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혼술남녀> 이한빛 PD의 죽음 이후, 오랜 기간 '관행'을 이유로 묵인되어온 방송 스태프들의 노동 환경도 조금씩 변화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방송 스태프들은 주 100시간 이상의 노동을 하고 있습니다. 한 드라마 스태프는 이런 자신의 처지를 '염전 노예'에 비유했습니다.

누군가의 죽음으로 바뀌는 세상도 슬프지만, 누군가의 죽음에도 변하지 않는 세상은 더 슬픕니다. 오마이뉴스는 방송 스태프들의 더 나은 일터를 위해 이 기획을 준비했습니다. [편집자말]
 드라마 촬영 현장 사진. 수많은 스태프들이 최고의 장면을 만들기 위해 초 장시간 노동을 견뎌내고 있다. (위 사진은 해당 기사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습니다.)

드라마 촬영 현장 사진. 수많은 스태프들이 최고의 장면을 만들기 위해 초 장시간 노동을 견뎌내고 있다. (위 사진은 해당 기사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습니다.) ⓒ 이정민

 
"기자님, 저 좀 살려주세요."

지난 7월 어느 새벽. '발신자 표시 제한'으로 걸려온 전화벨 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세 번째 벨이 울리고서야 긴장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간신히 내뱉은 "여보세요?"라는 말에, 상대는 "제보할 것이 있다"면서 "살려달라"고 했다.

전화를 건 이는, 당시 인기리에 방송 중이던 드라마의 스태프였다. 그는 7월 초부터 전화를 건 그 날까지, 보름째 단 하루의 휴차도 없이, 집에 귀가하지 못한 채 촬영을 이어가고 있다고 했다. 지방 촬영이 많아 이동하는 버스에서 쪽잠을 자는 게 대부분이고, 찜질방에서 씻고 한두 시간 눈이라도 붙이고 나오면 다행이라고 했다. 식사 시간조차 따로 주지 않아 이동하는 차 안에서 도시락을 먹고 있다고. 보름 동안 식당에 앉아 밥 먹은 횟수가 손에 꼽을 정도라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 잔뜩 묻은 피곤함과 긴장감에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는 "지금 화장실에서 몰래 제보 전화를 걸고 있다. 이틀 뒤 휴차가 예정돼 있으니 그때 촬영일지와 추가 제보 내용을 전달하겠다"고 약속한 뒤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그러나, 그는 다시 전화를 걸어오지 않았다.

발신 번호 제한으로 걸려온 탓에 다시 연락할 수도 없었고, 익명의 제보만으로 기사를 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확인한 것은 해당 드라마의 촬영 현장이 열악하다는 것과, 그가 휴차가 예정됐다던 그 날에도 촬영이 있었다는 것. 하지만 자세한 촬영일지나 현장 상황을 들을 수는 없었다. 제보자를 수소문하고도 싶었지만, 혹시 그 과정에서 제보 사실이 알려지면 현장에서 그의 입장이 난처해질 수 있다는 말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로 며칠이 지난 8월 2일, SBS <서른이지만 열일곱입니다> 현장에서 일하던 서른 살 스태프 김아무개씨의 사망 소식이 들려왔다.
 
 SBS 드라마 <서른이지만 열일곱입니다> 스틸컷

SBS 드라마 <서른이지만 열일곱입니다> 스틸컷 ⓒ SBS

  
76시간과 64시간... 12시간 차이

드라마 스태프들의 비상식적인 노동 시간은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 주에 120시간 넘게 촬영하는 드라마도 수두룩했고, 30시간 연속 촬영도 흔하게 존재했다. 경력 20년이 넘은 한 스태프는 3~4년 전만 해도 한 달에 500시간 넘게 촬영하는 현장도 있었다고 했다. 고용노동부가 정한 과로 기준인 주 평균 60시간의 2배 수준이다.

