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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대로를 따라가는 길

이르쿠츠크 최초 영화관 꾸도체스트베니
 이르쿠츠크 최초 영화관 꾸도체스트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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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목표는 이르쿠츠크 완전정복이다. 이를 위해서는 시내 마르크스대로와 레닌도로를 따라 난 문화유산을 모두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시 외곽의 즈나멘스키(Znamensky) 수도원과 카잔성당, 티미리야제바(Timiriazeva) 거리 이쪽과 저쪽에 있는 데카브리스트박물관을 보아야 한다. 하루 종일 30개 정도 되는 문화유산을 다 살펴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결과적으로 마지막에는 수박 겉핥기가 되고 말았다.

레닌광장에서 동북 쪽으로 이어지는 마르크스대로를 따라가다 첫 번째 만나는 건물이 이르쿠츠크 최초의 영화관 꾸도체스트베니(27번)다. 1931년 유성영화가 처음 상영되었고, 1935년 최초의 컬러영화가 상영되었으며, 1957년 와이드스크린 영화상영이 이루어졌다. 현재 이 건물에는 러시아 시네마센터가 입주해 있다. 그리고 바이칼대학교 정경대학 문화 센터로 기능하고 있다. 길 건너편에는 바이칼대학교 본부가 있다.
그린라인 투어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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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칼대학교 옆에는 이르쿠츠크 자연사박물관(26번)이 있다. 러시아양식, 고딕양식, 무어양식이 결합된 절충주의 건물로 1903년 지어졌고, 1917년까지 출판사, 인쇄소, 책방으로 운영되었다. 여기서 더 올라가면 여행자 동상이 나온다. 배낭을 짊어진 자유여행자로, 보행자 거리가 있고 호텔이 많아 이 지역에 동상을 세운 것 같다. 역사적인 호텔로는 그랜드 호텔(25번)이 있다.

르네상스양식과 바로크양식이 결합된 형태로 1905년 지어졌으며, 개장할 당시 이르쿠츠크 최고 호텔이었다. 그 후 은행, 학교, 서점 등이 들어왔다. 1931년에는 라디오 방송국이 들어왔고, 현재는 명품숍들이 들어와 있다. 호텔에서 한 블록을 더 가면 보행자 거리로 유명한 우리츠키(Uritsky) 거리가 나온다. 이 거리가 한때는 이르쿠츠크 최고의 비즈니스 거리였다.
여행자 동상
 여행자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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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한 때는 이 거리의 이름이 이르쿠츠크 최고의 부자 상인 페스테레프(N. S. Pesterev)의 이름을 따 페스테레프스카야로 불리기도 했다. 1879년 대화재 후 25년간 석조를 활용한 목조주택이 다시 들어서 이르쿠츠크 건축박물관이 되었다. 이들 건물 중 16개가 국가지정 문화재로 보호받고 있다. 1920년부터 거리 이름이 우리츠키로 바뀌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곳은 이르쿠츠크의 아르바트 거리라 하는데, 아침이라 그런지 한가한 편이었다.

아르바트 거리 이야기
아르바트 거리
 아르바트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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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바트 거리는 그 도시의 보행자 전용도로다. 그러므로 여유 있게 거리 주변의 건물과 사람들을 관찰할 수 있다. 폭 16m 길이 420m 도로로, 양쪽에 19세기말 20세기 초 석조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다. 이 도로는 마르크스대로와 줴르진스키(Dzerjinsky)대로를 연결한다. 현재 이들 건물에는 은행, 상점, 레스토랑, 카페, 기념품점들이 들어 있다. 그러나 건물이 오래되어 그렇게 번창한 것 같지는 않다.

