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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헌책방살림 마흔 해

 

 헌책방 〈정은서점〉 아저씨는 1969년부터 당신 일터를 꾸렸습니다. 저는 이곳을 당신이 스물다섯 해째 헌책방 일을 하고 있을 무렵 처음 찾아갔습니다. 그무렵 제 나이는 스물로 접어들려고 했고, 이때부터 꾸준하게 마실을 하는데, 어느새 열다섯 해가 훌쩍 지나갔습니다. 그러고 보니 헌책방 〈정은서점〉은 처음 가게 문을 연 지 마흔 해가 되는 셈입니다.

 

 

 마흔 해 헌책방 일꾼 삶이라. 여느 회사였으면 벌써 정년퇴직을 했을 테며, 아파트지기나 건물지기 아니면 일꾼으로 받아 주지 않을 나이가 되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정은서점〉 아저씨는 헌책방 일손을 붙잡고 있기 때문에 오늘도 어제도 '현역'이고, 내일도 현역입니다. 다른 할배는 인사치레로 '사장님' 소리를 듣지만, 〈정은서점〉 아저씨는 아직까지 마땅히 '사장님' 소리를 듣습니다. 한길을 꿋꿋하게 걷는 이한테만 붙일 수 있는 '장이'라는 이름을 들을 자리까지 온 셈이기도 합니다.

 

 "(아이는)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나아. 재롱 떠는 것을 보면 …… 우리는 손주가 네 살인데, 집에서 가까우니까 살다시피 해. 친가와 외가가 가까우니까."

 

 '헌책장이'인 〈정은서점〉 아저씨는 헌책방 하나를 조용히 꾸리면서 혼인을 하고 아이를 낳아 가르쳤습니다. 날마다 도시락을 쌌고, 막걸리 한 병을 마시며 하루일을 접곤 했습니다. 더도 아니요 덜도 아닌 도시락차림에 막걸리 한 병. 제가 이곳을 드나든 열대여섯 해를 돌이켜보건대, 〈정은〉 아저씨 책살림은 더도 아니요 덜도 아니었습니다. 꼭 그만큼입니다. 당신 힘자라는 데까지 힘쓸 뿐, 더 많이 거두어들이려 하지 않았고, 부러 덜 받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한결같이 제자리 지키기입니다. 꾸준하게 외길 걷기입니다. 여느 사람들은 숱하게 오르락내리락을 치면서 갈팡질팡이라 한다면, 〈정은〉 아저씨는 다부지게 붙잡은 한길을 다른 이 눈에 더 띄게도 덜 띄게도 아닌 꼭 그만큼을 꿋꿋이 지키면서 걸어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걸음새였기에, 미아리에 있다가 신촌 연세대 건너편으로 옮겨와 뿌리를 내릴 수 있었으며, 예나 이제나 '그곳에 가면 헌책방이 있어' 하는 입소문과 소리소문으로 책살림을 꾸릴 수 있었으리라 봅니다.

 

 "이 헌책 팔아서, 두 사람이 먹고살았지, 아이 낳아 키우고 학교 보냈지, 그리고 집 있지, 가게 월세 내지, 그리고 날마다 막걸리 한 병씩 마시지, 그럼 됐지. 뭘 더 바라."

 

 

 헌책방에도 여러 갈래가 있어, 어느 헌책방은 '버려지는 책'을 수만 수십만 권 왕창 사들여 차떼기처럼 도매로 넘기면서 살림을 꾸리기도 합니다. 일꾼을 여럿 두고 인터넷방을 크게 차려 날마다 수백 수천 권씩 팔기도 합니다. 널찍한 매장에 어마어마한 책꽂이를 갖추어 놓아, 여러 시간 둘러보아도 다 둘러볼 수 없도록 책살림 꾸리는 곳이 있습니다. 이와 함께, 동네 한켠에 조용하게 뿌리를 내리며 더도 덜도 아니게 살림을 꾸리는 곳이 있습니다.

