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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는가?

흔히 으리으리한 집을 보면 넓은 정원이 있는데, 이 정원은 휴식을 비롯한 여러 쓰임새로 쓰이는 공간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단순하게 보면) 국왕의 집이라 할 수 있는 궁궐에도 이러한 원(苑)이 있는데, 흔히 궁궐의 뒷편(북쪽)에 위치해서 후원(後苑)이라 한다. 또한 이곳은 거의 왕실의 전용 공간이기 때문에 누구나 함부로 나가고 들어올 수 없는 곳이다. 그래서 금원(禁苑)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현재 후원이 남아 있는, 또는 후원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궁궐은 창덕궁(昌德宮)과 창경궁(昌慶宮)을 합친 동궐(東闕)의 후원과 경복궁(景福宮)의 후원뿐이다. 그나마 경복궁의 후원은 일부에서만 그 자취를 확인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래서 후원으로서 과거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지니고 있는 곳은 동궐의 후원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동궐의 후원을 따로 후원이라고 부른다.

사람들은 서울이라는 삭막한 도시에서 이와 같은 아름다운 후원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 서울이 이렇게 삭막하게 된 것이 불과 수십 년에 지나지 않음에도 우리는 서울이 아름다운 곳이라는 사실을 그 수십 년 사이에 잃어버린 것이니 어찌보면 참 안타까운 일이라 하겠다.

아무튼 후원은 흔히 한국 정원건축의 백미라는 찬사를 들으며 국내외인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특히 외국의 수많은 지도층들이 이 후원의 아름다움에 깊이 매료되었다. 중국과 일본과는 또 다른 우리의 후원만이 주는 아름다움 때문일 것이다. 창덕궁과 후원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도 우연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과연 우리 자신은 이러한 아름다움에 걸맞게 후원을 대하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이제는 우리의 유산을 넘어 인류가 지켜야 할 유산이 된지도 벌써 10여 년이다. 그런데 우리 자신은 정작 후원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을까?

몇 달 전 <무한도전>에서 궁 특집을 방영한 바 있다. 시청률로만 본다면 적어도 수백 만에서 1000만에 가까운 사람들이 이 특집을 보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 특집을 보면서 창덕궁과 후원이 아닌, 비원(秘苑)이라는 이름이 더 익숙하게 여겨졌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라고 푸념하고 넘어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푸념만 하고 있다면 아무 것도 고치지 못할 것이다. 이미 비원은 잘못된 이름이다, 창덕궁과 창경궁, 그리고 그 동궐의 후원이라 불러주는 것이 정확하다는 이야기를 십수 년 전부터 듣고 보아왔던 우리건만 아직도 우리는 비원이라는 이름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물론 그 특집을 만들었던 제작진을 탓하는 것이 아니다. 그 특집 덕분에 우리의 궁궐이 많은 이들에게 더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었던 점에 대해 <무한도전> 멤버들과 제작진들, 관심을 가져준 시청자들에게 누구보다 고마움을 표한다. 그러나 그러한 고마움과 별개로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 해야 하지 않을까?

후원이 지니고 있는 상처는 단지 그 이름에만 그치고 있지는 않다. 지금 우리는 창덕궁에서 후원으로 향하는 길에 대해 전혀 이상함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과연 후원으로 향하는 길이 제대로 된 모습일까? 그리고 길이 왜 그렇게 넓은가? 덤프트럭이 지나갈 만큼 넉넉할 정도이다.

동궐과 그 후원을 담은 <동궐도>(東闕圖)라는 궁궐 그림이 있다. 그 그림을 보면 지금과 같은 그렇게 넓은 길을 찾을 수 없다. 도대체 이 길은 언제 난 것일까? 과거 군사정권 시절 난 것이라 한다. 후원으로 가는 길을 편하게 하려고 낸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후원의 아름다움을 떨어뜨리고 생태를 교란시킨 책임까지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원래 창덕궁과 창경궁은 별개의 궁궐이면서도 하나의 궁궐처럼 쓰였으며, 따라서 이를 가로막는 담장이 없었다. 물론 이를 아우르는 후원에 담장이 있을리는 없다. 그러나 현재 창덕궁과 창경궁 사이를 담장이 가로막고 있는데, 이것이 후원 또한 가로막고 있어 후원의 대부분이 창덕궁 영역에, 일부가 창경궁 영역에 소속되어 있다. 우리가 후원을 살펴볼 때는 이 점을 유의해서 살펴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 아픔과 상처가 있다 해서 후원이 주는 그 아름다움마저 변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눈으로 보는 아름다움만이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 정신 또한 말할 수 없는 깊은 아름다움을 안겨주는 곳이 후원이다.