이 거리에서 가장 유서 깊은 건물은 메레츠키(Meretsky) 상점으로도 불리는 로디오노프(Rodionov) 빌딩이다. 2층짜리 석조건물로 1887년에 지어졌다. 이곳에 1907년에 메레츠키 상점이 들어 1920년까지 기성복을 팔아 큰돈을 벌었다. 소비에트시대에는 이곳에 시베리아 최초의 백화점이 들어섰고, 제2차 세계대전 후 어린이 용품 전문점인 데츠키 미르(Detsky mir)가 들어왔다. 20세기 초 만들어진 이 건물의 스테인드글라스는 현재도 유명하다.
아르바트 거리
 아르바트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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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 거리를 걸으며 신비로운 체험을 했다. 엊그제 비가 와 웅덩이에 빗물이 고인 덕에, 이 거리의 반영을 사진으로 담을 수 있었다. 아르바트 거리는 상대적으로 영어와 독일어 등 외국어 표기가 많아 언어적인 부담이 덜한 편이었다. 그리고 그린라인 문화유산에 대한 안내판이 러시아어, 영어, 중국어로 나와 있어, 건물의 역사와 특징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유명 영화감독과 서커스 극장의 만남
러시아 영화감독 가이다이
 러시아 영화감독 가이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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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는 마르크스대로를 벗어나 노동자광장으로 간다. 그곳에는 러시아의 유명한 영화감독 가이다이(Leonid Gaidai: 1923-1993)의 동상이 있기 때문이다. 가이다이는 소비에트 시절부터 개혁개방 이후까지 러시아에서 가장 사랑받은 코미디 영화감독이었다. 모스크바 영화학교를 졸업하고, 1955년 조감독 겸 배우로 첫 작품 <랴나(Ляна)>를 만들었다. 1961년 만든 <정말 심각한(Совершенно серьёзно)>이라는 단편모음 영화가 성공하며 민중의 사랑을 받는 감독으로 부상했다.

이 영화에 세 명의 코믹한 캐릭터가 나오는데, 이들이 니쿨린(Yuri Nikulin), 비친(Georgy Vitsin), 모르구노프(Evgeny Morgunov)다. 이들은 그 후 가이다이 영화의 단골 출연자가 되었고, 이들의 공동작업은 1966년 <코카서스의 포로(Кавказская пленница)>까지 계속된다. 이 영화에서도 이들 세 사람은 겁쟁이, 바보, 꾼(Pro)으로 출연한다.
가이다이 감독과 <코카서스의 포로>에 나오는 세 인물
 가이다이 감독과 <코카서스의 포로>에 나오는 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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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광장에는 가이다이 감독과 <코카서스의 포로>에 나오는 세 인물의 동상이 자리 잡고 있다. 가이다이 감독은 이 영화를 연출하는 모습이다. 감독 옆에는 영화에 나오는 개 바르보스(Barbos)가 망치를 입에 물고 있다. 그리고 앞에는 세 캐릭터 트루스(Trus), 발베스(Balbes), 비발리(Byvaly)가 자신들의 역할을 연기하고 있다. 가이다이의 표정은 심각하고, 배우들의 연기는 진지하면서도 우스꽝스럽다.

이곳에 가이다이의 동상이 세워진 것은 그가 1930년 이르쿠츠크로 이사와 1949년까지 학생으로, 배우로 활동했기 때문이다. 그는 1941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1943년 큰 부상을 입기도 했다. 그는 1949년 모스크바 영화학교에 입학하며 이르쿠츠크를 떠났고, 모스크바에서 감독, 배우,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했다. 1961년부터 1975년 사이 만든 영화가 가장 인기 있다. 이때 만든 10개 작품 중 9개 작품이 러시아 영화의 고전으로 여겨진다.
가이다이 감독과 서커스 극장
 가이다이 감독과 서커스 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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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동상은 그의 탄생 90주년을 기념해 2012년 10월에 세워졌다. 가이다이는 실제 인물의 두 배 크기인 3.4m의 높이로, 배우들은 1.5배 크기인 2.5m 높이로 만들어졌다. 사람들은 이 동상과 하나 되어 사진을 찍는다. 그것은 이들 동상이 마치 영화의 한 세트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다니며 이처럼 친근하게 느껴지는 동상을 본 적이 없다. 마치 영화 세트처럼 동상을 만들어놓았기 때문이다.

