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마지막으로 준 사료를 나루가 먹고 있다.
▲ 사료 먹는 고양이 마지막으로 준 사료를 나루가 먹고 있다.
ⓒ 강은경

관련사진보기


"마지막이다. 많이 먹어. 이제 야생으로 돌아가. 네 힘으로 너답게 살아. 네 본래 모습으로…." 

알아듣겠거니 하며 조근조근 나루에게 다짐을 놓았다. 나루가 사료를 다 먹고 물러나자 아예 밥그릇을 치워버렸다. 일주일 전 일이다. 그날 바로 나루는 말귀 밝은 영물처럼 자취를 감추었다. 으아악오옹~ 으아악오옹~ 그악스럽던 울음소리도 딱 끊겼다.

나루는 윗집 고양이다. 갈색 털 줄무늬의 수컷이다. 품종이나 생김새가 유별나지는 않다. 흔한 털색과 생김새다.

고양이 나루를 처음 보던 날, 그리고...

우리집 마당에서 나루의 휴식시간
▲ 나루 우리집 마당에서 나루의 휴식시간
ⓒ 강은경

관련사진보기


혼자 살던 윗집 남자 현이 키웠다. 현이 길고양이 새끼 한 마리를 주어온 게 2년 몇 개월 전이란다. 이름을 지어주고 쓰다듬고 안아주고 진드기를 잡아주고 놀아주고 고양이 사료와 생선, 참치 통조림 같은 걸 먹이고 교감을 나누며…. 나루를 가리키며 "얘는 자기가 사람인 줄 알아요" 현이 몇 번이나 하는 말을 들었다. 

나루는 주로 안전영역인 윗집 주변에서 어슬렁거렸다. 내키면 우리 집으로 내려와 꽃향기를 음미하듯 소리 없이 꽃밭을 거닐었다. 가끔 길고양이들과 어울려 마을의 후미진 구역을 배회했다. 

한 번은 나루가 두 달여 가까이 보이지 않았었다. 현이 허전한 낯빛으로 빈 마당가를 내내 서성였다. 결국 현이 마을 아래 찻길에서 차에 치여 죽은 나루를 발견했다. 현은 애석한 표정으로 나루의 사체를 수습해 화단 한쪽에 묻어주었다. 

기적인가. 사흘 후, 나루가 나타났다. 야위고 거칠어진 몰골로. 정작 애도 속에 묻힌 고양이는 나루와 닮은 다른 고양이였다. "나루가 부활했나?"라며 현은 반가움과 안도감이 섞인 표정으로 멋쩍게 웃었다. "너, 긴 여행을 하고 돌아왔구나! 세상 구경을 한 거지? 어땠어? " 나도 호들갑스럽게 나루를 반겼다. 그 후로 나는 또 전처럼 나루를 일상 본체만체 했다.

나는 인간의 손을 타며 사는 동물들을 보면 마음이 영 씁쓸하다. 무슨 이유일까. 내가 반려동물을 키우게 된다면, 나의 이기성과 이중적인 애정과 변덕을 매일 날 것으로 드러낼 것 같다. 기분이 좋은 날은 상대를 물고 빨고 먹이고 씻기고 안고 뒹굴 것이다. 생명의 소중함과 책임감을 느낄 것이다. 반려의 성실함과 의리에 감동하고, 외로움도 덜 것이다. 그러나 기분이 언짢거나 상대가 말썽을 부리거나 어쨌든 성가실 때는, 상대를 윽박지르고 때리고 집어던지고 걷어찰지도 모른다.

나루가 우리집 꽃밭에서 산책 중이다.
▲ 꽃밭에서 나루가 우리집 꽃밭에서 산책 중이다.
ⓒ 강은경

관련사진보기


나와 종이 다른 미약한 존재이기에 뒤탈 걱정 없이 패악을 부리며 스트레스를 풀 수도 있다. 만물의 영장이라 자부하며 희열도 느끼겠지. 그러다가 또 안고 빨고 쪽쪽댈 것이다. 나의 편의대로 가두거나 끌고 다니며 내 명령과 기호에 길들일 것이다. 상대는 내게 의존해야만 편하게 살아갈 수 있다. 그런 상대가 고분고분하게 순종하거나 재롱 떠는 모습을 보며 흡족해 하겠지.

사정이 여의치 않게 되거나 애정이 식어버리면 가차 없이 고장 난 장난감처럼, 쓰레기처럼 내다버리지 않을 것이라 장담할 수도 없다. 그리고는 동물원을 찾아가 철창 안에 갇혀 있는 사자나 기린이나 코끼리를 바라보며 박수치고 웃고 감탄할 것이다(동물원은 정말 가고 싶지 않은 기피 장소 중 하나다). 

특정 동물들과 인간과의 긴밀한 관계는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다 한다. 가축용으로 애완용으로 반려의 존재로. 고양이는 이집트의 벽화나 조각, 고양이의 미라 등으로 미루어보아 고대 이집트인에 의해 아프리카 북부의 야생고양이들이 길들여졌을 것이라 추측되고 있다. 5천 년 전부터. 그리고는 수천 년 동안 수많은 고양이들이 인간의 현실과 이야기와 이미지들 속에 줄곧 등장해 왔다. 도도하다, 깔끔하다, 사랑스럽다, 애교스럽다……. 긍정적인 애완의 인상으로. 때로는 주술용이나 신성한 동물로. 