후원은 물론 왕실 전용 휴식 공간으로서의 기능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단지 휴식 공간으로만 쓰이지 않았다. 선비들이 청운의 꿈을 펼치는 공간이 후원이었고, 국왕을 비롯한 위정자가 백성을 위해 펼친 농정(農政)에 관련된 여러 시설이 마련된 곳 또한 후원이었으며, 군신 간의 정치적 화합을 통해 바른 정치를 다짐했던 공간 또한 후원이었다.

후원은 이렇게 다양한 쓰임새가 있었는데, 그 속에는 백성과 국가를 위한 거대한 통치철학이 담겨 있었다. 그 아름다움은 제국주의 일본과 해방 이후 우리의 오해, 무지, 편견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남아 오늘의 우리에게 큰 가르침이 되고 있다. 후원의 초입에 자리한 주합루(宙合樓) 영역은 이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정조의 꿈과 이상이 서린 주합루-규장각 

주합루는 네모난 부용지(芙蓉池)의 북쪽에 있는데, 취병 사이의 어수문(魚水門)을 지나 높다란 계단을 따라 오르면 만나게 되는 2층의 건물이다. 주합루를 중심으로 한 부용지 일대를 한번 둘러보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다. 특히 부용지 남쪽에 자리하고 있는 부용정(芙蓉亭)은 그 백미이다. 이곳은 그 빼어난 아름다움으로 사극에서 단골로 보인다.

그러나 이곳 주합루 영역은 단순히 자연과 인공의 조화가 보여주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만으로 주목받는 곳은 아니다. 아마 이만큼 역사적 의미가 큰 공간도 그리 흔치는 않을 것이다.

어수문을 지나 만나게 되는 2층의 주합루 건물을 눈여겨보자. 이 건물의 2층에는 주합루라는 현판이 달려 있다. 그러나 이 현판은 엄밀하게 말하자면 2층만의 것이다. 2층의 누각일 경우 2층에는 '누', 1층에는 '각'이 들어가는 현판이 각각 달린다. 2층과 1층의 이름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건물의 1층의 이름은? 바로 규장각(奎章閣)이다. 그렇다. 정조(正祖)를 이야기하면서 반드시 거론되는 이름, 정조 때의 문예부흥과 개혁정치의 산실, 정조가 꿈꾸었던 민국(民國)이라는 이상의 산실, 바로 그 규장각의 본관이 이 곳이다.

규장각이 창설된 것은 숙종(肅宗) 때이다. 숙종은 종친의 업무를 관장하던 종부시(宗簿寺)에 별도의 건물을 세우고 여기에 역대 국왕의 어제, 어필을 보관하게 하였으며, '규장각' 현판을 친밀로 써서 건물에 걸게 했다. 이때의 규장각은 그야말로 왕립 도서관의 기능 정도만을 지니고 있었다. 정조는 즉위년(1776) 9월 25일 규장각을 창덕궁 금원(禁苑)의 북쪽에 세우고 관원을 두었다(<정조실록>권 2 정조 즉위년 9월 25일 계사).

이는 기존의 규장각을 이것을 자신의 왕권 강화와 안정을 위한 세력을 양성하는 공간이자 문예부흥과 개혁정치의 산실로 확대시켜 활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로써 규장각의 기능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커졌다(참고로 '주합루' 현판은 정조가 직접 썼으며, '규장각' 현판은 숙종의 어필을 가져와 단 것이다).

규장각에는 정조의 어진(御眞), 어제(御製), 어필(御筆) 등 정조와 관련된 것들이 봉안되었다. 아울러 서향각(書香閣)을 비롯하여 서고(書庫), 열고관(閱古觀), 개유와(皆有窩), 봉모당(奉謨堂) 등 규장각과 관련된 부속 시설들도 들어섰다.

규장각을 만든 정조를 우리는 흔히 세종에 버금가는 성군이라 하여 많은 관심과 호감을 보이고 있다. 실제로 그는 여러모로 세종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성군이자 성인임에 틀림없다. 장헌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아들이었던 정조는 할아버지였던 서민군주이자 성군이었던 영조(英祖)가 그의 아들인 장헌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는 최대의 참극을 눈물을 삼키며 지켜볼 수밖에 없었으며, '죄인의 아들'이라는 벗어나기 힘든 굴레와 숱한 어려움 속에서도 국왕의 자리에 올랐다.