 

 〈정은서점〉은 헌책방 가운데 작은 곳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게 큰 곳이라고 하기도 어렵습니다. 꼭 알맞춤하다고 할까요. 두어 시간쯤 후딱 흘러도 '어, 언제 시간이 이렇게 흘렀지?' 하는 생각이 드는 곳입니다. 마음 잡고 찾아오면 예닐곱 시간이라도 넉넉히 책을 살필 수 있는 곳이고, 두어 시간 또는 한두 시간 책바다에 빠져 있으면 '어느새 시간이 많이 흘렀구나' 하고 깨달으면서 주섬주섬 고른 책 몇 권을 셈하고 나오는 곳입니다.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정은서점〉 마실을 할 때면, 손바닥책부터 큼직한 책까지, 퍽 묵은 책부터 갓 나온 책까지, 나라 안팎 책을 골고루 둘러보고 만나고 쥐어들게 됩니다. '헌책방 책시렁 나눔'이 낯선 분한테는 어느 헌책방에서든 책을 찾기 어려울 텐데, 〈정은서점〉 '책시렁 나눔'은 얼핏 보기에 성기다 할는지 몰라도, 두고두고 시간을 두며 책을 돌아보노라면, 이만큼 '책시렁 나눔'을 알맞고 알차게 해 놓은 곳이 드물다고 느끼곤 합니다. 다만, 느긋하게 책을 살피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지만 따로 걸상이 마련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걱정없이 하루 내내 책을 살필 수 있으나, 그렇게 책을 살피자면 다리가 좀 아프겠지요.

 

 다른 헌책방도 '걸상 없기'는 비슷한데, 여러 시간을 두고 책을 골라보고 살피는 일도 좋지만, 이보다는 꼭 알맞게끔만 둘러볼 때가 한결 나으며, 좀더 자주 찾아와 그때그때 꾸준하고 바지런히 책하고 사귈 때가 더욱 즐겁지 않으랴 싶습니다. 헌책방 〈정은서점〉 참맛과 참멋을 살갗 깊숙히 느껴 보았다면, 이곳이 오래도록 조용하면서 알뜰히 이어온 흐름을 내 마음과 몸에 맞추면서 책길과 사람길과 생각길을 시나브로 열어젖힐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2) 헌책방 나들이를 하면서 만나는 책

 

 오늘은 혼자 서울마실을 하며 볼일을 봅니다. 그러고 나서 집으로 돌아가기 앞서 살짝 〈정은서점〉에 들릅니다. 집에서 홀로 아기를 볼 옆지기가 걱정스럽지만, 옆지기는 언제나 '이제 예전처럼 보고 싶은 책을 못 봐서 어떡해요?' 하는 말에다가 '봐야 할 책이라면 보고 오셔요.' 하는 말을 들려줍니다. 헌책방 헌책은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음을 알고 있으니까, 헌책방 헌책은 부지런히 다리품을 팔며 찾아다니는 사람 앞에만 모습을 드러냄을 알고 있으니까, 옆지기 홀로 힘들면서도 가끔이라도 혼자 책방마실을 하면서 틈틈이 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서 책방마실을 할 때 발걸음이 가벼울 리 없는데, 그래도 집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찬 채로 책방마실을 살짝살짝 하면서 눈길은 책시렁과 시계를 갈마듭니다. 얼른 가야 하지 않을까, 몇 분 더 둘러보아도 될까 …….

 

 《왈터 닉/유수일,전안젤로 옮김-아씨시의 프란치스꼬》(분도출판사,1981)라는 책이 맨 먼저 눈에 꽂힙니다. 글 반 사진 반으로 엮은 이야기책으로, 거룩한 사람 프란치스꼬가 어떤 생각과 매무새로 어떻게 당신 삶을 꾸렸는가를 들려주고 보여줍니다. 그 옛날에 사진은 없었습니다만, 그 옛날 일을 헤아리며 그린 그림에다가, 오늘날 사람들이 아씨시를 돌아보며 '프란치스꼬가 다닌 곳은 이러저러하다'면서 담아낸 사진으로 엮은 책입니다.

