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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24일 늦은 8시 서울 동자동 동성애자인권연대(이하 동인련)의 4평 남짓한 사무실에서는 작년 4월 회기동 옛 동인련 사무실에서 스스로 목을 매 자살했던 당시 만19살의 고 육우당(윤아무개씨의 호) 1주기 추모식과 역시 6년 전 동인련의 전신인 대학동성애자연합 사무실에서 자살했던 고 오세인씨의 6주기 추모식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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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 동인련 사무실에는 30여명의 동인련 회원들과 지인, 그리고 육우당의 자살을 사회적 타살로 규정하고 사회의 부당한 동성애자를 비롯한 성적소수자들에 대한 차별에 반대하며 연대했던 '한국기독청년연합회'(이하 한기연), 반전·반신자유주의 단체인 '다함께' 등 함께 연대했던 인권사회단체의 활동가와 회원들이 모여 고인을 추모하고 기리는 행사를 가졌다.

이 날 추모식에는 고인이 남겼던 일기의 내용이 공개되었다. 그가 19년의 짧은 삶을 살면서 기록했던 그 기록들에는 사회의 억압과 편견에 힘들어하는, 하지만 희망을 이야기하고 끝까지 그 억압에 맞서 싸우고자 했던 고인의 생각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사랑했던 사람들에 대한 기억, 지인들과의 인연, 동성애자인권운동에 함께 하며 만난 동료들에 대한 애정…. 그 기록 하나 하나에 추모식에 참여했던 많은 동지들과 지인들은 다시 한 번 고인을 생각하게 했다.

동성애자인권연대의 젊은 활동가로, 또 시조시인을 꿈꾸던 문학청년으로 수많은 꿈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졌던, 하지만 결국 19년의 짧은 삶을 스스로 마감했던 고 육우당은 자살하기 전 남긴 6장의 유서에서 동성애자에 대한 사회의 부당한 억압과 편견에 항의했고 특히 청소년보호위원회(이하 청보위)가 동성애를 청소년 유해 대상으로 지정한 현실에 분노했다.

또한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이하 한기총)를 비롯한 보수개신교단체들이 동성애를 '소돔과 고모라'에 비유하며 죄악시하고 청보위가 청소년 유해 조항에서 동성애 조항을 삭제하려 하자 이에 극렬히 반대하는 모습에 육우당 자신이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서 괴로워했다.

그렇게 황망히 떠난 육우당의 빈 자리에서, 동인련의 활동가들은 한사람의 동성애자의 죽음, 그것도 사랑하는 동지며 동생이었던 이의 죽음에 슬퍼하기만 하고 있을 수 없었다.

육우당은 유서에서 자신이 믿는 하느님이 동인련에 축복을 내려줄 거라며 자신은 비록 먼저 가지만 남아있는 동인련의 활동가들에게 동성애자의 억압과 차별의 현실에서 해방되기 위해 끝까지 싸워달라는 주문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인련 활동가들은 육우당의 죽음이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열렸던 113주년 노동절 행사에 "한 동성애자의 죽음을 추모한다. 동성애자 차별 없는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라고 쓰여진 검은색 만장을 들고 참여해 이 땅의 노동 형제, 자매들과 모든 민중에게 사회적 차별에 신음하는 동성애자의 현실을 호소하고 연대를 요청했다.

