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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8.11.30 09:15수정 2018.11.30 09:16
본문 중의 서간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저자의 창작이며, 다만 그 안에 담긴 역사적 사건들과 에피소드들은 사실임을 밝힙니다.[편집자말]
기원전 247년 봄, 하밀카르(시칠리아의 지배권을 두고 카르타고와 로마가 벌인 1차 포에니 전쟁의 막바지에 카르타고 군을 지휘한 장군. 훗날 2차 포에니 전쟁을 일으켜 로마를 침공한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의 아버지이다)가 아내에게 쓴 편지 중에서.
 
사랑하는 아내에게.
제대로 인사도 못하고 떠나 미안하오. 난 정부의 명령으로 시칠리아로 향하는 배에 급하게 올랐소. 우리가 400년이나 지배해온 시칠리아의 서부지역도 이제는 로마에 거의 다 뺏기고 가장 서쪽에 있는 릴리바에움(Lilybaeum, 현재의 마르살라 Marsala)과 드레파눔(Drepanum, 현재의 트라파니 Trapani), 이 두 곳의 항구도시만 겨우 남아있다 하오. 그 어느 가문보다 지중해를 우리의 앞마당처럼 누벼온 바르카스(Barcas, 페니키아어로 번갯불이라는 뜻으로 하밀카르와 한니발이 속한 카르타고의 귀족 가문) 가문의 당주로서 난 시칠리아를 다시 수복할 공적인 책임과 사적인 계기가 모두 있는 셈이오. 이제 갓 태어난 우리 아들은 건강하오? 우리의 맏아들 한니발에게 아비가 사랑한다고 전해주시오.
 
기원전 247년 여름, 하밀카르가 아내에게 쓴 편지 중에서.
 
편지를 자주 쓰지 못해 미안하오. 우리 아들 한니발이 무럭무럭 크고 있다니 기쁘기 한량없소. 나는 지금 팔레르모 바로 옆에 있는 산(현재의 펠레그리노 산) 위에 진을 치고 있소. 참모들은 모두 릴리바에움이나 드레파눔에 진을 치라고 권했지만, 난 그 대신 이 산 위에서 로마군의 동향을 모두 감시하는 편을 택했소. 좀 멀기는 하지만 이 곳에서 드레파눔 항까지의 보급로도 확보해서 본국으로부터의 보급품도 잘 받고 있소. 내가 거느리고 온 병력이 로마군에 비해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나는 이 곳에서 주로 로마군의 배후를 기습하고 우리 해군을 시켜 로마의 상선들도 포획하는 전법을 쓰고 있다오. 이러다 보면 곧 로마군에서 강화를 제안해올 테고, 그럼 난 그대와 사랑하는 한니발 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오. 우리 아들에게 사랑한다고 전해주시오.
 
기원전 246년 봄, 하밀카르가 아내에게 쓴 편지 중에서.
 
우리 아들 한니발이 태어난 지도 벌써 1년이 되었구려. 아이의 첫 번째 생일까지는 시칠리아에서의 전쟁을 끝내고 돌아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빠른 시간 내에 돌아가기는 어려울 듯 하오. 아이가 우리 카르타고와 바르카스 가문에 대한 긍지를 가지도록, 그리고 장차 그 둘을 모두 이끌어갈 위대한 전사가 되도록 잘 가르쳐 주시오. 곧 돌아가리다.
 

제 1차 포에니 전쟁 발발 시 서지중해의 국가별 세력 지도. 제 1차 포에니 전쟁 이전에 시칠리아 서부는 북아프리카에 위치한 카르타고의 지배를 받았으며 서부지역의 두 항구 도시 마르살라(Marsala, 고대명 릴리바에움 Lilybaeum)와 트라파니(Trapani, 고대명 드레파눔 Drepanum)는 이 때 카르타고인들에 의해 개발되었다. 이 두 항구를 통해 카르타고는 서지중해를 자신들의 앞바다(mare nostrum)로 만들었으나 제 1차 포에니 전쟁에서 져 시칠리아를 잃으면서 지중해의 패권을 로마에 넘겨야 했다. ⓒ wikipedia

 
기원전 244년 봄, 하밀카르가 아내에게 쓴 편지 중에서.
 