 

.. 가난이 그(프란치스꼬)의 삶에 있어 하나의 기본 이념이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프란치스꼬에게 절대로 접근해 나갈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마치 애인처럼 가난을 포옹하고는 자기 품에다 힘차게 부둥켜안았다. 하느님과 자기 자신 사이에 다른 어떤 것도 끼어들어 와서는 안 되는 것이다. 가난-그리스도의 무일푼 생활의 약어인-은 일반 가난한 대중을 누르는 것만큼 그를 누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자유의사로 가난한 사람이 되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비할 수 없는 내적 부요를 얻었다. 프란치스꼬는 '거룩한 가난'에 대해 말했다. 가난을 보는 이는 누구나 그리스도를 보기 때문이다. 소유물을 원하는 사람이, 자기 것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물들을 더욱더 움켜쥐는 일만을 생각하지만, 결코 충분히 얻지 못하고 늘 새로운 욕망들의 항구에 정박하는 반면, 프란치스꼬는 그 정반대의 것을 했다. 자신의 모든 소유물을 제거해 버리고 쓰레기처럼 창문 밖으로 내동댕이쳐 더이상 아무것도 가지려 하지 않았다 ..  (21쪽)

 

 서양 종교에서 프란치스꼬는 '거룩한 사람'으로 섬기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이이를 어느 갈래에서 섬기는지 궁금해집니다. 천주교에서만 섬길는지, 개신교에서 함께 섬길는지, 성공회에서 같이 섬길는지, 숱한 갈래가 가지를 치는 침례교회나 제칠일안식일교회는 어떻게 여기는지 궁금합니다. 모시기로는 모두 하느님과 예수님이고, 다 함께 거룩한 책(성경)을 읽는데, 저마다 '거룩한 사람'을 다 다르게 받아들이며 생각하는지, 거룩하게 살아간 사람이라면, 숱하게 가지를 쳐 조금씩 다르게 믿음을 잇는다 하여도 고이 받드는지 궁금합니다.

 

 

 《김수일,이도한-저어새》(도요새,2001)라는 책 하나 봅니다. 환경운동연합에서 책 만드는 일에 손을 뻗치면서 낸 출판사가 '도요새'로, 이곳에서는 생태환경책을 부지런히 펴내고 있습니다. 조금 아쉽다면, 다른 곳도 아닌 환경운동연합 출판사인 만큼, 더 잘할 수 있는 몫이 있는데 그리 잘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어려운 살림이면서도 힘써 생태환경책을 내는 출판사에서 못 낼 만한 책을 좀더 슬기롭게 가려내어 내주는 틀거리가 아닌, 여느 생태환경책 출판사에서 내도 되는 책을 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책들에 붙인 값이 '싸지' 않습니다.

 

 책을 값싸게만 만들어야 하지 않으나, '생태환경' 시민모임에서 출판사를 열었고 '생태환경'을 다루는 책이라 할 때에는, 종이 자원을 덜 쓰는 책이어야 하며 좀더 가볍고 작은 책이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러면서도 읽기에 좋고 값도 싸 한결 널리 읽힐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000년 5월에 맨 처음 낸 손바닥책 세 권은 꽤 괜찮았는데, 그 뒤로 낸 책들은 하나같이 '돈버는 일에 더 마음을 쓴 듯한' 느낌이 드는 책이 아닌가 싶습니다. '따님' 출판사에서 더 내지 못하는 《지구환경보고서》 같은 책도, 환경운동연합쯤 된다면 좀더 널리 꾸준히 읽을 만한 수수하며 맛깔스러운 엮음새로 내놓아 주어야 하지 않았나 싶어, 언제나 안쓰럽습니다.

 

 《저어새》는 2001년에 142쪽짜리로 나온 자그마한 판이긴 한데 책값이 12000원(그때 값으로)이었습니다. 그나마 판이 끊어졌기에 헌책방에서 이렇게 찾아내어 사듭니다.

 

.. 저어새 가족이 살아가는 모습을 사진으로 담는 일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새들에게 스트레스를 주거나 위협이 되지 않기 위해 특히 조심하는 노력과 고통이 따라야 했습니다 … 새들은 우리의 삶터이기도 한 자연환경의 중요한 지표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새들의 삶터이기도 한 자연을 또한 지켜가야 합니다 ..  (머리말/김수일)

 

 《김준민-夏潭集》(서울대 교육대학원 생물교육학과 동창회,1975)이라는 글모음을 봅니다. 서울대학교에서 생물학과 교수로 일한 분이 틈틈이 써낸 쪽글을 그러모은 글모음으로, 시중에는 팔지 않던 책입니다. 그러니까, 헌책방에서만 찾아보는 책입니다. 이런 책은 도서관에도 없습니다. 아니, 처음 만들 때부터 도서관에는 보내지 않았을 테고, 도서관지기 가운데 이런 책이 나왔음을 안 사람도 없었겠지요.

