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지난 이야기 : 올해 초, 나는 한참 불볕더위가 기승일 때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입성했다. 그런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스스로 선택한 현지 영어교사의 길. 관련 자격증 코스를 시작한 뒤에도 비원어민이라 뒤처질 거라는 자격지심에 시달린다. 하지만 곧 그런 생각들이 내 자신을 미운 오리 새끼로 만들었음을 깨닫고 마음을 고쳐먹으려 노력한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어느새 정든 학원의 마지막 날이 찾아온다.)

오늘은 테플(TEFL) 자격증 코스 반 모두가 처참할 정도로 퀭한 표정이다. 지난 2주 내내 진행된 교생 실습과 촉박한 실습 일지 작성 기한에 과하게 에너지를 쏟은 건 나뿐만이 아닌듯하다.

거의 반 좀비 상태에 들어선지라 수업도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그런 우리 덕에 억지로 수업을 끌고 가던 강사 릴라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마침내 마커의 뚜껑을 닫았다. 오늘따라 그 소리가 더 크게 들린 건 내 기분 탓일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둘러보던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자격증 취득에 필요한 모든 교과목들을 다 마쳤어요. 이제 해야 할 건 딱 하나 남았네요."

끝났으면 끝났지 뭐가 또 남았을 게 뭐람. 좋다 말았던 우리는 투덜거리며 그녀가 나눠주는 A4 종이 한 장씩을 받았다. 그녀의 지시대로 종이 한가운데 각자의 이름을 크게 적어놓고 옆 사람에게 돌렸다.

그 뒤, 이름 근처에 개인적인 메시지나 서로를 격려하는 글을 적기 시작했다. 세상 유치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정말 마지막이 왔음을 느꼈다. 많이 시원하고 조금 섭섭한 이 기분. 물론 더 이상 강의실에 죽치고 공부하지 않아도 돼서 시원하고 매일 보던 이들 중 몇은 다시 보지 못할 거라는 사실에 섭섭하다.

제자리로 돌아와 내 종이를 받아들었다. 글 밑에 자기 이름을 적지 않았어도 누구의 글씨인지 추측하기가 어렵지 않다.

강사님을 포함 반의 모두가 손수 롤링페이퍼를 써주었다.
 강사님을 포함 반의 모두가 손수 롤링페이퍼를 써주었다.
ⓒ 송승희

관련사진보기


- 덴마크에서 온 S
; 참 활발한 성격을 가진 너! 그런 너는 항상 설명을 할 때는 포인트를 꼭 집어주고 질문을 할 때는 명확한 동기와 너만의 흥미를 가지고 하지. 또 너는 참 통찰력이 깊은 것 같아. 항상 반의 누구도 하지 않는 질문을 하는 것을 보면 말이야. 아 참, 그러고 보니 나는 여기서 너의 베스트 프렌드(Best friend) 로구나.

- 미국 캘리포니아 출신 J
; 내 생각에는 너는 문법과 그걸 설명하는 데에 강한 것 같아. 이것이 네가 가진 긍정적인 성격과 함께 네 학생의 이해를 돕는 게 큰 도움이 될 거야.

- 미국 뉴욕 출신 D
; 너는 언젠가 '팁 시스템' 전체를 해체하고 말 거야. 한 번에 한 학생씩- 나는 너를 믿어!
(무슨 내용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저번에 '팁 문화'를 두고 논쟁을 한 뒤 조금 꼬인 것 같다)

- 미국 텍사스 출신 N
; 너는 탁월한 유머감각을 가진 것 같아. 그리고 이건 자칫 지루할 수도 있는 수업에 큰 도움이 될 거야!

- 미국 북부 출신 P
; 너는 참 다감한 선생님이 될 거야. 너는 항상 너의 학생의 흥미를 생각하니 말이야. 이건 선생님이 되기 위한 좋은 요소 중의 하나일 거야!

- 미국 테네시 출신 L 강사님
;  너는 좋은 태도를 가졌고 항상 재미있는 아이디어를 반으로 가져와 수업을 이끌지. 또 너는 굉장히 사려 깊고 참을성 있어!

