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이라는 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후반전 추가 시간 5분이 다 흘러가도록 세 번째 골은 터지지 않았다. 여자축구 최고의 팀이라 자부하는 인천 현대제철이 창단 2년된 경주 한수원에게 덜미를 잡혀 이대로 주저앉는 줄 알았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페널티킥을 얻어내며 기적의 대역전 드라마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

연장전을 시작하기도 전에 그녀들은 이미 눈물 바다였고 승부차기까지 끝나는 순간 참았던 눈물샘이 활짝 열려 쏟아져내렸다. 한국 여자축구 역사상 가장 극적인 드라마가 11월 첫 월요일 밤을 수놓았다.

최인철 감독이 이끌고 있는 인천 현대제철이 5일 오후 7시 인천 남동 아시아드 경기장에서 벌어진 2018 WK리그 챔피언결정 2차전 경주 한수원과의 홈 경기에서 종료 직전에 얻은 페널티킥을 성공시키며 3-0 승리를 거둬 1, 2차전 합산 점수 3-3을 만들어 연장전에 돌입했고 연장전 종료 직전 경주 한수원의 극적인 페널티킥 동점골로 승부차기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마지막에 활짝 웃은 팀은 승부차기를 3-1로 이긴 인천 현대제철이었다. 2013년부터 2018년에 이르기까지 그녀들은 6년 연속 가장 아름다운 트로피를 들어올린 멋진 주인공이 됐다. 이 놀라운 대역전 드라마를 네 가지 이야기로 엮어보자.

① 창단 2년만에 놀라운 팀 이룬 '경주 한수원'
 
 5일 인천남동경기장에서 열린 2018 WK리그 챔피언결정2차전 인천현대제철 - 경주한수원의 경기에서 현대제철 정설빈 선수가 페널티킥에 성공해 골 세리머니를 하고 있다.

5일 인천남동경기장에서 열린 2018 WK리그 챔피언결정2차전 인천현대제철 - 경주한수원의 경기에서 현대제철 정설빈 선수가 페널티킥에 성공해 골 세리머니를 하고 있다. ⓒ 대한축구협회


챔피언결정전이 시작하기 전에는 가장 싱거운 결승전으로 끝나지 않을까 하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지만 경주 한수원 여자축구팀은 창단 2년 만에 믿기 힘든 자리까지 올라왔다. 지난 2일 경주 황성3구장에서 열린 챔피언결정 1차전에서 최강 인천 현대제철을 3-0으로 이길 것이라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경주 한수원의 실력은 충분히 입증됐다.

그리고 사흘 뒤에 이어진 챔피언결정 2차전도 경주 한수원은 3골 지키기에 매달리지 않고 당당히 맞섰다. 경기 시작 후 26분만에 결정적인 득점 기회까지 먼저 만들어냈으니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미드필더 김아름의 기막힌 전진 패스를 받은 코트디부아르 출신 골잡이 이네스가 혼자서 공을 몰고 들어가 상대 골키퍼와 혼자서 맞서는 순간을 만든 것이다.

그러나 인천 현대제철 골키퍼 김정미는 이네스의 슛 각도를 과감하게 좁히며 슈퍼 세이브를 기록했다. 오랫동안 한국 여자축구대표팀 골문을 지킨 경험이 빛나는 순간이었다. 

결과적으로 연장전 후 승부차기에서 인천 현대제철 골키퍼 김정미에게 두 번이나 막히는 바람에 분루를 삼켜야 했지만 고문희 수석 코치가 준비한 경주 한수원의 적극전인 압박 전술과 탄탄한 수비 조직력은 챔피언 결정전 두 경기를 통해 가장 인상적인 장면들 중 하나로 기억될 것이다.

② 최인철 감독 '신의 한 수, 이소담'

챔피언결정 2차전 정규 시간 90분간 최소한 3골을 넣어야 패하지 않는 인천 현대제철로서는 첫 골이 언제 터지느냐가 매우 중요했다. 전반전 끝나는 시간이 점점 다가오자 벤치도 바빠졌다. 인천 현대제철 최인철 감독은 이례적으로 37분에 첫 번째 선수 교체를 단행했다. 

왼쪽 측면 공격형 미드필더 한채린을 빼고 가운데 미드필더 이소담을 들여보내는 과감한 결단을 내린 것이다. 이는 아무리 생각해도 '신의 한 수' 그 이상의 결단이었다. 이소담은 지난 1차전에 아픈 기억이 남은 선수였기에 더욱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1차전 38분에 경주 한수원은 첫 골을 페널티킥으로 뽑아냈다. 바로 그 페널티킥을 핸드 볼 반칙으로 내준 선수가 이소담이었기에 이번 2차전에 임하는 마음이 가장 무거웠으리라.