 

 서울대 도서관에는 이 책이 남아 있을까요? 국립중앙도서관에는 이 책이 있을까요? 서울대 교육대학원 도서관이 있다면, 그곳에는 이 책이 있을까요? 이 책이 처음 나왔을 무렵에는 아는 사람끼리 나누어 받아 갖고 있었을 텐데, 한 권 두 권 이삿짐꾸러미에 끼어 흘러나올 때 비로소 헌책방 책꽂이에 꽂히는 《하담집》입니다. 헌책방 나들이를 하는 동안 서너 해에 한 번쯤 마주치곤 하는데, 마주칠 때마다 살며시 쓰다듬고는 제자리에 다시 꽂아 놓곤 했지만, 오늘은 덥석 쥐어 함께 셈을 치릅니다.

 

.. 1968년의 기록을 보면 정원에 관상용으로 흔히 심는 밥태기나무는 잎기 피기 전에 진분홍의 밥풀 같은 꽃이 온 나뭇가지에 다닥다닥 붙어서 일시에 피는 작은 나무인데, 1968년 봄에는 꽃보다 잎이 먼저 피었다. 그래서 나는 금년의 기후가 예년과 다를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과연 그해에 전남 지방에서는 극심한 가뭄으로 진작에 큰 피해를 가져왔으며, 식수난까지 빚어냈다. 그런데 작년에도 밥태기나무의 관찰에서 잎이 꽃보다 먼저 피는 것을 보고 역시 기후에 이상이 있을 것이라고 점치고 있었다. 역시 지난해에 이상기후로 말미암아 통일벼의 수확에 큰 지장을 가져왔던 일은 우리의 기억에 생생하다. 이러한 花曆學적 사실에 관심을 기울이기는 동서양에서 다를 바가 없다. 우리 나라에서도 옛날부터 희미하게나마 화력학적 사상을 나타내는 속언이 전해 오고 있어 선조들의 화력학에 대한 관심을 엿볼 수 있다. 그 하나로 "도토리나무는 벌판을 내려다보면서 연다"라는 속언이 있는데, 이 말은 들판에 흉년이 들면 도토리나무에 열매가 많이 연다는 것이다. 이를 화력학적으로 표현하면 도토리꽃이 만발하면 그해는 흉년이 되고, 꽃이 시원치 않게 피면 풍년이 든다는 것이다 ..  (58쪽)

 

 《김원모 엮음-산악소사전》(한국산악회,1975) 또한 《하담집》처럼 비매품으로 나온 작은 책입니다. 앙증맞은 책을 두 손으로 펼쳐들면서 책장을 넘깁니다. 갱지를 쓴 책은 잘못 넘기면 부스러질 듯합니다. 그래도 서른 해 넘는 세월을 잘 버틴 끝에 이렇게 헌책방 책꽂이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산타기를 좋아하는 분이라면 이 작은 책을 좋아할까요. 우리 말글을 익히고 갈고닦는 데에 자료로 삼으려고 하는 분이라면 이 작은 책을 보며 눈이 번쩍 뜨일까요. 재미있는 책을 모으는 분들한테 입맛 당기는 녀석일까요.