시칠리아에 온 지도 어느덧 3년이 다 됐구려. 나와 우리 병사들은 잘 버티고 있소. 로마군은 산 위에 있는 우리 진지를 여러 차례 공격했지만 번번이 실패했소. 그나저나 이렇게 가까이에서 로마군을 관찰하고 있노라니 그들이 어떻게 저렇게 잘 싸우는지 도저히 믿기질 않을 정도요. 저들은 이렇게 추운 겨울철에도 고기는 거의 먹지를 않소.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해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순수한 로마 시민들로만 이루어진 저들의 1개 군단은 대략 6천명 정도인데, 이들은 17세 이상의 전투 경험이 적은 젊은이들로 이루어진 2,400명의 하스타티(Hastati), 30세 이상의 노련하고 강건한 고참들로 이루어진 2,400명의 프린키페스(Principes), 그리고 40세부터 곧 제대하게 되는 45세까지의 베테랑으로 이루어진 1,200명의 트리아리(Triarii), 이렇게 세 부대로 나뉘어 있소.

각각의 부대는 다시 120명(트리아리는 60명)으로 이루어진 켄투리아(Centuria, 백인대)로 나뉘는데, 이 켄투리아는 켄투리오(Centurio, 백인대장)라고 불리는 경험 많고 용맹한 전사가 지휘를 하오. 이 켄투리오가 로마인들이 군단 내에서 생활하는 최소 단위인데, 이들은 막사에서 함께 지내고 취사도 함께 하며, 늘 한 몸처럼 움직인다오.
 
그런데 이들이 먹고 마시는 것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빈약하오. 앞서 말한 것처럼 저들은 우선 고기를 거의 먹지 않소. 켄투리아 단위로 수령하는 식량이라는 것이 밀가루와 올리브유, 우유나 양유, 거기에 치즈와 약간의 채소, 그리고 그리스인들처럼 세 배 정도의 물로 희석시킨 시큼한 와인이 고작이라오.

숙영지에서는 빵을 구워 먹기도 하지만 행군을 하거나 전투 중일 때는 보통 밀가루에 우유나 양유를 붓고 묽은 죽처럼 끓여 먹는다오. 그리고 치즈와 양파를 곁들여 와인 두어 잔을 마시면 식사가 끝나는 것이오. 대부분 북아프리카와 갈리아, 게르마니아 같은 곳에서 모집한 용병들로 이루어진 우리 카르타고 병사들은 저런 빈약한 식사로는 단 하루도 버티지 못할 것이오.
 
나도 저들을 이해해보려고 가끔 로마 군단병과 같은 식사를 해보곤 하는데 반나절이 지나기도 전에 배가 고파오고, 뭐든 먹지 않으면 기운이 없어 군무를 보지 못할 정도요. 우리 병사들은 로마 병사들이 먹는 것과 같은 음식을 먹느니 차라리 용병료를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겠노라고 농을 하기도 합디다.
 
그런데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저리 빈약한 식사를 하고, 거기에 키나 체격도 우리 게르만 병사들보다 훨씬 작은 로마군을 좀처럼 이길 수가 없다는 것이오. 아니, 이긴다기보다는 우리는 이미 지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지도 모르겠소.
 
비록 본국 카르타고는 아무 이상이 없다고 하지만 우리는 이미 몇 백 년 동안 지중해 서부를 우리 바다(mare nostrum)로 만드는데 가장 큰 발판이 됐던 시칠리아 서부 지역을 모두 로마에 뺏긴 것이나 마찬가지요. 정부에서는 릴리바에움(현재의 마르살라 항)과 드레파눔(현재의 트라파니)이 아직 우리 수중에 있고, 본국으로부터 이 두 곳의 항구도시를 통해 병력과 보급을 계속해줄 수 있으니 안심하고 싸우라고 합디다만, 그건 싸움을 모르는 바보들의 얘기일 뿐이요.