최인철 감독은 바로 그녀를 누구보다 굳게 믿었다. 그 덕분에 2차전 전반전 종료 직전에 멋진 첫 골을 뽑아낼 수 있었다. 전반전 추가 시간 2분도 거의 다 끝나는 시점에 왼쪽 측면에서 이영주의 전진 패스가 이어졌고 이 공을 교체 선수 이소담이 잡지 않고 방향을 바꿔 경주 한수원 페널티지역 안으로 밀어줬다. 이 흐르는 공을 따이스가 헛동작으로 슬쩍 피했고 장슬기가 잡아서 왼발로 정확하게 차 넣은 것이다. 

전반전도 끝나기 전에 들여보낸 교체 선수가 무엇보다 귀중한 첫 골을 어시스트했으니 경기 시작 전에 '반전 드라마를 쓸 것'이라고 말한 최인철 감독의 인터뷰 내용이 소름끼칠 정도로 맞아떨어지는 셈이었다.

최인철 감독의 신의 한 수 '이소담'의 활약은 첫 골 어시스트로 그치지 않았다. 후반전 추가 시간 5분도 거의 다 끝날 무렵 그녀의 오른발 슛이 경주 한수원 미드필더 박예은의 팔에 맞은 덕분에 또 하나의 페널티킥을 얻어낸 것이다. 1차전 페널티킥 골을 내주면서 0-3 완패의 시작점이 된 것이나 다름없는 바로 그 이소담이 이번 2차전에서는 너무나 극적인 정규 시간 3-0 점수판을 완성시키는 주역이 된 것이다.

인천 현대제철은 이미 50분에 경주 한수원 외국인 선수 나히의 반칙으로 얻은 페널티킥을 정설빈이 정확하게 성공시켰는데, 마지막 1골이 터지지 않아 이대로 두 경기 합산 점수 2-3으로 패하는 줄 알고 있었다. 정말로 그녀들의 뒷심이 여기까지밖에 안 되는구나 싶었던 순간 이소담이 오른발로 회심의 한 방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 페널티킥도 정설빈이 실수 없이 성공시켜 두 경기 합산 점수 기적의 3-3을 이뤘다.

③ 동점 - 연장전 - 역전 - 동점 - 승부차기 드라마

정규리그 2위 자격으로 플레이오프를 거쳐 챔피언결정전에 오른 경주 한수원이지만 이미 지난해까지 5년 연속 우승 위업을 이룬 최고의 팀 인천 현대제철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쉽게 연속 우승 기록을 이어갈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11월 첫 금요일 밤에 그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경주 한수원이 놀라운 조직력을 자랑하며 1차전 홈 경기를 3-0 완승으로 끝낸 것이다. 2차전이 남아 있었지만 인천 현대제철 선수들의 눈빛은 많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2차전도 전반전이 거의 다 끝나갈 때까지 경주 한수원은 국가대표 새 골키퍼로 듬직하게 자리잡은 윤영글의 슈퍼 세이브 덕분에 실점 없이 후반전을 시작하는 줄 알았다. 전반전 추가 시간 1분 만에 따이스의 다이빙 헤더가 골문 왼쪽 구석으로 빨려들어가는 줄 알았지만 경주 한수원 골키퍼 윤영글은 자기 오른쪽으로 몸을 날려 그 공을 기막히게 쳐냈다. 

이 순간만으로도 인천 현대제철의 연속 우승은 2017년에서 그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로부터 1분 뒤인 전반전 추가 시간 2분에 인천 현대제철의 극적인 첫 골이 터져나왔다. 1, 2차전 합산 점수가 3-3으로 같아지는 순간도 후반전 추가 시간 5분이 다 끝날 무렵이었으니 이렇게 극적인 축구 드라마가 또 있으랴. 

연장전에 접어들어서 8분 만에 인천 현대제철은 이세은의 왼쪽 크로스를 장슬기가 머리로 살짝 방향을 바꿔 놓으며 따이스의 오른발 골을 만들었다. 정말로 믿기 힘든 4-3 대역전승 조건이 만들어지는 순간이었다. 

이대로 연장 후반까지 끝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경주 한수원에게도 페널티킥 기적이 찾아온 것이다. 118분, 인천 현대제철 골문 바로 앞으로 정신없이 공 방향이 바뀌다가 경주 한수원 수비수 손다슬의 오른발 슛이 인천 현대제철 풀백 김혜리의 팔에 걸린 것이다. 믿기 힘든 또 하나의 페널티킥 동점골이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이어진 승부차기 끝내기는 이 멋진 축구 드라마의 특별 보너스였다. 