이한빛 PD의 죽음과 상품권 페이, <화유기> 스태프 추락사고 등을 계기로 방송 스태프들의 열악한 노동 환경을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무엇보다 7월 1일 300인 이상 방송사의 노동시간이 주 최대 68시간으로 제한됐다. 이에 따라 각 방송사들은 '1일 15시간 초과 촬영 금지', '15시간 초과시 익일 휴식시간 보장' 등의 내부 지침을 정하고, 이를 위해 'B팀 조기 투입', '대본 조기 확보' 등의 방침을 마련했다.

하지만 이른 새벽, 화장실에 숨어 기자에게 "살려달라"고 말한 스태프는, 여전히 '초장시간 노동'과 '디졸브 촬영(밤샘 촬영 이후 몇 시간 휴식을 취한 뒤 다시 촬영을 재개하는 것)'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최소한의 휴식 시간과 취침 시간조차 보장받지 못한 이들이, 지친 몸을 이끌고 기록적인 무더위 속 노동에 내몰리고 있다고 했다.

스태프 김아무개씨의 죽음이 알려진 뒤, 바로 과로사와 무더위로 인한 온열사가 의심된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공개된 그의 사망 직전 노동 시간은 7월 25일부터 29일까지, 5일간 약 76시간. 고용노동부 과로 기준 60시간은 물론, 개정된 노동법이 300인 이상 규모 방송사에 허락한 주 최대 노동시간 68시간도 넘는 시간이었다. 게다가 당시는, 40도를 넘나드는, 살인적인 무더위가 이어지고 있던 때였다.

SBS는 즉각 휴식시간을 감안해야 한다며 "64시간 05분"이 노동시간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그리고 곧 그의 부검 결과가 나왔다. 사인은 '내인성 뇌출혈'. 곧 이어 과로사와 무더위로 인한 온열사를 의심하던 언론들은 일제히 "과로사 사실 무근"을 제목으로 기사를 쏟아냈다.


서른 살 젊은 스태프의 죽음과, 그의 노동 환경은 정말 무관한 것일까?
 
 드라마 촬영 현장 사진. 수많은 스태프들이 최고의 장면을 만들기 위해 초 장시간 노동을 견뎌내고 있다. (위 사진은 해당 기사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습니다.)

드라마 촬영 현장 사진. 수많은 스태프들이 최고의 장면을 만들기 위해 초 장시간 노동을 견뎌내고 있다. (위 사진은 해당 기사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습니다.) ⓒ 이정민

 
쏟아지는 익명 제보... 하지만 딱 거기까지

'주 68시간 이상 초과 노동 금지'가 실시된 7월 1일 이후,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소장 탁종열, 아래 한빛센터)와 <오마이뉴스>에 제보된 '하루 20시간, 주 70시간 이상 노동' 사례만 해도 tvN <아는 와이프> <나인룸>, OCN <라이프 온 마스> <보이스2> <플레이어>, SBS <서른이지만 열일곱입니다> <그녀로 말할 것 같으면>, KBS <러블리 호러블리>, MBC <숨바꼭질>, 채널A <열두밤>, MBN <마성의 기쁨> <마녀의 사랑>, 옥수수 <나는 길에서 연예인을 주웠다> 등이다. 이 중에는 연속 35시간 촬영, 주 120시간 이상 촬영했다는 제보도 있었다.

인간의 한계를 테스트하는 듯한 초 장시간 노동에 <아는 와이프>의 스태프는 "염전 노예보다 못하다"면서 "일이 좋아 시작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코피와 피로, 잃어가는 건강, 멀어지는 가족들 뿐"이라는 편지를 한빛센터에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여기까지였다. 스태프들은 이 이상의 이야기를 꺼렸다. 계약서 한 장 쓰지 않고 일하는 비정규직, 프리랜서 신분이 대다수라, 혹시라도 자신의 신분이 노출될 경우 일자리를 잃을 수도 있다는 공포 때문이었다.