그렇거나 저렇거나 나는 고양이든 다른 동물이든 품에 들여 심하게 길들이고 정들이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다. 

동물에게 정들이고 싶은 마음 추호도 없던 내게...

그런데 덜컥 나루를 떠맡게 되었다. 작년 이맘때 결혼한 현이 신혼살림을 멀리 K시에 있는 아파트에 차렸다. 윗집은 비워둔 채 한 달에 한두 번 들러 잠깐씩 묵고만 갈 거란다. 나루는 데려갈 수 없단다. 나보고 데려다 키우라기에 거절했다. 사료를 계속 보내줄테니 하루 한 번씩 밥만 챙겨주란다. 그마저 야멸차게 마다하지 못했다. 

내가 밥을 챙겨주기 시작하자 나루는 바람에 구르는 솜뭉치처럼 나를 살살 따라 다녔다. 우리집에 와 있는 시간이 점점 늘어났다. 나는 오든 가든 전처럼 그저 데면데면 대했다. 어루만져주지도 않았고 발로 차지도 않았다. 

나루가 내 다리에 엉긴다.
▲ 애교 나루가 내 다리에 엉긴다.
ⓒ 강은경

관련사진보기


나루가 내 다리에 붙어 떨어지려 하지 않는다.
▲ 애교 나루가 내 다리에 붙어 떨어지려 하지 않는다.
ⓒ 강은경

관련사진보기


나루는 달랐다. 내게 바싹 다가왔다. 마당에 서 있을라치면 달려들어 내 다리에 몸을 비비고 꼬고 엉겨댔다. 이오오옹~ 미오오옹~ 간살스럽게 칭얼댔다. 툇마루에 가뿐 올라앉아 방문 앞을 내내 지키고 있거나, 부엌에서 저녁거리라도 준비하고 있으면 이야옹~ 이야옹~ 난리를 쳤다. 

생쥐 목을 따다 토방에 올려놓아 나를 기겁 시키기도 했다. 참새를 잡아 놓기도 했다. 그쯤에서 끝났어도 나루와 나는 서로 무심한듯 무심하지 않으며, 무던하게 지낼 수 있었을 것이다. 서로 손 많이 타지 않고 제각각 본성 대로 한 공간에서.  

그런데 언젠가부터 무슨 연유에선지  나루가 방안으로 들어오지 못해 안달을 부리기 시작했다. 창호문인 부엌문과 방문의 창호지를 찢어놓았다. 방충망도 할퀴고 밀어 뚫었다. 영리하게도 두 발로 서서 문고리를 잡아당겨 방문을 열었다.

나루가 툇마루에 올라 앉아 방충망에 머리를 비비며 방 안에 있는 나를 바라보고 있다.
▲ 고양이의 짝사랑 나루가 툇마루에 올라 앉아 방충망에 머리를 비비며 방 안에 있는 나를 바라보고 있다.
ⓒ 강은경

관련사진보기


치한처럼 갑자기 방으로 뛰어 들어와 나를 질겁하게 만들었다. 한밤중이고 새벽이고 잠긴 문을 된통 흔들어대는 통에  깜짝 놀라 잠자리에서 벌떡벌떡 일어났다('얘는 자기가 사람인 줄 알아요' 현의 말이 자꾸 떠올랐다. 설마…). 수시로 으아악옹~ 으아악옹~ 목청이 찢어지도록 거칠게 울어대는 소리도 듣기 힘들었다. 

"안녕, 나루야... 네 본래 모습으로 독립적으로 살아"

뜨겁게 접촉하고자 하는 나루의 갈구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루에게 곁을 주고 싶은 생각이 일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나루를 더 멀리했다. 가끔은 나루야, 나루야……. 다정하게 부르며 안부를 챙기던 말도 끊었다. 눈맞춤도 그만두었다. 내 밥상에서 더러 생선토막이나 고깃점들을 챙겨놓았다 주던 일도 접었다. 급기야 사료 주기마저 손을 놓게 된 것이다.

"야생으로 돌아가. 네 힘으로 너답게 살아. 네 본래 모습으로…. 독립적으로 살아. 처음에는 힘들겠지만 곧 적응할 거야. 넌 영리하니까. 네 동족들과 잘 어울려 지내고. 건강하고……."

돌계단을 밟으며 우리집 뒤뜰을 날렵하게 오고가는 나루
▲ 나루 돌계단을 밟으며 우리집 뒤뜰을 날렵하게 오고가는 나루
ⓒ 강은경

관련사진보기


나루가 꽃을 감상하고 있나
▲ 나루 나루가 꽃을 감상하고 있나
ⓒ 강은경

관련사진보기


그렇게 보냈다(물론 나루의 주인 현에게는 이러한 사실을 미리 알렸다). 어제 저물녘 잠깐 나루가 찾아왔었다. 검은고양이와 얼룩고양이 두 마리가 슬쩍 뜰 한 바퀴를 돌고 간 후였다. 나루는 이야옹~ 낮게 두어번 보채고 금세 다른 길고양이처럼 싸리나무울타리 구멍을 통해 사라졌다. 다행히 건강한 모습이었다.


태그:#애완동물 , #고양이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2011년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지리산으로 귀촌하였습니다. 2017년도 <아이슬란드가 아니었다면> 출간. 유튜브 <은경씨 놀다>. 네이버블로그 '강누나의깡여행'. 2019년부터 '강가한옥펜션'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