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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음식의 평등을 불러온 바게트

아침 일찍 침실에서 나오니 아빠는 아직도 응접실의 간이침대에서 주무시고 계셨다. 원래는 침실을 드리려고 했으나 아빠가 만류하셨다.

나는 발꿈치를 들고 조심조심 밖으로 나왔다. 아빠가 좋아하시는 바게트를 사오기 위해서였다. 바게트는 저녁에 사두면 굳어져서 맛이 없다. 나는 아빠에게 "우리나라도 바게트를 배달해주는 곳이 있으면 좋겠다"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젊어서 아빠가 여행하신 나라 가운데는 아침마다 갓 구운 빵을 배달해주는 곳이 있었다는 것이다.

인터넷으로 검색한 근처의 유명 빵집을 찾아갔다. 가게를 지키던 단발머리의 아주머니가 무얼 원하느냐는 눈길을 보내기에 진열대 뒤에 수북이 쌓여 있는 바게트를 가리키며 대학에서 배운 불어를 처음 사용해 보았다.
 
"J'aimerais deux baguettes(바게트를 2개 주세요)."


조마조마했는데 통했다. 바게트가 1유로 남짓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일이 있어 1유로짜리 동전 3개를 꺼내니 아주머니는 그걸 동전 기계에 넣으라고 했다. 지시대로 하자 거스름 동전이 나왔다. 빵 가게에 동전 기계가 있다는 것도 좀 이색적이었다.

아파트로 돌아와 커피를 끓이고, 어제 저녁 식품점에서 사온 혼합 샐러드를 씻어 잘게 썬 훈제 연어와 섞은 다음 드레싱과 함께 식탁에 올려놓았다. 바게트는 겉이 딱딱하지만 속은 부드럽고 씹을수록 쫄깃한 맛이 난다.

"역시 바게트다."
 
겉은 딱딱하지만 속은 부드럽고 씹을수록 쫄깃한 맛이 나는 바게트
 겉은 딱딱하지만 속은 부드럽고 씹을수록 쫄깃한 맛이 나는 바게트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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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아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셨다. 그 모습을 보자 사오길 잘했구나 싶었는데 실제 잼을 발라 먹어보니 너무너무 맛있었다.

"값도 1유로 남짓이던데요."
"그게 아마 법으로 통제 받아 그럴 걸?"
"에? 통제 받는다고요?"


옛날 가난한 사람들은 검은 빵, 부자들은 흰 빵을 먹었는데, 대혁명 뒤로는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재료와 성분이 같은 빵을 먹는 이른바 '빵의 평등권(Pain d'égalité)'이 선포되었다고 한다. 그때 바게트의 길이는 80㎝, 무게는 250g으로 한다는 등의 규정과 함께 가격도 지방법인가로 통제됐다. 1980년에 와서 자율화 되었으나 아직도 그 전통이 남아 가격이 크게 오르진 않는 것 같다는 얘기다.

"재미있네요. 빵의 길이와 무게, 그리고 가격까지 법으로 통제한 나라가 있었다는 게. 바게트는 원래 막대기란 뜻이죠?"
"그래. 정식 명칭은 막대기 빵(Baguettes de pain)이었을 거야."
"바게트를 나폴레옹이 만들었다는 설이 있던데요? 전쟁 중 병사들이 배급받은 둥근 빵을 바지 주머니에 휴대하는 것이 행군에 방해되는 것을 보고 나폴레옹이 등에 꽂고 행군할 수 있는 막대기 빵을 만들라고 자신의 요리사들에게 지시했다고요."

"사실일까? 연대가 안 맞아. '빵의 평등권'이 나폴레옹의 등장보다 앞서거든."
"하긴 빈의 긴 빵이 수입되어 프랑스에서 바게트로 발전했다는 설도 있고, 파리 메트로를 건설할 때 노동자들이 칼 없이도 잘라 먹을 수 있는 막대기 빵을 가지고 다닌 데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고 그래요."
"메트로 설도 '빵의 평등권'보다 한참 뒤가 아니냐?"
"그러네요. 속설은 그냥 속설인가 봐요."


그렇게 바게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아침을 먹은 뒤 오늘 관람하기로 한 루브르박물관(Musée du Louvre)의 동선에 대해 의논하기 시작했다. 영어 위키백과에는 수장품이 모두 38만점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불어 위키백과에는 55만 점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그게 다 전시되어 있진 않겠죠?"
"불가능하지. 통상 전시되는 작품은 3만 5천 점 정도인데 그래도 이게 간단한 숫자가 아니야. 미리 볼 품목을 정해두고 가지 않으면 몸이 피곤해진다."


젊어서 대영박물관이나 메트로폴리탄미술관 등을 구경하신 아빠의 관람 요령이기도 했다. 근동·이집트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보아야 할 회화와 조각품이 너무 많기 때문에 중점 대상을 정해두지 않으면 나중엔 눈과 다리와 허리가 다 피로해진다는 것이었다. 루브르박물관의 전시실은 모두 403개. 돌아다녀야 할 갤러리의 총넓이는 우리 개념으로 약 2만2천 평.