 

.. 이 사전의 당초의 목적은 일제의 식민지적 질곡 밑에서 배태되어 그들의 일방적 영향 아래에서 성장한 우리의 알피니즘이 해방 이후 30년 간이란 일본과의 단절의 시대가 있었음에도 일본 식의 오류와 불합리를 완전히 청산하지 못하고 불행한 역사의 유물에 동화되어 '링봔데룽(Ringwanderung)'을 계속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에 하나의 방향감각을 정립하고자 하는 데 있었다 ..  (머리말)

 

 '해방된 지 한두 해 지난 삶이 아닌데, 아직까지 못 이루고 있는 우리 말로 산악인 낱말 바로잡기를, 우리 깜냥껏 이제부터라도 제대로 해 보자'는 뜻에서 엮었다는 《산악소사전》인데, 정작 이 작은 사전에 실린 낱말은 거의 모두 일본말이거나 서양말입니다. 머리말에서도 이런 자취를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렇게나마 엮은이 스스로 온갖 구석에서 식민지 찌꺼기를 뒤집어쓴 모습을 고치고 싶었기에, 모자라고 어설프나마 산악사전을 낼 꿈을 품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지앙지리/홍영분 옮김-붉은 스카프》(아침이슬,2005)라는 청소년문학이 보입니다. 살며시 집어들어 봅니다. 처음부터 차근차근 읽을까 하다가, 글쓴이가 따로 붙여놓은 뒷글을 먼저 읽습니다.

 

.. 1976년, 마오쩌둥의 죽음 뒤에야 온 국민은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문화혁명은 당 최고위층들 간의 권력투쟁의 산물이었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우리의 지도자는 중국을 자기 손아귀에 움켜쥐기 위해 그에 대한 우리들의 신뢰와 충성심을 이용했다. 한 개인이나 소수 몇 명이 법 위에 군림하면서, 얼마든지 그들 마음대로 온 나라를 통제할 수 있다는 점이 문화혁명을 통해 깨닫게 된 가장 두려운 교훈이다 … 자신의 미래에는 성공에 이르는 탄탄한 길만 놓여 있을 거라고 굳게 믿었던, 붉은 스카프를 목에 두른 어린 소녀였던 나, 이제 그로부터 삼십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지금은 나는 성인이 되었고, 미국으로 이주했다. 그러나 내가 무엇을 하든, 또 어디에 있든, 어릴 때의 기억들은 아직도 또렷이 되살아나 여전히 나를 사로잡는다. 그때의 일들을 끝없이 떠올리다 보면, 어린 소녀였던 나 자신, 그리고 아름다워야 할 어린 시절을 나처럼 송두리째 빼앗겨 버린 다른 이들을 위해 무언가를 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  (307∼308쪽)

 

 

 우리는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겨레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독재자 두 사람이 거꾸러졌어도. 그 뒤를 이은 독재자가 사람들한테 손가락질을 받고 물러나며 추징금 수천 억을 물도록 했어도. 어쩌면, 독재자는 거꾸러졌을는지 몰라도, 독재자한테 빌붙어 떡고물을 챙기던 쇠밥그릇 공무원은 그대로인지 모릅니다. 그리고, 쇠밥그릇 공무원이란 다름아닌 우리 스스로이거나 우리 어버이이거나 우리 이웃이거나 우리 동무인지 모릅니다.

 

 만화책 《윤준환-맹자야 맹자야》(예원문화사,1991)가 하나 보입니다. 비닐로 곱게 싸 놓았습니다. 다른 책은 이렇게 안 되어 있는데, 왜 이 만화만 이렇게 되어 있나 궁금했는데, 책값을 셈하며 여쭈어 보니 〈정은서점〉 따님이 일부러 이렇게 비닐옷을 입혀 보았다고 합니다. 이 만화책이 다치지 않도록 하고 싶어서.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맹자야 맹자야》를 헤아려 봅니다. 이 만화책은 지난날 그렇게 크게 사랑을 받은 작품은 아니지만, 우리한테 즐거움을 선사하던 '명랑만화' 가운데 하나입니다. 오늘날은 명랑만화가 하나도 없다 할 만한데, 왜 없을까를 곰곰이 따져 보면, 명랑만화 주인공이 될 만한 아이들이 없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지난날 명랑만화를 그리던 때에는 아이들이면 누구나 골목이나 고샅에서 놀았습니다. 이와 같은 명랑만화는 '아이들이 또래 동무나 이웃 어른하고 골목과 고샅 어디에서나 부대끼는 이야기'를 만화감으로 삼습니다. 그러니까, 오늘날처럼 아이와 아이끼리, 아이와 어른끼리 부대끼는 삶이 사라진 판에는 더는 명랑만화가 나올 수 없는 셈이 아닌가 싶어요.