노동자 광장 뒤에는 서커스 극장이 있다. 서커스 극장은 러시아의 도시에서 늘 보게 되는 문화시설이다. 그것은 서커스가 연극/영화, 오페라/발레와 함께 민중에게 즐거움을 주는 세 가지 예술장르이기 때문이다. 서커스 극장에서는 7월 28일(토)부터 서커스 쇼 <친구 사귀기>가 공연되는 것으로 나와 있다. 서커스 공연은 중간에 잠깐 쉬는 시간을 포함해 2시간 정도 진행된다고 한다.
이르쿠츠크 지방법원
 이르쿠츠크 지방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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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광장의 서쪽에는 이르쿠츠크 지방법원(23번)이 있다. 법원 건물은 19세기 상인 트라페즈니코프(Trapeznikov) 저택으로 처음 지어졌고, 1879년 화재로 불탔다. 1885년 재건되어 호텔로 사용되었고, 1926년부터 지방법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우리는 안으로 들어가 보려 했으나 출입을 제지당했다. 법원 주변에는 세 채의 웅장한 건물들이 더 있는데, 이것이 그린라인 20-22번 건물이다.

여기서도 전시관을 피해갈 수 없어

청소년 창작전당
 청소년 창작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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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번 건물이 청소년 창작전당(Palace of children's creative work)이다. 건물 이름에서부터 청소년교육을 중시하는 사회주의 국가의 정책을 읽을 수 있다. 직물산업으로 돈을 번 시베리아 최고 부자 브토로프(Vtorov)의 저택으로 1896년 지어졌다. 1917년 10월 혁명 후 최초의 시베리아 소비에트 회의가 이곳에서 열렸다. 혁명이 성공하고 나서 이 건물은 국유화되어 혁명박물관이 되었다. 1927년에는 지역소비자연맹이 들어왔고, 1937년부터 청소년 창작전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21번 건물은 파인베르크(Feinberg) 저택으로 현재 코필로프(Kopylov) 예술대학으로 사용되고 있다. 1901년 금광업자이자 자선사업가인 파인베르크의 저택으로 지어졌다. 파인베르크는 학교를 세우고 극장을 만드는 등 문화와 교육사업에 많은 투자와 지원을 했다. 이 건물도 환바이칼 철도 건설위원회, 여학교, 군사령부, 박물관, IT센터 등 공적인 용도로 사용되었다. 1989년부터는 시립도서관과 예술대학이 들어와 있다.

시립전시관의 청동조각
 시립전시관의 청동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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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번 건물은 1999년 문을 연 시립전시관으로, 러시아 인민화가이자 공훈화가인 로갈(V. S. Rogal: 1915-2005)의 작품과 수집품이 전시되어 있다. 3층으로 된 이 건물의 1층에는 그가 수집한 청동조각, 자수와 의류제품이 있다. 그리고 그가 그린 그림이 상설 전시되어 있다. 2층과 3층에서는 기획전시가 열리고 있다.

청동조각은 소형이지만 사실성과 역동성이 뛰어나다. 사실성은 노동자와 어머니 등 민중들의 모습에서 두드러진다. 역동성은 말을 타고 활을 쏘는 모습에서 두드러진다. 이들 작품에서 고전적인 요소와 러시아적인 요소가 나타난다. 자수제품도 실용성과 예술성을 겸비하고 있다. 의류는 전통적이다. 그가 그린 그림은 민중적인 동시에 사실적이다. 수용소에 끌려가 죽은 사람들의 사진이 그려진 담장 너머로, 평화로운 마을풍경이 공존하고 있다.

로갈의 그림
 로갈의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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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시관 아니면 내가 어떻게 로갈을 알 수 있을까? 그러나 이곳에는 그의 초상화와 흉상, 그를 기리는 석고조각이 진열되어 있다. 또 그가 사용하던 의자와 지팡이 그리고 모자도 있다. 이를 통해 나는 로갈이라는 사람을 조금은 알 수 있었다. 그림을 남기고 수집품을 이곳에 기증함으로써, 이르쿠츠크 사람들은 그를 기억하고 그의 전시관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태그:#마르크스대로, #아르바트 거리, #영화감독 가이다이, #<코카서스의 포로>, #시립전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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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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