"다리가 아플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괜찮다. 너랑 다니니 힘이 나는 것 같구나. 우리에게 이런 시간이 있었던가?"
"없었죠, 아마?"


내가 배시시 웃으며 볼펜으로 적은 명단을 건넸다. 그러자 아빠가 다시 두어 군데 추가하시고 해서 완성된 관람 목록은 다음과 같았다.

① 다빈치의 <모나리자>(La Joconde)
② 밀로의 <비너스>(Venus de Milo)
③ 니케의 <승리의 날개>(La Victoire de Samothrace)
④ 엥그루의 <목욕하는 여인>(La Baigneuse)
⑤ 티에폴로의 <최후의 만찬>(La Cène)
⑥ 프랑수아 부셰의 <다이아나의 목욕>(Bain de Diane)
⑦ 드라투르의 <퐁파두르 후작부인>(La marquise de Pompadour)
⑧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La Liberté guidant le peuple)
⑨ 미켈란젤로의 <빈사의 노예>(L'Esclave mourant)
⑩ 다비드의 <나폴레옹 대관식>(Le Sacre de Napoléon)


이 작품들을 중점적으로 찾아다니는 중간마다 다른 작품도 감상한다는 복안이었다.

[아빠의 이야기] 16세기 루브르궁은 현재 크기의 45분의 1이었다

서두른다고 했는데도 박물관에 도착하니 벌써 오전 10시였다. 숙소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 걸어갔으나 참고로 루브르박물관의 인근 메트로 역은 루브르-리볼리(Louvre-Rivoli)다. 지금은 박물관이 되어 있는 루브르궁(Palais du Louvre)의 건물부터 감상하기로 했다.

아파트의 위치 때문에 우리가 먼저 들어가게 된 곳은 튈르리 정원(Jardin des Tuileries) 쪽이 아니라 포르트 데 자르(Porte des Arts) 쪽이었다. 건물에 둘러싸여 ㅁ자가 되어 있는 사각형 마당(cour carée)으로 들어서니 때가 묻어 어두운 색이지만 마당을 둘러싸고 있는 건물의 단아하고도 장중한 기품이 느껴졌다.

이곳에 축조되었던 성채는 14세기 샤를 5세 때 왕궁으로 바뀌었고, 그 뒤 프랑수아 1세→앙리 2세→루이 13세→루이 14세 등을 거치며 크기가 점점 늘어나 마침내 나폴레옹 3세 때인 1860년에 와서 현재의 모습이 완성되었다.
 
16세기 중반까지 루브르 궁은 현재 루브르박물관 전체 건물의 45분의 1정도 크기였다.
▲ 루브르 궁전의 초기 모습 16세기 중반까지 루브르 궁은 현재 루브르박물관 전체 건물의 45분의 1정도 크기였다.
ⓒ 강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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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16세기 중반까지의 왕궁은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루브르박물관 전체 건물의 45분의 1정도에 지나지 않는 단출한 궁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초기의 루브르궁도 어제 본 보주광장의 건물과 별반 다르지 않게 되는 것이다. 지금 볼 수 있는 루브르박물관의 웅장한 모습은 16세기 중반부터 19세기 후반까지 9명의 왕을 거치며 규모를 점차 확대해온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루브르 박물관 전경
 루브르 박물관 전경
ⓒ 강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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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몇 장 찍은 뒤 나폴레옹 마당(Cour Napoléon)으로 들어가니 중국계 미국인 건축가 이오 밍 페이가 디자인했다는 유리 피라미드가 보였다. 앞으로 다가가자 입장하려는 관람객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이래서 아침 일찍 가라고 안내 책자 같은데 나와 있는 거네요."
"줄을 서야겠구나."
"잠시만요. 저건 표 사는 줄 같은데요."


그곳 안내원에게 물어보니 역시 그랬다. 표를 미리 구입한 사람의 줄은 달랐다. 딸이 인터넷을 통해 박물관 표를 미리 구입했기 때문에 우리는 입장객 줄에 섰다.
 
루브르 박물관 입장을 위해 유리 피라미드 앞에 줄을 선 관람객들
 루브르 박물관 입장을 위해 유리 피라미드 앞에 줄을 선 관람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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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브르박물관을 찾는 관람객은 매년 800∼900만 명에 이른다. 이들의 효율적 입장을 유도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유리 피라미드 앞의 긴 줄은 입장권이 아니라 보안검사를 하기 위한 것이었다. 명작들이 많기 때문에 감시는 철저했다. 눈에는 잘 띄지 않는데 이곳 감시요원만 1232명이고, 감시 카메라는 모두 900대가 가동되고 있다고 한다.

검사대를 통과한 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하 2층으로 내려갔다. 프랑스의 층수는 한국이나 미국과 계산하는 방법이 다르다. 우리의 1층은 프랑스식으로 0층이고, 우리의 2층은 프랑스식으로 1층이다. 처음 엘리베이터를 탈 때 혼란을 겪었다. 지하 2층 안내소에 가면 한국어로 작성된 무료 안내지도가 있다.
 