 

 그러고 보면, '맑고 밝게만' 그리도록 해서 명랑만화라고 이야기하지만, 하나하나 살피면 생활만화입니다. 누구나 으레 그렇거니 저렇거니 꾸리는 여느 삶을, 수수한 삶을, 투박한 삶을, 언제 어디에서나 겪거나 치르는 삶을 담은 만화이거든요. 잘나면 잘난 대로 아옹다옹하고, 못나면 못난 대로 서로 툭탁툭탁 부딪히고 깨지고 넘어지다가도 어깨동무하고 손잡고 웃고 우는 삶을 고스란히 담아낸 만화입니다. 바로 생활만화입니다.

 

 

 (3) 내가 걷는 한길에서 마흔 돌, 쉰 돌이란

 

 《장혜명-나의 삼천리》(문학예술출판사,2005)라는 시모음 하나를 집습니다. 북녘에서 나온 시모음입니다. '6ㆍ15공동선언실천을 위한 민족작가대회 기념'으로 나왔다고 밝혀져 있습니다. 모르는 일이지만, 금강산 관광을 하면 그곳에서 기념품으로 팔던 책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줄거리는 그리 눈여겨볼 만하지 않다고 느끼는데, 앞으로 스무 해나 쉰 해쯤 더 묵는다면 그때에는 남다르게 느낄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처음으로 민속을 찍다(송석하 소장 민속학 선구자들의 사진자료집)》(국립민속박물관,2007)라는 사진책을 봅니다. 시디를 한 장 곁들인 사진책입니다. 나라에서 이런 소담스러운 자료를 펴내기도 하는구나 싶어 놀라운 한편, 진작부터 이런 자료를 나라돈으로 펴냈어야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우리 문화를 살피고 갈고닦고 갈무리하는 일이야말로, 소장학자가 쌈지돈 그러모아 할 일이 아니라, 나라에서 나라돈으로 할 일이라고 느낍니다. 고속도로 하나 덜 닦아도 되고, 아스팔트 깔기를 몇 킬로미터 못해도 됩니다. 이런 책 몇 권쯤 더 만들어야 나라살림이 넉넉해지고 아름다워집니다.

 

 그러니까, 2차선 아스팔트길을 1미터 안 닦으면 이런 책 하나 엮을 수 있습니다. 2차선 아스팔트길 1킬로미터 안 닦으면 이런 책을 1000권 엮을 수 있습니다. 아스팔트길 10킬로미터를 안 닦으면, 문화뿐 아니라 과학 교육 역사 사회 정치 …… 할 것 없이 갈래마다 천 가지 책을 훌륭히 엮어낼 수 있는 셈입니다. 시, 군, 구, 면, 동에서 보도블럭 까엎는 일을 안 하고 그 돈을 그 동네 문화와 역사 살피는 데에 쓰면, 우리네 문화와 역사는 몇 해 지나지 않아 차곡차곡 갈무리되어 누구나 손쉽게 찾아볼 수 있을 만큼 자료를 넉넉히 갖출 수 있습니다.

 

.. 사진을 소장하고 있던 송석하는 우리에게 단 한 번도 자신이 그 많은 사진들을 모두 직접 찍었다고 말한 바 없다. 송석하는 단지 자기가 직접 촬영한 사진 503장을 포함한 1716장의 사진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송석하는 자신이 보유하고 있던 그 많은 사진을 학술자료로 사용하기 위해 사진제목, 촬영일자, 촬영지역, 사진번호, 원판 등의 항목을 기재하도록 되어 있는 자신만의 사진정리 카드에 붙여서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였다 … 우리가 그동안 송석하 소장 사진들에 대해서 왜 그렇게 깊은 오해를 하게 되었는지 한 번쯤 그 이유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송석하 소장 사진 1761장 가운데 가장 많은 부분인 1097장의 사진은 일본인 민속학자 아키바 다카시와 아카마쓰 지조의 사진임을 알 수 있다 … 하지만 그들이 식민지 지배세력의 불순무도한 목적을 가지고 조선의 민속문화를 연구했거나 아니면 순수하게 인문학자의 입장에서 조선의 민속문화를 연구했는지 현재 정확히 판단할 수는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아키바 다카시와 아카마쓰 지조, 그리고 송석하 등은 조선의 민속문화를 처음으로 전문 민속학자의 입장에서 사진과 글로 기록하고 연구한 민속학의 선구자들이라는 점이다 .. (45, 60, 65쪽)