해운과 통상으로 늘 바다에 익숙한 선원들이 중심이 된 우리 카르타고 해군이 물이라고는 아마 자기네 수도(로마)를 가로지르는 강 밖에 모르는 로마인들과 해전에서 대등하게 싸우고 있다는 것이 그 증거요. 물론 로마인 특유의 관용으로 시라고사나 메시나 같은 시칠리아 동부의 여러 왕국들을 동맹으로 포섭하고 그들의 해군력을 지원받는 것도 한 이유가 되겠지만, 싸움이라는 것이 원래 불공평한 것이 아니겠소?
 
내가 이렇게 로마인들과 그들의 관습에 관해 길게 적는 것은 나중에 혹시 한니발이 자랐을 때 나처럼 로마인들과 전쟁을 해야 하는 경우가 생기게 된다면 지금 내가 남기는 기록들이 조금이라도 우리 아들에게 도움이 됐으면 하는 마음 때문이오. 정찰 내보낸 전령이 돌아온 듯하니 오늘은 이만 줄여야겠소. 다시 편지 쓰리다. 우리 한니발에게도 내 애정을 전해 주시오.
  

로마 군단병들의 식료품. 로마 군단병 1인은 하루에 대략 1.5kg의 밀 또는 보리와 소금, 올리브오일, 치즈와 우유, 시큼한 와인을 보급 받아 아침과 저녁 두 끼의 식사를 백인대 단위로 만들어 먹었으며 지역이나 시대에 따라 여기에 물고기, 새고기, 소시지 등이 추가되기도 했다. ⓒ gollygeegosh.blogspot.com

 
기원전 243년 겨울, 하밀카르가 아내에게 쓴 편지 중에서.
 
내가 시칠리아에 온 지도 어느덧 4년째로 접어드는 구려. 한니발이 이제 걷고 말도 잘하는 데다 힘이 세다는 당신 편지를 받고 보니 한편으로는 무척 기쁘면서도, 사랑하는 아들이 커가는 것을 보지 못하는 슬픔도 너무나 크다오.
 
우리와 로마군은 이제 각자의 진지에 틀어박혀 서로 눈치만 살피고 있는 실정이오. 로마인들과 전면전을 피하면서 꾸준히 괴롭히다 보면 전쟁에 지친 로마인들이 강화를 먼저 제안해오지 않을까 했던 나의 기대는 보기 좋게 빗나가 버렸다는 것을 고백해야겠소. 우리 첩자의 보고에 따르면 로마인들은 강화를 제안하기는커녕 오히려 우리 함대와 해전을 벌이기 위해 새로운 함선들을 건조하려 하고 있다 하오.

나는 우리 정부에 로마의 이런 움직임을 이미 전했지만 한논(Hannon. 로마와의 전쟁을 피하고 국내 발전에 힘써야 한다고 주장하던 카르타고 정치가. 하밀카르와 한니발이 속한 바르카스 가문이 주장한 해외 식민지 개척과 영토 확장에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같은 이들은 오히려 그 소문을 근거로 들어 우리가 하루 속히 로마에 먼저 강화 제안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오.

참으로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소. 우리가 평화를 원한들 로마가 그것을 원하지 않는데 무엇 때문에 그들이 강화를 받아들인단 말이오? 나의 의견은 정부 내에서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들과 바르카스 가문의 다른 이들에게도 서신으로 보내 놨으니 좋은 소식이 오기만을 기다릴 뿐이오.
 
기원전 242년 겨울, 하밀카르가 아내에게 쓴 편지 중에서.
 
