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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무비서에 대한 성폭력 혐의로 기소된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가 지난 14일 오전 서울서부지방법원에서 열린 1심 선고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 1심 선고공판 출석하는 안희정 정무비서에 대한 성폭력 혐의로 기소된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가 지난 14일 오전 서울서부지방법원에서 열린 1심 선고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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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제게 묻습니다. 왜 네 번이냐 당했냐고. 제가 피고인에게 묻고 싶습니다. 왜 그렇게 제게 네 번이나 그랬냐고..." (7월 27일 피해자 의견 진술 중에서)

재판부도 피고인이 아니라 피해자를 의심하고 말았다.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업무상위력에 의한 간음' 선고 결과는 피해자에게 왜 네 번이나 당했느냐고 묻는 것과 다름없었다.

서울서부지방법원 형사합의11부(부장판사 조병구)는 지난 14일 오전 열린 선고 공판에서 자신의 수행비서를 수차례 성폭행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안 전 지사에게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피해자 '태도'만 유심히 본 재판부

사건의 최대 쟁점은 4차례 간음 과정에서 안 전 지사가 자신의 '위력'을 이용했는지였다. 먼저 재판부는 안 전 지사와 별정직 공무원인 피해자는 위력 관계가 맞다고 봤다. 안 전 지사가 유력 정치인이고 차기 대권주자였으며, 무엇보다 도지사로서 별정직 공무원 임면권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피해자의 자유의사를 제압할 충분한 힘을 가졌다는 것이다. 이는 폭행·협박 뿐 아니라 "사회적·경제적·정치적 지위나 권세"까지 위력의 인정 범위로 본 대법 판례와도 일치하는 부분이다.

위력의 존재가 처벌로 곧장 연결되는 건 아니다. 법은 이 위력을 사용해 간음했을 때를 처벌한다. 정확히는 "위력으로써 간음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5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약 30분 동안 읽어 내려간 선고문(판결문의 축약본)에서 재판부가 가장 많이 할애한 부분 역시 위력의 행사 여부였다.

문제는 '무엇'을 근거로 위력의 행사 여부를 판단했는가다. 이날 재판부는 10가지 공소사실 중 첫 번째 간음 부분을 비교적 자세히 설명했다. 둘 사이의 최초 간음이 어떻게 발생했는지 보는 게 이 사건에서 중요하다고 판단해서다. 2017년 7월 30일 러시아 출장지에서 안 전 지사는 피해자를 호텔로 불러 '외롭다' '안아달라'라고 말한다. 이후 간음으로 나아간다. 피고인은 이를 두고 상당한 교감을 나눴다고 주장하고 피해자는 심리적으로 얼어붙을 정도로 매우 당황했었다고 말한다.

이 상황에서 재판부가 주목한 건 피해자의 '태도'였다. 그중에서도 간음 이후에 피해자가 보인 행동에 중점을 두었다. 아침 식사를 위해 안 전 지사가 좋아하는 순두부 식당을 찾으려 애쓴 점, 피해 당일 저녁 피고인과 와인바에 간 점, 귀국 후 지인들에게 피고인에 대한 존경심을 드러낸 점 등을 위력이 행사되지 않았다는 근거로 삼았다.

"신분이 불안정한 상태에서 피고인이 거듭 사과를 하자 범죄의 기억을 잊고 일에 집중하려 한 것"이라는 피해자의 주장에 대해선 "다소 납득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라고만 설명했다. 판단 근거는 밝히지 않은 채 '피해자답지 못하다'라고 결론낸 것이다. 

입법 취지와도 충돌
지난 14일 오전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가 성폭행 혐의 1심에서 무죄를 선고 받은 가운데 페미당당, 불꽃페미액션, 한국여성단체연합, 녹색당 등 여성단체 회원과 시민들이 오후 7시부터 서울 마포구 서부지법앞에 모여 '안희정이 무죄면, 법원은 공모자다' '한국남성들은 오늘 성폭행 면허를 발부 받았다' 등이 적힌 피켓을 들고 항의시위를 벌였다.
▲ 서부지법앞 항의시위 '안희정이 무죄면, 법원은 공모자' 지난 14일 오전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가 성폭행 혐의 1심에서 무죄를 선고 받은 가운데 페미당당, 불꽃페미액션, 한국여성단체연합, 녹색당 등 여성단체 회원과 시민들이 오후 7시부터 서울 마포구 서부지법앞에 모여 '안희정이 무죄면, 법원은 공모자다' '한국남성들은 오늘 성폭행 면허를 발부 받았다' 등이 적힌 피켓을 들고 항의시위를 벌였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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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안 전 지사에겐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수행비서로 일한 지 26일 밖에 되지 않은 피해자에게 성적으로 접근한 이유가 무엇인지는 선고문에서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수행비서 업무 중 하나인 '사소한 심부름'을 이유로 피해자를 같은 공간으로 불러 간음에 이른 과정도 고려되지 않았다. 정치 조직 특성상 피해자의 생사여탈권이 권력자인 피고인에게 달렸다는 점도 마찬가지였다. 검찰이 "피해자의 성적 자기 결정권을 무너뜨린 힘의 원천"이라고 강조한 부분이지만, 어떤 이유로 판단 과정에서 배척했는지 법정에서 밝히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재판부가 '위력의 행사' 부분에서 비현실적으로 엄격한 증명을 요구하면서 입법 취지마저 무색하게 만들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안 전 지사에게 적용된 위력에 의한 간음죄는 강자의 지위에 있는 사람이 약자의 지위에 있는 사람의 성적 자기 결정권을 침해하는 걸 처벌하기 위해 도입됐다. 성적 자기 결정권을 침해해도 폭행이나 협박을 동원하는 '강간'이 아닌 이상 처벌할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하고 그걸 단죄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때문에 강간죄처럼 거부의사 표시와 유형력 행사가 판단 기준이 되어선 안 된다는 게 피해자 측 주장이었다.

피해자 변호인인 정혜선 변호사는 15일 <오마이뉴스>와 한 통화에서 "위력의 의미가 무형의 힘인데 무형의 힘이 행사되는 게 어떻게 유형으로 보이겠는가"라면서 "그건 사실상 '내가 원하는 걸 응하지 않으면 불이익 있을 거야'라고 직접적으로 말하는 등 위력이 눈에 보이는 형태로 나와야만 피해를 믿어주겠다는 것밖에 안 된다"라고 말했다.


태그:#안희정, #업무상위력에의한간음, #조병구, #1심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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