 

 사진책 《윤주영-장날》(현암사,2001)을 고릅니다. 집에 없지 않나 싶어 장만했는데, 집에 와서 책꽂이를 돌아보니 이 책이 덩그러니 꽂혀 있습니다. 아이구머니나. 진작에 장만해 놓고 있던 책을 잊고는 다시 사다니. 이 사진책 값은 만만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책 하나 사느라 다른 책 몇 권을 못 사고 말았는데.

 

 그러나, 윤주영 님 사진책 가운데 《장날》은 두 권을 가지고 있어도 괜찮다고 생각을 고쳐먹습니다. 비록, 시골 저잣거리 모습을 좀더 남다르게, 그러니까 '사진쟁이 윤주영다운 눈길만으로' 담아내지 못하기는 했지만, 또 너무 뻔하고 틀에 박힌 모습으로 저잣거리 모습을 담아냈다 할 테지만, 할아버지 사진쟁이인 윤주영 님이기 때문에 다른 사진쟁이가 담기 어려운 모습을 알뜰히 담을 수 있었다고 느낍니다. 이런 사진 매무새는 머리말에 잘 나와 있습니다.

 

.. 장터에서 만나는 많은 사람들 중에서 내가 가장 존경하는 분들은 바로 우리 나라의 할머니들이다. 이 할머니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자신이 농사지은 도라지나 곶감이나 잡곡 등을 들고 와서 파는 것이 아니다. 이미 너덧 명의 자식을 낳아 대학까지 졸업시켜서 그들이 보내 주는 돈만으로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 많다 ..  (머리글/윤주영)
 

 

 머리글 앞에는 추천글이 달려 있습니다. 대학교수님이 적은 추천글은 시골 장날을 '시골 장날' 그대로 바라보지 못합니다.

 

.. 이 사진첩은 장날 장터에서 볼 수 있는 우리들의 옛 삶의 정취를 담고 있다. 그 주인공들은 우리를 낳아 준 어머니, 우리의 과거를 살아왔던 할머니, 할아버지다. 장날이지만 그분들의 표정은 단지 시골의 일상이며 생활의 연장일 뿐이다 ..  (추천글/정승모)

 

 어쩌면, 사진책 《장날》은 '옛 정취가 더 사라져 버리기 앞서 얼른 담아낸'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윤주영 님이나 출판사에서는 이런 데에 눈길을 맞추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사진책 《장날》에 담긴 모습은 이 사진책이 나온 2001년뿐 아니라 2009년에도 볼 수 있습니다. 2020년에도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2030년이라고 크게 달라지리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 아직도 이 《장날》 모습을 볼 수 있을까요? 다름아닌 삶이기 때문이지요. 시골 저잣거리 할매이든 아지매이든, 당신들한테는 삶입니다. 재래시장은 구지레하게 여겨 얼른 치워 없애고 마트와 아파트를 들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공무원과 개발업자 힘이 훨씬 세기는 하여도, 도시나 시골이나 저잣거리 할매와 아지매는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함지박을 이고 지고 수레에 끌고 밀고 하면서 장사판을 벌입니다. 그예 삶이니까요.

 

 사진책 《장날》은 추억이 아닙니다. 정취도 아닙니다. 대학교수님 추천글을 살피면 "시골의 일상이며 생활의 연장일 뿐"이라고 덧달지만, 글시늉으로 가리키는 삶이 아니라, 예나 이제나 앞으로나 꾸준히 이어가는 삶입니다. 낮은자리에서 조용히 살림을 꾸리는 분들 이야기입니다. 가난하건 가난하지 않건 수수하게 살림을 다스리는 분들 어우러짐입니다. 만남이요 사귐입니다. 웃음이요 눈물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제가 찾아간 헌책방 〈정은서점〉 마흔 해 발자취란 '추억'도 '정취'도 아닌 삶입니다. '대단한 장인정신'이 아닌 삶입니다. 하루하루 삶이었고, 앞으로도 삶입니다.

