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공작>을 연출한 윤종빈 감독.

영화 <공작>을 연출한 윤종빈 감독. ⓒ CJ 엔터테인먼트


남한이 버린 북파공작원 흑금성의 이야기 <공작>이 지난 8일 개봉했다. 이미 올해 칸영화제 미드나잇스크리닝 부문에 초청돼 세계 관객과 만난 이후 약간의 후반 작업을 거친 결과물이다. 박근혜 정권 때 쉬쉬하며 만든 작품이 정권이 바뀌고 얼어붙었던 남북관계가 화해 분위기일 때 공개되는 상황에 윤종빈 감독의 감회 역시 새로울 터. 8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윤 감독을 만날 수 있었다.

본래 중앙정보부 관련한 영화를 준비하던 중 흑금성의 존재를 알게 된 감독은 방향을 틀어 그의 행적을 팠다. 공작원으로서 북한 최고 권력자를 대면하고, 각종 임무를 수행했지만 조국은 그의 정체를 공개함으로써 사실상 내쳐 버린다. '이중 스파이' 낙인이 찍힌 흑금성은 어쩌면 우리 현대사의 어두운 면을 상징하는 인물일지 모른다.

몰랐어야 할 이야기

포부는 컸다. 기존 스파이물과는 다른 스파이물을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그에게 있었다. 윤종빈 감독은 "스파이 영화의 본질을 뒤집는 스파이 영화를 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고 운을 뗐다.

"스파이라는 존재는 곧 냉전시대의 산물이잖나. 스파이는 곧 군인이고 피아식별이 중요한데 <공작>은 적이라고 믿었던 한 사람을 이해하고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는 이야기다. 신념이 중요한 작품이었지. 흑금성의 존재를 처음 알았을 때 그만큼 충격이 컸다. 한국에도 이런 스파이가 있었고, 열심히 활동했었구나 싶었다. (실제 흑금성 박채서씨를 연결해 준) 김당 기자에 따르면 흑금성은 A급 공작원 10명 중 한 명이라더라. 이들의 기록은 문서로도 안 남긴다는데 그럼 흑금성 말고 또 다른 9명이 더 있다는 소리잖나. 놀라웠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우리가 몰랐어야 할 이야기였다. 왜 국가가 그의 존재를 인정했을까. 영화 기획 당시 그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수감 중이라 가족을 통해 접촉했다. 이미 몇몇 분들이 흑금성 이야기를 다뤄보겠다고 접촉했었는데 다 거절했다고 하더라. 제가 제작사 대표를 통해 그분을 접촉했을 땐 본인의 사실을 알려야겠다고 마음을 바꾸신 뒤였다. 그래서 그분께 회고록을 써달라 부탁했고, 직접 써주신 책 세 권 분량의 회고록을 참고했다."


 영화 <공작>의 한 장면

영화 <공작>의 한 장면 ⓒ CJ 엔터테인먼트


그렇게 시작한 일명 <공작> 프로젝트. 본래 보수 정권과 관계자들의 간섭 등을 걱정한 가제였으나 최종적으로는 가제가 제목이 됐다. 최근 출판된 책에 영화 관련 비하인드가 자세히 나와 있는데 등장인물과 사건은 대부분 사실에 근거한 결과물이다. 흑금성과 함께 대북 광고 사업을 했던 기업가 한창주(박성웅) 역시 당시 아자 커뮤니케이션을 운영한 박기영씨를 모델로 했고, 북한 대외경제국 엘리트 리명운(이성민) 역시 실제 인물을 극화했다.

"어떤 배우가 해당 인물을 잘 살릴까가 1원칙이었다. 흑금성의 젊은 시절 사진을 보면 묘하게 황정민 선배와 비슷하다. 물론 정민 선배가 더 잘생겼지만(웃음). 군인의 강직함이 있으면서 선악을 구분하기 힘든 얼굴이더라. 그런 면에서 선배가 떠올랐다. 리명운은 북한 인텔리인데 긴장감을 주는 연기는 대부분 배우가 할 수 있지만 각 잡고 굳어 있어도 인간미가 묻어나는 게 중요했다. 대본엔 흑금성과 리명운이 우정을 쌓는 장면이 하나도 없었거든. 근데 마지막엔 그 우정이 드러나야 했다. 개인적으로 알콩달콩 정을 쌓아가는 장면을 넣긴 싫었다. 그래서 그만큼 인간미가 잘 드러나는 배우가 필요했고, 이성민 선배가 적격이었다.