그리고 이 호소와 연대의 외침은 노동절 행사가 끝나고 열린 육우당 추모의 밤 행사에서 작지만 분명한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동성애자를 비난하며 죄악시했던 한기총은 그 추모의 장에 나타나지 않았지만 젊고 진보적인 목소리를 견지하고 육우당의 죽음에 같은 크리스천으로 책임감을 느끼며 연대해왔던 한기연 지도부와 회원들이 참여함은 물론 보건의료단체연합, 민주노동당, 사회당, 국제민주연대, 국제엠네스티 한국지부, 인권운동사랑방, 다산인권센터, 안산인권노동센터, 한국이주노동자인권센터 등 노동인권사회단체와 진보정당의 수많은 활동가와 회원들, 그리고 언론과 인터넷상의 보도를 통해 알음알음 참여했던 시민들을 보며 육우당의 죽음이 그저 또 한 명의 희생자의 작은 가십거리로 끝나지 않고 동성애자 해방을 위한 연대의 시발점이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이후로도 동인련을 비롯한 남아있는 모든 이들은 동성애자에 대한 차별과 억압을 조장했던 한기총 앞에서의 항의집회와 추모예배를 비롯, 고인이 죽기 전까지 그 삭제를 위해 노력했던 청보위의 청소년 유해 조항에서의 동성애 조항 삭제를 위한 투쟁 등의 노력들을 해왔고 그 결실로 지난 4월 20일 드디어 국무회의에서 청보위의 청소년 유해 조항에서의 동성애 조항 삭제를 이루어 냈다.

동인련의 남아있는 이들은 이야기한다. 청보위의 동성애 조항 삭제를 얻어내 이제야 작지만 큰 짐 하나를 덜어냈다고… 육우당이 잠들어 있는 작은 납골당을 찾아갔을 때 이제 조금은 그를 볼 낯이 생겼다고….

19살 젊은 동성애자 육우당….

그는 19살이라는 나이에 수많은 이들의 가슴에 그의 이름 석 자를 깊이 새기고 떠났다. 비록 남아있는 이들에게 씻을 수 없는 아픔과 아쉬움을 남기고 떠난 그이지만, 그의 죽음은 남아있는 우리 모두에게, 그리고 동성애자를 억압하는 이 사회에게, 아니 동성애자를 비롯한 사회적 소수자와 약자를 억압하는 이 사회와 모든 구성원에게 "동성애자 차별 없는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 아니 "동성애자 해방 없는 다른 세계는 불가능하다"라는 외침의 메아리를 오래오래 남기고 떠나갔다.

이는 단순한 동성애자의 문제만이 아닌 사회의 변혁을 바라고 차별과 억압이 없는 세상을 꿈꾸는 모든 사회적 소수자와 억압받는 민중 전체가 새겨야 할 메아리일 것이다.

1970년 11월 동대문평화시장에서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는 외침과 함께 스스로 몸에 불을 붙여 산화한 고 전태일 열사. 그가 1970년에 죽음으로 외쳤던 것은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신음하는 모든 노동자의 피맺힌 외침이었다. 그리고 34년이 지난 오늘 전태일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얻고자 했던 이 땅의 노동해방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노동해방을 위해 수많은 노동자와 민중은 끊임없이 투쟁하고 그 희망을 잃지 않고 있다. 그것이 전태일과 수많은 노동 열사들이 우리에게 남긴 유산이었다.

2003년 4월 아무도 없는 빈 사무실에서 스스로 목을 매어 자살했던 고 육우당의 외침…. 동성애자 해방과 억압받는 민중의 해방을 바랐던 육우당의 외침은 전태일의 그 것보다 훨씬 더 더디게 진행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전태일의 그 것과 마찬가지로 절대 꺼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육우당의 외침을 들었던 우리 남아있는 모든 이들은 그의 메아리를 이어 나갈 것이다. 동성애자와 모든 억압받는 민중의 진정한 해방을 위해 전태일의 외침과 같이 우리는 육우당의 외침을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그 해방의 날까지 끝까지 일어나 싸울 것이다.

"오랜 세월 박해받아온 우리들,
이제는 희망을 찾아 무지개를 휘날리며 앞으로 나아간다.
우리는 성적소수자. 제우스의 번개로 내 반쪽 찾아다니는 아름다운 방랑자.

-2003. 4. 9. 육우당

(육우당이 남긴 시조중에서)


다시 한 번 삼가 고 육우당의 명복을 빌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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