④ '김정미'의 승부차기 슈퍼 세이브 둘, 3골 모두 성공시킨 '정설빈'

연장전까지도 입을 다물 수 없는 반전 드라마의 연속이었기에 끝내기를 위한 승부차기는 차마 눈 뜨고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심장이 요동치는 순간이었다. 

아무래도 순발력이 더 뛰어난 윤영글이 지키고 있는 경주 한수원의 골문이 철옹성으로 보였다. 하지만 진짜 실력자는 따로 있었다. 바로 인천 현대제철의 베테랑 골키퍼 김정미가 이 드라마 대미를 장식하는 주인공이었다.

경주 한수원 첫 번째 키커 김소이의 오른발 킥이 왼쪽 구석으로 빨려들어갈 때 방향조차 잡지 못해 서서 골을 내준 김정미는 마지 기다렸다는 듯 경주 한수원 두 번째 키커 김혜인의 오른발 슛이 날아오는 순간 자기 오른쪽으로 몸을 날려 페널티킥을 쳐냈다. 그리고는 높게 떴다가 떨어지는 공을 잔디 위에 누워 편안하게 잡아냈다. 

이 드라마 엔딩 씬을 김정미가 작정하고 더 멋지게 만들어내는 듯 보였다. 그러더니 경주 한수원 세 번째 키커 이네스의 오른발 인사이드 킥 순간도 정확하게 타이밍을 잡아 김정미가 막아냈다. 미리 한쪽 방향을 포기하고 몸을 날리기보다는 킥 방향을 눈으로 확인하는 것과 동시에 몸을 날리는 전략이 정확하게 맞아 떨어진 것이다. 베테랑 골키퍼의 품격 바로 그것이었다.

경주 한수원 네 번째 키커 손다슬은 이렇게 슈퍼 세이브를 연거푸 자랑하고 있는 김정미 골키퍼 앞에서 부담을 느낀 나머지 약간 높게 차는 바람에 크로스바 하단에 맞고 골 라인을 넘지 못했다. 그리고는 부심의 노 골 선언과 함께 이 드라마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인천 현대제철 골잡이 정설빈은 정규 시간에 얻은 페널티킥 2개를 각각 오른쪽 구석(50분)과 왼쪽 구석(90+7분)으로 약간 높게 띄워서 넣은 것도 모자라 승부차기 첫 번째 키커로 나와서도 왼쪽 구석으로 비교적 낮게 빨려들어가는 100% 성공률을 자랑했다. 이것은 웬만한 남자축구 경기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사례이기에 정설빈에게는 더 특별한 결승전이 된 셈이다.

2018 WK리그 챔피언결정 2차전 결과(5일 오후 7시, 인천 남동 아시아드 경기장)

★ 인천 현대제철 4-1 경주 한수원 [득점 : 장슬기(45+2분,도움-이소담), 정설빈(50분,PK), 정설빈(90+7분,PK), 따이스(98분,도움-장슬기) / 아스나(120분,PK)]
- 1, 2차전 합산 점수 3-3, 연장전 1-1, 승부차기 3-1로 인천 현대제철 우승

◎ 인천 현대제철 선수들
FW : 따이스
AMF : 한채린(37분↔이소담), 장슬기, 정설빈
DMF : 이세은, 이영주(74분↔박희영)
DF : 김담비(99분↔김두리), 김도연, 임선주(71분↔심서연), 김혜리
GK : 김정미
경고 - 38분 이영주
퇴장 - 118분 김혜리

◎ 경주 한수원 선수들
FW : 이네스
AMF : 나히(51분↔김인지), 박예은, 김아름(106분↔김소이), 이금민
DMF : 다나카 아스나
DF : 이은지(90+1분↔김혜인), 정영아(106분↔정지연), 손다슬, 박세라
GK : 윤영글
경고 - 67분 정영아, 90+2분 윤영글

◇ WK리그 역대 우승 팀
2009년 경남 대교
2010년 수원시설관리공단
2011년 고양 대교
2012년 고양 대교
2013년 인천 현대제철
2014년 인천 현대제철
2015년 인천 현대제철
2016년 인천 현대제철
2017년 인천 현대제철
2018년 인천 현대제철 (6년 연속 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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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대인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일합니다. 축구 이야기, 교육 현장의 이야기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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