실제로 희망연대 방송 스태프 노조나 한빛센터가 스태프들의 제보를 바탕으로 시정 공문을 보내는 등의 조치를 취하자, 현장에서 제보 스태프를 색출하려는 움직임이 포착되기도 했다. 현장에서 노골적으로 "누가 제보했느냐"고 소리치는 감독도 있다고. 심지어 현재 방송 중인 한 드라마의 스태프가 초과 노동에 대해 노동부에 고발한 일이 있었는데, 프리랜서 신분인 탓에, 근로기준법을 적용받을 수 없었다. 결국 '문제 없다'는 결과가 나오자, 해당 PD가 "앞으로 스케줄이 더 빡세질 것"이라고 스태프들을 압박했다는 제보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스태프들에게 무턱대고 제보를 부탁할 수도 없었다.
 
노동인권 있는 드라마 현장 촉구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탁종렬 소장이 26일 오후 tvN 새 토일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제작발표회가 열리는 서울 논현동의 한 웨딩홀 1층에서 '노동인권이 있는 드라마 현장'을 촉구하는 드라마 세이프(Drama Safe)  1인시위를 하고 있다.

▲ 노동인권 있는 드라마 현장 촉구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탁종렬 소장이 26일 오후 tvN 새 토일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제작발표회가 열리는 서울 논현동의 한 웨딩홀 1층에서 '노동인권이 있는 드라마 현장'을 촉구하는 드라마 세이프(Drama Safe) 1인시위를 하고 있다. ⓒ 이정민


그래서, 제가 직접 해보았습니다

그동안 취재를 위해 만난 여러 제작사/방송사 관계자들은 종종 "'하루 20시간 촬영'이라고 하면 심각해 보이지만, 드라마 현장은 대기 시간이 많아서 돌아가며 쉬기도 하고, 자기도 하고 그런다. 체력 부담이 생각만큼 크지 않다"는 말을 했다. 이는 방송 스태프들의 노동 환경 개선을 위해 여러 제작사/방송사와 면담한 탁종열 한빛센터 소장도 자주 듣는 이야기라고 했다.

하지만 제보 전화를 걸어 온 스태프는 "누구 하나 죽어 나가도 이상하지 않은 환경"이라면서 "제발 우리 좀 살려달라"고 했고, <아는 와이프>의 스태프는 자신의 처지를 '염전 노예'에 비유했다. 
"생각만큼 체력 부담이 크지 않다"는 제작사의 설명과 "살려달라"는 스태프의 전화. 이 간극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사망한 <서른이지만> 스태프의 사망 전 5일간 노동 시간에 대해서도 노조와 방송사/제작사는 각각 76시간, 64시간이라는 각기 다른 노동 시간을 주장했다. 노조가 주장하는 76시간과 방송사가 주장하는 64시간의 차이는 또 어디에서 생긴 것일까?

이 모든 궁금증에 답을 얻기 위해, 현재 방송 중인 한 드라마의 현장 막내가 되기로 했다. 체험 기간은 단 3일. 방송 스태프들의 고충을 이해하기에는 터무니없이 짧은 기간이다. 하지만 외부인의 시각으로 그들의 일터를 들여다보고, 며칠이나마 그들과 같은 노동 시간을 체험하며 초 장시간 노동을 몸으로 느껴보고 싶었다. 절벽까지 내몰려야 겨우 용기를 내는 스태프들을 마냥 기다리며, 제작사와 스태프 간의 입장 차이를 그저 전달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힘들게 들어간 촬영장. 다행인지 불행인지, 무더위도 한풀 꺾였고, 아시안게임 중계로 인한 결방이 예정돼 촬영 스케줄에 여유가 생긴 기간이었다. 스태프들은 "이 정도만 되도 살겠다"고 입을 모았지만, 내 목구멍에는 "살려달라"는 말이 절로 맺혔다. 추상적으로만 들리던 '방송갑질 119' 카톡창의 성토들이, 그제야 피부로 느껴졌다.  
 
(2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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