그가 갖은 어려움 속에서도 국왕의 자리에 오르고 재위한 24년간 눈부신 치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타고난 착한 성품과 성실함, 검소함, 학문을 좋아하는 성품 덕분이라 하겠다. 그와 정치적인 대립관계에 있는 정순왕후 김씨조차 그를 성인이라 함에 주저하지 않은 것만 봐도 (<정조실록>부록 대왕대비전의 행록 참조) 이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규장각에 담긴 정조의 꿈과 이상, 오늘에 비로소 꽃을 피우다

물론 정조의 꿈과 이상은 정조의 승하와 함께 이루어지지 못했다. 재위 24년만의 그의 승하는 삼각산을 울릴 만큼 조선의 모든 신민과 산하를 슬프게 했다(<정조실록>권 54 정조 24년 기묘). 그렇게 그의 꿈과 이상은 아쉽게도 좌절되었고, 그러한 아쉬움 때문인지 그가 독살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설이 떠돌아 지금껏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의 기록들과 정황을 살펴본다면 정조는 병사한 것이 분명하다(특히 일부에서 정조의 독살설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암살과 비교하여 박정희 정권의 독재 정치를 정당화하려는 움직임마저 보이는 것은 매우 우려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이에 관해서는 유봉학,<한국문화와 역사의식>, 신구문화사, 2005, 308~309쪽 참조).

어쨌든 정조의 승하 이후 규장각의 기능은 약화되었고, 일제 강점기를 전후하여서는 엄청난 수난을 겪게 된다. 궁궐 전체가 수난을 당하는 마당에 주합루와 그 부속 건물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었다. 주합루는 이토 히로부미가 연회를 열기도 하는 등 연회장으로 바뀌어 버렸다. 불과 10여 년 전까지도 규장각이 아닌, 연회장, 연산군이 궁녀를 끼고 놀던 곳, 집현전 등으로 잘못 알려졌었다. 책 향기가 나야 할 서향각을 일본은 누에 치는 곳으로 바꾸어버렸다. 열고관, 개유와, 봉모당 등 부속 건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지금은 그저 언덕으로만 우리 눈에 보일 뿐이다. 여기에 소장되었던 엄청난 양의 도서를 비롯한 자료들 또한 말할 수 없는 수난을 겪었다. 해방 이후에 겪은 곡절 또한 이루 헤아릴 수 없다.

하지만 정조가 규장각을 세웠던 그 뜻과 정신, 그리고 정조가 규장각을 통해 펼치고자 했던 꿈과 이상은 결코 사그라들지 않고 오늘에까지 면면히 이어졌다. 수많은 곡절을 겪었던 수십 만 점에 달하는 도서 등의 자료 또한 여러 기관의 철저한 보존과 관리 속에 무서운 역량을 발휘하고 있다. 정조의 꿈과 이상이 바야흐로 오늘에 그 꽃을 피우고 있는 것이다.

♧ 참 고 문 헌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영인본 제 44책 및 제47책), 탐구당(보급), 1955~1958.
신병주, <하룻밤에 읽는 조선사>, 랜덤하우스 중앙, 2003.
유봉학, <한국문화와 역사의식>, 신구문화사, 2005.
이성무, <조선왕조사>2, 동방미디어, 1998.
이태진,「사화와 붕당정치」,<한국사특강>,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0.
이태진,「스위퍼였나? - 5개 연구과제로 보낸 40년」<세계 속의 한국사>(이태진교수정년기념논총 5), 태학사, 2009.
홍순민, <역사기행 서울궁궐>,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1994.
홍순민, <우리 궁궐 이야기>, 청년사, 1999.
홍순민, <창덕궁과 후원>,『한국사시민강좌』제23집, 일조각, 1998.

인터넷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 (『정조실록』부분 참조)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지난 수개월 전 다시 한번 창덕궁을 개별적으로 답사한 뒤 그 때의 느낌을 포함하여 규장각에 관해 나름대로 정리한 글입니다. 기존에 저의 블로그나 클럽에 올렸던 글들은 물론 규장각에 관한 여러 기본적인 문헌들을 다시 참고하여 나름대로 쓴 것입니다. 물론 규장각에 관해 할 이야기는 매우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대중들이 우리 궁궐이 지닌 매력을 쉽게 이해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지극히 간단한 몇몇 기본적인 문헌만을 활용하여 나름대로 쓴 글임을 양해바랍니다. 아쉽게도 주합루와 부용지 일대를 사진에 담지 못했습니다. 이 점도 양해바랍니다.



태그:#정조, #규장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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