 

 헌책방 〈정은서점〉 문간을 꽃으로 꾸미고, 책꽂이 벽에 '좋은 글월'을 쪽지에 적어 붙인 따님 손길도 삶입니다.

 

 그리고, 헌책방마실을 한다며, 이 마실을 한두 번으로 그치지 않은 제 발걸음도, 또 이 발걸음이 열 해 스무 해를 곧게 이으며 앞으로 제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서른 해나 마흔 해나 쉰 해까지 이어질 발걸음 또한 삶입니다. 책값을 셈하고 집으로 낑낑대며 돌아간 다음, 아기를 만나고 옆지기를 달래며 힘든 몸으로 기저귀를 빨고 아기와 늦도록 씨름을 하며 방구석 어질러진 채 곯아떨어질 모습 또한 그저 삶입니다.

 

 책에는 이와 같은 삶이 담깁니다. 글쓴이마다 다 달리 꾸린 삶이 담깁니다. 우리는 다 다른 삶을 읽어내며 내 나름대로 꾸릴 삶을 생각합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살아가다가 우리 스스로 또다른 책을 하나 내놓기도 하고, 이렇게 내놓은 책은 내 이웃들한테 또다른 맛과 멋으로 찾아들 삶자락 배인 이야기가 되기도 합니다.

 

 책과 책으로 만난다지만, 곰곰이 살피면 삶과 삶으로 만나는 셈이며, 이름과 얼굴을 모른다 할지라도 서로가 서로를 섬기는 삶으로 오늘 하루를 보내는 셈입니다.

 

 

 아무쪼록, 마흔 돌을 맞이한 헌책방 〈정은서점〉이 반세기라는 쉰 돌까지도 튼튼하고 즐겁게 맞이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정은〉 아저씨는 힘자라는 대로 이곳에서 큰 사장님으로 헌책 일에 보람을 느끼시면 좋겠고, 〈정은〉 따님 되는 분은 아버지한테서 헌책 일을 몸과 마음으로 물려받아 앞으로 새롭게 이곳을 책삶터로 알뜰살뜰 다독여 주시면 좋겠습니다.

 

 저한테는 힘들지 모르겠는데, 우리 아이는 어쩌면, 헌책방 〈정은서점〉 백 돌을 지켜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헌책방 백 돌이라. 아쉽지만, 저로서는 어느 헌책방 한 군데라도 백 돌을 맞이하는 그날까지는 살아 있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옛책방이 아닌 헌책방으로서 가장 오래된 곳이 예순 해쯤 되었는데, 예순 해쯤 된 곳을 물려받을 만한 분은 없다고 느끼거든요. 더구나 예순 해쯤 된 그곳이 백 돌을 맞이하자면 그때 제 나이는 여든 가까이 됩니다. 그러나 쉰 돌 맞이하는 헌책방을 물끄러미 지켜보면서, 그동안 그곳을 마실하면서 찍은 사진을 사진틀에 끼워 선물로 드릴 수 있다면, 저한테는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자 보람입니다. 나중에 백 돌이 될 때쯤에는, 우리 아이가 '지 아빠가 예전에 찍은 사진을 100장 종이에 뽑아 선물로 드리'면 그때로서는 가장 훌륭한 선물이 되지 않을까 꿈을 꾸어 봅니다. 그러고 보니, 헌책방 첫 일꾼 또한 백 돌까지는 지켜보지 못하고, 당신 아이한테든 누구한테든 물려주어야 비로소 백 돌을 맞이할 수 있네요. 책방 일꾼이든 책손이든 한 사람이 고이 지나가야 맞이하는 백 돌입니다.

 

 아무튼, 백 돌에 앞서, 〈정은서점〉 쉰 돌이 될 날을 손꼽아 기다립니다. 그때 우리 아이는 열 살이 되겠군요.

덧붙이는 글 | ― 서울 연세대 앞 〈정은서점〉 / 02) 323-3085
http://jbstor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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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정은서점, #헌책방, #책읽기, #책, #책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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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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