루브르 박물관 지하2층에 있는 안내소
 루브르 박물관 지하2층에 있는 안내소
ⓒ 강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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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과 함께 명단에 적은 작품들을 찾아다녔다. 미술전문가들이 우리 돈 1조 원 이상의 가치로 추정하고 있는 <모나리자(Mona Lisa)>는 드농관(Denon) 2층에 전시되어 있었다. 그곳은 언제나 몰려드는 관람객 때문에 앞에서 정밀 사진을 찍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모나리자' 앞은 언제나 관람객들로 붐빈다.
 "모나리자" 앞은 언제나 관람객들로 붐빈다.
ⓒ 강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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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피렌체의 부호 프란체스코 델 지오콘도를 위해 그 부인을 그린 것이라는 <모나리자>는 세로 77㎝, 가로 53㎝의 작은 유채 패널화에 지나지 않는다. 지오콘도의 부인을 그린 초상화이기 때문에 이탈리아에서는 <라 조콘다(La Gioconda)>, 프랑스에서는 <라 조콩드(La Joconde)>라 부르는 <모나리자>가 저렇게까지 유명해진 이유는 무얼까?
 
한화 1조원 이상의 가치로 추정되는 '모나리자'
 한화 1조원 이상의 가치로 추정되는 "모나리자"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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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인의 전형, 신비한 미소 등 여러 가지 해설이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잘 납득되지 않는지 딸은 고개를 갸우뚱한다. 딸은 원래 홍보학을 전공했다. 그래서 좀 더 납득할 만한 설명을 들려주기로 했다.

"사실은 도난사건으로 매스컴을 탔기 때문이다. 당시 프랑스 유력신문인 <르피가로> <프티 파리지앵> <파리-주르날>을 위시하여 미국의 <뉴욕타임스> <뉴욕저널> 등이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이 작은 그림은 세계적인 뉴스가 되었던 거야. 그것도 되찾기까지 장장 2년 동안."

"누가 훔친 거예요?"
"루브르박물관 직원이었던 이탈리아 사람. 그는 이 작품이 이탈리아 출신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린 것이기 때문에 이탈리아 박물관으로 가져가야 한다는 애국심에서 훔쳤다고 털어놓았지. 하지만 그건 나중 일이고, 사건 당초엔 우리가 앞장에서 살펴본 아폴리네르와 피카소가 도둑 용의자로 몰려 체포되었다."
"네에?"


<파리-주르날>은 그림의 행방정보에 대한 현상금을 내걸었고, 이 현상금을 타기 위해 신문사에 편지를 보낸 자칭 도둑은 자기의 신원이 '이냐스 도르므상 남작(Baron Ignace d'Ormesan)'이라고 밝혔는데, 그 이름은 바로 시인 아폴리네르가 쓴 단편소설집 <이단교주 주식회사(L'Hérésiarque et Cie)>의 주인공 이름이었다. 자칭 도둑은 4년 전 루브르박물관에서 훔쳤다는 동상을 증거로 보여주면서 자기가 한때는 아폴리네르의 비서로 그의 지시를 받고 행동을 취한 것이었다고 털어놓았다.

이 같은 기사가 실리자 경찰이 조사해보니 원래 이탈리아에서 온 아폴리네르는 도난 미술품을 구입한 흔적이 있는 등 여타 행적도 수상쩍은 데가 있어 전격 체포한다. 아폴리네르는 가까운 사람들을 모조리 취조하겠다는 경찰 으름장에 자기와 친한 피카소 이름을 댄다. 이 바람에 구속된 피카소는 화가 나서 아폴리네르가 처음 보는 사람이라고 발뺌한다. 이후 강도 높은 조사가 이어졌으나 더 이상 다른 증거가 나오지 않자 투옥되었던 아폴리네르는 먼저 풀려난다.

하지만 이 일로 애인 마리 로랑생은 아폴리네르와 결별을 선언하고, 이에 슬픔을 느낀 아폴리네르는 '미라보 다리'라는 시를 발표한다. 이런저런 사건들이 잇달아 보도되면서 <모나리자>는 더욱 유명세를 타게 되었던 것이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딸이 결론지었다.
 
"<모나리자>가 유명해진 건 결국 매스컴 때문이었네요."
"그래. 지금도 그렇잖니? 누구든 신문이나 TV에 자주 등장하면 유명인사가 되어버리는."


그렇게 대답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앞에 서 있던 사람들이 빠져나가 좀 더 가까이 다가가서 그림을 감상할 수 있었다. 안개에 싸인 것처럼 윤곽선을 사라지게 하여 부드럽고 섬세한 색의 변화를 주는 스푸마토(sfumato) 기법으로 그렸다는 두 입술. 그 언저리에 알 수 없는 미소를 머금은 모나리자가 그윽한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는데, 온화한 듯 오싹한 그녀의 신비로운 매력은 역시 부정할 수가 없었다.
 

태그:#모나리자, #루브르박물관, #파리여행, #바게트, #강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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