오늘은 몹시 우울한 날이오. 로마도 전쟁 비용이 거의 바닥났을 거라 생각했는데, 로마의 원로원은 전시 국채를 발행하면서까지 기어코 200척이나 되는 대함대를 만들어 집정관인 카툴루스의 지휘 아래 이 곳 시칠리아로 보냈소. 배의 숫자는 많아도 저들도 바다에 익숙한 고참 해군들과 지휘관들은 많지 않기 때문에 우리 카르타고의 함대만 제때 출동했더라면 아마 무찌를 수 있었을텐데…

본국 정부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수수방관하기만 했다오. 결국 우리는 남은 두 항구 중에 릴리바에움(마르살라)을 빼앗겼고, 이제 로마군은 아무런 방해 없이 바다를 통해 곧장 우리의 배후를 공격할 수 있게 됐다오. 긴급 전령을 통해 정부에 이런 소식을 전했지만 아무래도 이미 때를 놓친 것 같은 불길한 생각이 드오.
 
그나마 이제 한니발이 글자를 배워 조금씩 글을 쓸 수 있다는 소식이 작은 위안이 되는구려. 어서 우리 아들과 편지를 주고 받고 싶다는 생각에 마음이 들뜨오. 화가들을 시켜 한니발의 초상화라도 그려 보내주구려. 이제 우리에게 남은 항구가 드레파눔(트라파니) 밖에 없는 데다가 카르타고에서 오는 바닷길까지 로마 함대가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니 이 편지가 제대로 당신의 손에 들어갈 수나 있을지 모르겠오.
 
기원전 241년 3월 말, 하밀카르가 아들 한니발에게 쓴 편지 중에서.
 
사랑하는 나의 아들, 한니발. 이제 네가 글을 읽고 쓸 수 있다는 네 어머니의 편지를 받았다. 하여 너에게 처음으로 이렇게 편지를 보내보는구나. 갓 세상에 나온 너를 제대로 안아 보지도 못하고 이 곳 시칠리아로 떠나온 지도 어느새 6년. 네가 얼마나 늠름하게 잘 자라고 있을지 생각하는 것만이 이 아비의 유일한 낙이자 즐거움이었단다.
 
너에게 쓰는 첫 편지가 우리 가문과 카르타고에 빛이 되는 소식이기를 바랬건만, 신은 아직 우리에게 그런 희망을 허락하지 않으시는구나. 이제부터의 소식은 어린 네가 제대로 이해하기는 힘들 수도 있으니 삼촌과 함께 읽으면서 설명을 듣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아비의 오랜 청원과 로마 함대의 릴리바에움(마르살라) 점령 소식에 놀란 우리 정부는 급하게 함대를 파견하기는 했다. 그들은 시칠리아의 우리 카르타고군을 위한 반년치의 무기와 군량을 싣고 있었지. 그러나 정부는 큰 착각을 한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수송선단이 아니라 로마군을 시칠리아 서해안에서 내몰 전투선단이었단다. 대체 수송선단이 200척이나 되는 로마함대를 맞아 어떻게 버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건지 알 수가 없구나.
 
본국에서 출발한 우리 함대는 릴리바에움과 드레파눔 사이에 있는 마레티모 섬에 잠시 정박한 채 우리에게 접근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지만, 로마의 집정관이자 시칠리아 전역을 지휘하는 카툴루스는 그리 어리석은 자가 아니더구나. 그는 우리 함대가 항구에 접근하는 것을 감시하는 대신에 먼저 우리 함대를 쫓아와서는 심지어 역풍과 파도를 무릅쓴 채로 싸움을 걸었다.

우리 함대는 완전히 허를 찔린 것이지. 결과는 비참했다. 일단 배와 배가 부딪치고 상대방의 배에 올라 육박전으로 싸우면 수송선단의 선원들이 로마군의 정예인 중무장 보병과 상대가 될 리 만무했단다. 우리 함대는 50척 이상이 침몰했고 70척 이상이 로마군에 나포되었으며, 겨우 몇 십 척만이 바람을 타고 본국으로 도망쳤단다.
 