그리고 흑금성을 제외한 주변 인물을 더 만나기가 힘들었다. 일부러 안 만나려 한 점도 있다. 조심스러웠거든. 말씀하신 박기영씨는 알고 보니 대학교 선배시더라. 그럼에도 접촉하진 않았다."


관록의 배우들마저 좌절시킨 감독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우리가 몰랐어야 할 이야기였다. 왜 국가가 그의 존재를 인정했을까."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우리가 몰랐어야 할 이야기였다. 왜 국가가 그의 존재를 인정했을까." ⓒ CJ 엔터테인먼트


몸을 쓰는 특정 액션이 아닌 밀도 높은 대사로 긴장감을 전해야 했기에 배우들의 부담 또한 컸다. 황정민과 이성민은 여러 인터뷰에서 "그간 했던 작품 중 가장 어려운 역할이었다"고 혀를 내두른 바 있다. 특히 지난 칸영화제 당시 만났던 황정민은 "<공작> 이후 연기를 그만둬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연극을 통해 에너지를 회복하고 싶었다"고 말한 바 있다.

"애초에 모든 결과를 다 알고 있는 전제로 과정을 변주하는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 같은 스파이물이 있는 반면, <공작>은 스토리 전개를 예측할 수 없기에 몰입감이나 긴장감이 있는 류였다. 그래서 정민 선배와 성민 선배에게 영화 시작 후 1시간 30분 정도까진 두 캐릭터의 정확한 태도를 관객들이 몰랐으면 좋겠다고 주문했다. 어떤 사람인지 누구 편인지 알 수 없게 말이다.

배우들을 의자에 꽁꽁 묶어놓고 연기하라고 주문한 것과 비슷하다. 연기할 게 없으니 배우 입장에선 힘들지. 특히 흑금성과 북측 인사들이 만나는 고려관 장면을 다들 힘들어했다. 눈만 깜박거려도 긴장감이 깨지더라. 그 장면을 찍은 이후 다들 걱정했다. 감독인 저도 두렵다. 하지만 다들 선수들이니까 잘 해내실 것이다. 모니터를 보면서 하나씩 만들어 가보자고 말했다." 


 영화 <공작> 배우들이 가장 고생했다고 고백한 장면이다.

영화 <공작> 배우들이 가장 고생했다고 고백한 장면이다. ⓒ CJ 엔터테인먼트


베테랑들의 진을 뺄 정도로 윤종빈 감독은 치열했다. <공작>을 두고 황정민은 '구강 액션'이라 정의하기도 했는데 윤 감독 역시 동의했다. 그는 "말의 힘은 총알보다 강력하다는 걸 보이고 싶었다"며 "배우들과 대사 리딩을 하면서 입에 붙게 대사를 수정해 나갔다"고 전했다.

치열한 대사 액션이 돋보이지만 동시에 <공작>은 스파이물을 가장한 우정과 신념의 영화기도 하다. 전작들에 비해 윤종빈 감독이 인물과 세상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태도가 강하게 담겨 있다. 이 표현에 감독 역시 동의했다.

"그 사이에 아이도 생겼고, 한 아이의 아버지다 보니까 세상을 보던 저만의 안경이 하나 벗겨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전엔 시스템 문제와 사회적 잣대로 뭔가를 바라보려 했는데 말이다. 다만 개인적으론 프랜차이즈(시리즈물)를 하고 싶진 않다. 여전히 새로움이 있는 이야기에 끌린다."

 윤종빈 감독의 <공작> 이후 몇 가지 카드를 만지고 있었다. 이중에 어떤 작품이 차기작이 될까.

윤종빈 감독의 <공작> 이후 몇 가지 카드를 만지고 있었다. 이중에 어떤 작품이 차기작이 될까. ⓒ CJ 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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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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