작가노트' 미술관 측에서 관객들이 더 쉽게 그 내용을 볼 수 있도록 분류하고 색인화해 모니터에 메뉴판을 만들고 터치버튼으로 작동할 수 있게 했다. 임 연구관이 시범을 보이다
 박이소 I '작가노트' 미술관 측에서 관객들이 더 쉽게 그 내용을 볼 수 있도록 분류하고 색인화해 모니터에 메뉴판을 만들고 터치버튼으로 작동할 수 있게 했다. 임 연구관이 시범을 보이다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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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유족이 기증한 작가노트는 모두 21권이다. 7권씩 전시장 세 곳으로 나눠 소개하고 있다. 미국유학시절인 1984년부터 작고 직전인 2004년까지 그의 작업과정이 마치 일기처럼 꼼꼼히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그는 미국에서도 한국정치의 여러 상황에 대한 관심과 예술가로서 사회적 역할에 대한 고민도 보인다. 그런 면에서 작가의 체취가 강하게 풍긴다.

이 작업노트에는 무엇보다 후배들 창작욕을 자극하는 콘셉트와 아이디어가 그득 담겨져 보물창고 같다. 박이소는 시간과 체력과 자금이 달려 제대로 펼칠 수 없었던 것을 아쉬운 대로 이런 노트를 통해서 만회하려 한 것인가. 그냥 작품으로 봐도 손색은 없다. 그런 면에서 그는 작품의 완성에 대한 집착보다는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제공한 사람이었다.

박이소의 유작, '우리는 행복해요'
박이소 I 제1전시장에 설치된 '우리는 행복해요' 2004
 박이소 I 제1전시장에 설치된 '우리는 행복해요' 2004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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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그의 대표작인 '우리는 행복해요'를 감상해보자. 제목이 단순한 만큼 그 의미도 심오하다. 박이소는 중고시절 교련받기 싫어 중퇴하고 검정고시로 대학에 진학했단다. 이것만 봐도 그는 외적 압력으로 강제적으로 뭔가 해야 한다면 그런 불행을 못 견디는 사람이었다.

사진 찍히기를 싫어해 별로 남은 사진은 없지만, 사진에 "지식인에게 행복한 순간이란 좀처럼 없다"는 헤밍웨이의 문구가 적혀 있었다고. 사실 작가에게 행복의 시간이 너무 적었기에 이런 작품이 나왔는지 모른다. 이렇게 행복이란 누구에게나 절박한 주제이기도 하다.

유작이기도 한 이 작품은 사후 2004년 '부산비엔날레'와 미국 'LACMA'와 '휴스턴미술관' 등에서 전시되었다. 이런 역설적 메시지가 담긴 이런 공공미술을 구현하는데 기여하는 현대미술의 한 단면도 보여준다. 끝으로 첨언하면 이번 회고전을 계기로 <현실문화연구>에서 박이소 3권 <전집>도 나오고,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도록>도 나올 예정이다.

덧붙이는 글 | [수상경력] 2006년 올해의 예술상, 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02년 에르메스 코리아 미술상 수상, 한국 에르메스 [전시설명회] 화요일부터 일요일 오후 1시와 오후 2시 1층전시실



태그:#박이소, #박모, #마이너 인저리, #태평양을 건너서, #박이소작가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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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중 현대미술을 대중과 다양하게 접촉시키려는 매치메이커. 현대미술과 관련된 전시나 뉴스 취재. 최근에는 백남준 작품세계를 주로 다룬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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