아들아, 비록 적이지만 나는 카툴루스의 전략에 감탄을 금하지 않을 수 없었음을 고백해야겠다. 우선 그는 범용한 지휘관이라면 누구든 피했을 싸움을 먼저 걸어옴으로써 방심하고 있던 우리로부터 싸움의 주도권을 빼앗고, 본인이 원했던 전장터에서 싸움을 할 수 있었다. 두 번째는 똑같은 5단 갤리선이지만 우리 배가 군량과 무기를 실어 기동력이 떨어진다는 것을 정찰을 통해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역풍이라는 불리한 조건 속에서도 자신들의 전함이 상대적으로 가볍고 빠르다는 데에 승부를 걸고, 바람을 최대한 적게 받기 위해 돛을 내린 채로 노만 저어 싸움을 건 것이지.

만약 우리 함대의 지휘관들이 조금만 결단력과 지혜를 갖추고 있었다면 오히려 무거운 배의 무게와 순풍을 이용해 적 함선들의 측면을 들이받아 그대로 침몰시켜 버리는 충파전법을 구사할 수 있었겠지만, 그들은 오로지 군량과 무기를 시칠리아의 우리 군에게 전달하라는 본국 정부의 명령만 생각하고 있었을 뿐, 전장의 큰 그림과 대국은 전혀 볼 줄 몰랐단다.
 
나의 아들 한니발아, 만약 네가 커서 이 아비 대신 카르타고 군을 지휘하게 된다면 이 교훈을 절대 잊지 말아라. 전쟁을 시작할 때는 항상 적이 예상 가능한 범위를 벗어나 의표를 찌르는 기습을 하고, 일단 기습을 한 뒤에는 기동력을 최우선으로 삼거라. 그리고 무엇보다 이 전쟁이 무엇을 위한 전쟁인지 그 궁극적인 목표를 항상 전략의 최우선에 두어야 한다.
 
지금 당장 이 아비가 할 수 있는 건 한때 지중해 최강이자 바다의 주인이었던 카르타고 함대의 몰락을 무기력하게 지켜보는 것과 이렇게 글로나마 내가 얻은 교훈을 네게 전해주는 것 밖에 없구나. 참으로 분하고 또 분한 노릇이 아닐 수 없구나.
 

하밀카르의 아들인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어 일으킨 제 2차 포에니 전쟁의 마지막 전투인 자마전투. 그 어떤 로마 장군도 한니발을 이기지 못했으나 철저하게 그를 연구하고 그의 전법을 그대로 응용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한니발식 전략으로 한니발을 이기고 로마를 구했다. ⓒ Cornelis Cort

 
기원전 241년 4월, 하밀카르가 아들 한니발에게 쓴 편지 중에서.
 
사랑하는 나의 아들 한니발아, 이제 더 이상의 지원도, 병력도 기대할 수 없게 된 아비에게 우리 정부는 로마와의 강화 교섭을 명령했다. 아마 너도 어미나 삼촌을 따라가 봤겠지만 지난 해전에서 지고 본국으로 도망간 우리 함대 사령관은 공개 처형을 당했단다. 그의 무능함과 전투에서의 손실을 생각하면 받아 마땅한 벌이겠지.

하지만 네게만 말하건대 아비는 가끔 로마인들의 방식이 전쟁을 지휘하는 입장에서는 더 유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구나. 패전 시 그 책임을 물어 사령관을 처형하는 우리와는 달리 로마인들은 자신들이 뽑은 임기 1년의 집정관이 군사령관을 겸임하도록 하고, 일단 집정관이 출정한 이상은 전쟁이든 강화든 모든 권한을 집정관에게 일임한단다. 전장에서 병사들을 버리고 도망치지 않는 이상, 어떤 집정관도 자신이 내린 결정에 대해 처벌받거나 다른 결정을 강요받지 않는 것이지.