이어지는 졸업 사진 촬영도 잘 마친 우리는 학교에서 준비한 다과와 음료를 들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개강 첫날부터 학원 측의 불의에 대항한 이야기, 교생 실습 중의 온갖 해프닝에 앞으로의 계획까지 다양한 이야기가 서로를 오갔다.
정가운데의 기자와 그의 덴마크인 친구는 비원어민임에도 코스를 마치고 자격증을 손에 넣었다.
▲ 말 그대로 모두가 '백조'가 된 졸업식 정가운데의 기자와 그의 덴마크인 친구는 비원어민임에도 코스를 마치고 자격증을 손에 넣었다.
ⓒ 송승희

관련사진보기


그중 대학만 갓 졸업했지 아무 경력도 없이 넘어온 거라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이라는 J와 모국어임에도 전형적인 이과생이라 문법이 약해 '자신감 제로'라는 D의 이야기는 생전 처음 듣는 이야기라 내 눈이 커졌다. 나만 걱정덩어리인 줄 알았더니 아니었나 보다 싶었다. 나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고 헛기침을 한번 했다.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한다.

"나는 지난 한 달간 내가 미운 오리 새끼 같다고 생각했어."

내 마음을 공감하는 S를 제외하고 모두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도대체 무슨 말이야?"

"모두들 잘 알다시피 난 영어권 국가 출신도 아니고  이쪽에 학위가 있는 것도 딱히 이 바닥 경험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 살면서 이런 것 저런 것 많이 시도해보았지만 이번 같은 리스크 큰 도전은 처음이었던 것 같아."

"하지만..."

모두 무슨 말을 한마디씩 하려고 입을 달싹했지만 내가 입을 먼저 열어 막았다.

"알아. 하지만... 나는 그렇게 느꼈어. 당연히 여기 누구의 잘못도 아니야. 미안해. 지질해 보일까 봐 내 열등감이 더 깊어질까 봐 같은 처지인 S 빼고는 누구한테도 말하지 못했어. 그렇지만 오늘 이렇게 코스도 다 마쳤고... 그랬으니까 괜찮아. 좋은 게 좋은 거지."

갑자기 내 짝지 N이 손을 들고 목소리를 높인다.

"우리 중에서 얘보다 문법 잘 아는 사람 있어?"

"......"

"호주 억양, 사투리, 문화 등등 그쪽에 대해 얘보다 잘 아는 사람 있어?"

"......"

"S 말고는 영어 바닥부터 시작해서 그 마음 아는 사람은? 그래서 기초반 학생들 마음 더 잘 공감할 줄 아는 사람은?"

"......"

"없지? 그렇지?"

그가 이런 질문 공세를 하는 동안 교실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다. 나는 갑자기 코끝이 시큰해져옴을 느낀다. 이어 N은 심지어 같은 나라에서 온 자기네들도 각각 다른 강점과 약점이 있다며 제발 걱정 말라고 비는 시늉을 한다.

모두들 얼굴을 내게 향하고 본인들이 얼마나 모자란 사람들인 설명하기 시작해 내가 다 미안해졌다. 다들 얼마나 열정적으로 고백성사를 하는지 급기야 나는 도망까지 쳐야 했다. 그러면서도 서로를 보며 정신없이 웃었다. 그제서야 나는 비로소 내 약점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자기의 적은 자기 자신이라고 내 약점은 바로 이렇게 생각해왔던 나 자신인 것이다. 애초에 미운 오리 새끼는 없었다. 내가 근심 걱정이 너무 많고 스스로 창조해낸 내 안의 열등감이 너무 커진 나머지 오늘날 이 사달이 난 것이다.

경험이 전무한 초보(교사)일수록 자기 자신을 믿는 게 아주 중요하다. 그런 믿음이 있어도 수업을 잘 이끌어 나가기는 쉽지 않을 텐데 나는 그것조차 없었다. 이게 앞으로 내가 고쳐나가야 할 첫 번째 숙제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평상시보다 학원이 일찍 끝났다. 평소라면 모두들 바람같이 빠져나왔을 테지만 오늘따라 동작이 더디다. 그동안 공부했던 교실을 한 번 더 둘러보고 릴라에게 했던 감사 인사를 또 하고 매일 오르내리던 통로의 계단을 느릿느릿 빠져나왔다. 모두 시원하면서도 조금씩은 아쉬운 모양이다. 그런 우리 모두의 손에는 한 달간의 수고의 증거인 자격증서가 쥐어져있다.

오늘은 방과 후 늘 하던 가로수 나무 밑의 모임을 생략하고 모두 바로 집으로 직행했다. 이유인 즉슨 우리는 오늘 저녁 시내에서 '졸업 쫑파티'를 하기로 하기로 미리 말이 오갔기 때문. 우리는 학원 졸업/자격증 취득을 축하하고 다시 새로운 출발선에 선 서로에게 운을 빌어주기 위해 '한 잔 걸칠' 계획이다!

- 지난 3월 말, 한 달간 정든 학원 앞에서.


태그:#남미, #아르헨티나, #도전, #졸업식, #열등감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