한정된 임무와 권한만을 부여받은 채 처벌의 두려움에 떠는 우리 지휘관들과는 전장을 바라보는 안목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일전에 얘기했던 교훈들에 더해 이 또한 잊지 말거라. 최고 사령관은 항상 최대한의 권한을 본인이 지니되, 일단 하급 지휘관에게 위임한 권한에 대해서는 절대 간섭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말이다. 특히 전역이 광대하고 여러 싸움터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전투를 벌여야 할 때는 이런 현장임무형 지휘가 최적의 방안이 될 것이다.

아비는 이제 우리 정부의 명령에 따라 로마 집정관인 카툴루스와 강화 협상을 해야만 한다. 지금은 우선 휴전을 하고 사신을 통해 기본적인 조건들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 있는 중인데, 내 손에 든 패가 별로 없다보니 로마가 원하는 것을 거의 그대로 동의하는 수준에 불과하구나. 그나마 천만다행인 것은 로마가 특유의 관용을 발휘해준 덕에 아주 가혹한 조건들은 아니라는 점이다. 네가 다 이해할 수는 없겠다만 훗날의 공부를 위해 여기에 그 강화 조건들을 적어본다.
 
카르타고는 시칠리아 섬에서 철수하고, 시칠리아에 대한 영유권을 영원히 포기한다. 카르타고는 시라쿠사를 포함한 로마 동맹국들에 대해 싸움을 걸지 않기로 약속한다. 포로는 양국 모두 몸값을 받지 않고 석방한다. 카르타고는 로마에 대한 배상금으로 2천200탤런트를 10년 분할로 지불한다. 로마는 카르타고의 자치와 독립을 존중한다.(시오노 나나미 '로마인 이야기' 제 2권 62쪽)
 
나의 아들아, 이것은 일방적으로 전투에 참패한 나라와 승자가 협상하는 조건이라고 보긴 힘들 것이다. 로마는 그만큼 우리에게 그들의 관용을 보여줬다. 그러나 나는 그런 로마의 관용이 오만으로 보여 더욱 분하고 치가 떨린다. 승자는 승자의 권리가, 패자에게는 패자의 명예가 있을진대 그들은 관용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그들의 일개 동맹국 대하듯 대하면서 더욱 비참하게 만들고 있구나.

우리는 한때 지중해를 우리의 앞바다로 생각할 정도로 세계의 주인이었지만 이제 로마의 너그러움에 목을 매는 신세가 돼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반드시 기회는 있을 것이다. 나는 오늘의 치욕을 절대로 잊지 않을 것이다. 반드시 재기해서 로마에게 이 빚을 갚아줄 것이다. 아들아, 너도 이 아비와 함께 신 앞에 맹세하자. 반드시 로마에 복수하겠다고! 나는 한논 같은 우유부단한 인간들이 득세하는 본국 정부에는 아무 미련이 없다. 나는 나의 영토를 새로이 개척할 것이다. 그 때는 너도 나와 함께 로마를 무찌르자꾸나!
 
16년 뒤인 기원전 225년, 하밀카르의 아들인 한니발은 로마와 심지어 본국 카르타고에게도 최종 목표를 숨긴 채 알프스를 넘어 로마를 침공했고, 한때 로마를 제외한 이탈리아 전역을 장악했다. 그 어떤 로마 장군도 그를 이기지 못했으며, 오직 단 한 사람, 철저하게 한니발을 연구하고 그의 전략을 따라 배운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만이 한니발 자신의 방식으로 한니발을 무찔렀다. 한니발은 아홉살에 아버지 하밀카르를 따라 에스파냐로 건너가면서 신 앞에 서약한 것과 같이 죽을 때까지 로마를 적으로 삼아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
 
(21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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